당신도 ‘업보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한량없는 백천 억 용이 와서 
문수보살 보조법계경 법문 듣고
사람 되어 정진하길 발원하니 
용의 몸 버리고 천상·인간으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말한다. 그대가 나에게 잘하면 나도 잘할 것이고, 내가 잘했을 때엔 그대도 나에게 잘해야 한다는 논리로 무장되어 절대 손해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 세상은 그야말로 피로사회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잘살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짐이 되어버려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지만 이런 피로사회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불안정이 우울증에 빠지게 만든다고 한다. 우울증이 넘쳐나는 세상. 그것은 아마도 자신을 나약한 인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때때로 나약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행복을 찾아 떠날 줄 아는 상당히 자주적인 인간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항상 자주적인 삶, 주체적인 의식을 강조하는데 그것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자주적이어야 할까. 바로 여래의 성품을 간직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내가 부처님이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부처님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게 된다. 그 안목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해주는 간결한 문장이 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공으로 살라. 머무는 곳마다 모두 행복하리라.”(임제선사) 

내 삶 속에서만큼은 나는 주인공이어야 한다. 내 삶에서 ‘나’란 존재가 배제되었거나 그런 생각으로 인해 우울하고 쓸쓸하게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났다. 

어떻게 행복하게 주인공으로 살 것인가? 답은 보현보살의 삶인 보현행원의 길이다. 바로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6000 비구와 많은 법회대중과 함께 법문을 듣고 행복을 찾아 떠나는 선재의 삶이 우리에게 그 길을 안내할 것이다. 그 길에 들어서기 전에 축생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법화경>에서 용녀의 성불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사건 역시 축생인 소녀 용이 해탈하는 내용이다. 

삽화=손정은

축생도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기적 같은 일이 부처님회상에서는 일어나는 것이다. 중생의 차별적인 상대적 가치관이 부처님의 세계에선 걸림 없는 무장애법계의 평등으로 펼쳐지니 성불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러 부류의 법회대중(諸乘人會)’의 사연이다.

이 때 문수사리보살이 비구들을 권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게 하고는 점점 남쪽으로 가면서 인간 세상을 지나다가 복성의 동쪽 장엄당 사라숲에 머물렀다. 이곳은 옛부터 부처님들이 계시면서 중생을 교화하시던 큰 탑이 있었던 곳이며, 세존께서도 과거에 보살행을 닦을 때 한량없이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리시던 곳이다. 이런 까닭에 이 숲의 명성이 무량 불국토에 소문이 퍼져나가니 하늘,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사람, 사람 아닌 이들이 항상 공양하게 되었다. 이에 문수사리 보살이 그의 권속들과 함께 이곳에 이르러 ‘법계를 두루 비추는 경(普照法界經)’을 설하니 백만의 나유타 경의 가르침이 저절로 다가왔다. 이 경을 말할 때 바다 가운데 한량없는 백천 억의 용들이 와서 법문을 듣고 용으로 사는 삶을 싫어하며 사람이 되어 정진하기를 원하니 즉시 용의 몸을 버리고 천상이나 인간에 태어났다. 1만의 용들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가지 않게 되었고,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은 삼승 가운데서 제각기 조복하게 되었다.

사회에 나아가 언제나 힘들고 지친 이들을 이롭게 하는 수행자의 삶을 발원한 사리불과 6000 비구들이 문수보살에게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듣고 보리심을 내어 정진하여 소식을 얻었다. 이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며 법문을 듣던 많은 용들은 용의 몸을 벗어나 인간의 몸이 되기를 원했다. 용이 아무리 잘나도 축생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조법계경>을 듣고 지혜의 안목을 성취하는 순간, 한 줄기 광명이 비추니 모두 축생의 업식이 즉시 사라져 인간이 되었다. 이 지광법문(智光法門)이 1만의 용들에게 비추니 모두 보리심을 내어 만행의 문에 회향하는 수행을 하니 이로써 업보의 굴레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도 항상 지혜의 가르침이 열리는 법회에 동참하여 법문을 듣는 것을 일상화해야 내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불교신문3461호/2019년2월2일자] 
 

원욱스님 공주 동학사 화엄승가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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