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사무치는 격정·절규의 쇳송 울린다”

 

찬바람 같은 청규 속에서 
용광로 심장 불태우며 달려가다… 

나의 요람은 ‘범어사 금어선원’
죽비ㆍ경쇠 소리 속 용맹정진 

 …

“진리의 길 걸을 수 있는 
인간수업의 장소로 
이 門 찾아온 나로서는 
닥치는대로 마구 설쳤다…” 

일타스님은 ‘광덕스님 비문’에서 “스님은 언제나 삼매를 증득하신 듯 종종 법회에 종종 법문을 개양하며 야간을 통하여서는 저술집필에 정진하시니 수십여 종의 저서·역서 그리고 수많은 찬불시가를 송출하여 가릉빈가의 음악으로 중생계를 고동하였다. 한국불교 포교의 선각자로 칭송되었으니 과연 스님은 도심포교 청년학생포교의 선구자로서 불교를 젊게 만드는 여래의 사자라 할 것”이라고 칭송했다.

이런 제목(‘나의 입산시절’)을 대하면 어차피 회고조(懷古調)가 될 수밖에 없다. 산을 떠난 다람쥐인양 역시 생각은 꿀밤나무 숲이다. 

나의 요람은 범어사(梵魚寺)다. 지금도 제방 선원이 그러하겠지만 입방선(入放禪) 죽비소리와 그리고 방선시(放禪時)의 경쇠소리, 하루 사분정진(四分精進)이 틀에 박힌 듯이 진행되는 그 속에서 나는 컸다. 그리고 결제 중 약 반 동안은 밤 12시에 방선하는 가행정진(加行精進)이다. 

그때도 역시 돌을 찢는 듯한 죽비소리 세 번, 다음에 가벼운 경쇠소리가 이어진다. 죽비소리만큼 내 마음을 정결케 해주는 것도 없다. 저 간결하면서도 격조 높은 파열음이 어쩌면 흐트러진 자세를 순간에 가다듬어 주고 산란한 마음을 일순간에 정돈하며 격발시키는 그런 힘으로 작용해오는 것이다. 360일 이런 생활의 반복이다. 잠시 자유시간이 있다면 한 달에 두 번의 목욕날과 세탁, 삭발일.

대중수요를 메꿀 채소는 모두 선방대중의 작무(作務)에 의한 자급자족이었다. 땔 나무는 부목(負木)이 있지만 역시 대중운력(大衆運役)으로 종종 거들었다. 나는 정통(淨桶)이라는 목욕물 데우는 소임 밖에도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려고 서둘러 댔기 때문에 한때는 산에 가서 매일 나무 한 짐씩 해오는 것이 일과이기도 했다. 

어쩌다 저녁 방선죽비 다음에 별미공양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자비보살인 도감(都監)스님이 감김치를 꺼내온 것이다. 그 해 가을 감이 아직 여물기도 전인 풋감을 따서 소금물에 담근 것인데 겨울인 그 때도 역시 풋감이다. 그해 여름 절이 육군 병원환자를 수용하게 되어 도량 내 과일이 남지 않게 되자 미리 따서 담갔던 것이다. 그것을 두어 개씩 배당받고 나서는 유일한 식도락에 젖고 있던 서글픈 광경. 역시 그것은 일즙일채(一汁一菜)의 전통 선가식(禪家食)인 그때로서는 별미일 수밖에 없었다. 

새벽 3시면 기상과 함께 쇳송(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예불 준비의 하나로, 종 따위를 치며 진언이나 법계를 외우는 일)이다. 저 때 하늘에 사무치는 비원(悲願)과 의지(意志)와 격정과 절규를 담는 듯한 쇳송 목소리의 임자는 지금은 죽고 없다. 

그러나 인생을 모두 걸고 세세생생을 모두 바쳐서 거친 구도의 길을 내어닫고 있던 젊은 운수(雲水)들의 영혼의 절규 같은 저 때의 목소리는 영원히 영원히 내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폭발하는 젊고 뜨거운 의지가 찬 서리발이 출출 흐르는 밤하늘에 불꽃처럼 터져나가는 것을 지금도 느낀다. 자나 깨나 말뚝 박듯이 죽비 밑에서 살았다. 해제도 결제도, 그 사이에 법요(法要)는 있었지만 죽비소리는 쉬지 않았다.

초하루 보름, 두 번의 종사(宗師)의 상당법어(上堂法語)는 끊이지 않았다. 입승 스님이 세 번을 청하면 어떤 때라도 종사의 법문은 열렸다. 불법이 무엇인지 아예 생각도 없이 장부로서 세상에 태어나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인간수업의 장소로 이 문을 찾아온 나로서는 닥치는 대로 마구 설쳤다. 만나는 분마다 코가 땅에 닿도록 절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나에게 허락된 일은 무엇이든지 나섰으며 하루 한두 번씩은 반드시 화상 앞에 나아가 법을 들었고 소견을 내놓았다. 그러는 사이 자비 넘치는 화상에게 인정사정 없는 방망이를 무수히 받았다.

한번은 무엇인가 주워섬기고 있는 내 면전에 먹이 흠뻑 찍힌 붓을 잡고 쓰던 글을 멈추시고 내 눈앞에 붓끝을 들어대시면서 “일러라, 일러!” 벽력같이 다그치시고는 머뭇대는 것을 보자 사정없이 문 밖으로 내쫓으셨다. 그날 이후, 화상의 법문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조실방 마루에 엎드려 도적질하듯이 절한 것이 생각난다. 

산에는 아름드리나무가 빽빽했고 그 사이에는 근근이 멧돼지 길 정도의 틈을 남기고 진달래 철쭉꽃이 꽉 찼었다. 봄이 오면 온 산중이 빨갛게 물들었고 산새만이 우짖는 동안에 봄과 함께 꽃은 져갔다. 갈대꽃 하얗게 바람에 물결치고 흰구름 푸른 봉우리 곁을 무심히 흘러갔다. 어쩌면 양털 코트 같기도 한 누더기 한 벌 걸치고 그 사이를 바람에 내맡긴 운수들. 신록이 찰찰 흐르는 여름. 또는 하늘에서 피를 부을 것 같은 어쩌면 석류알을 흘린 것 같은 단풍. 

또한 산허리에서부터 대하(大河)가 흘러내린 것 같은 바위의 강물 사이에서 계절은 가고 세월이 흘렀다. 그렇건만 저 시절의 나는 하늘도 산도 물도 보질 못했다. 찬바람 같은 청규(淸規)속에서 용광로의 심장을 불태우면서 이를 악물고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려갔다. 그때 내가 몸담고 있던 범어사 금어선원(金魚禪院)이라는 둥우리가 그런 곳이었고 그 둥치 속에 함께 있던 당시의 운납(雲衲)들이 그런 전통을 만들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스님들이 그때의 생활들이 너무나 고맙고 그리워진다. 역시 나는 영원히 산다람쥐인가 보다.  

1976년 11월28일자 불교신문(전신 ‘대한불교신문’ 674호) 2면에 실린 광덕스님의 ‘나의 입산시절’. 광덕스님은 이 글을 통해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정진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불교신문3461호/2019년2월2일자] 
 

정리=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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