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컴한 석굴에서 마주친 부처님…아! 환희롭다

아쇼카왕 때 건립된 석굴사원 
‘본생경’ 등 경전 의거해 그려 
‘본생도’와 ‘불전도’ 위주 벽화
현재 확인 가능한 본생도 25종

인도 오랑가바드에 있는 아잔타 석굴 사원, 기원전2세기~기원후 7세기에 조성됐다.

겨울도 이제 한복판에 들어섰다. 겨울이 오면 늘 병을 앓듯 인도에 대한 그리움이 스믈스믈 피어난다. 부처님 성도일에 모여든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리는 보드가야, 신도들의 기도소리에 파묻힌 금강보좌, 오색의 천으로 뒤덮인 영취산 가는길, 새벽 안개에 쌓인 룸비니동산...모든 것이 그립고 정겹다. 겨울의 인도여행, 좋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그래도 늘 인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바로 아잔타석굴이다. 한 여름의 신록이 모두 사라지고 와고라강은 다 말라버린 채 황량한 마른 가지만 무성하지만, 그래도 아잔타석굴은 많은 것을 품고 있어 늘 풍요롭고 찬란하다.

기원전 5세기경 인도는 여러 소국가로 분열되었고, 이즈음 불교가 탄생하였다. 마가다국 정반왕(淨飯王)의 아들로 태어난 고타마 싯달타에 의해 창시된 불교는 인도 최초로 통일제국을 이룩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기원전 268년~232년) 때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다. 이어 숭가(Sunga)왕조, 안드라(Andra)왕조에 이르러서는 갠지즈강 유역과 중인도 지역에서 불교미술품이 제작되고 데칸고원 서부에 석굴사원이 개착되면서 본격적으로 불교미술이 발전하였다. 이때 건립된 석굴사원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잔타(Ajanta)석굴사원이다. 

북서부 타프티강 지류인 와고라(Waghora)강이 마치 말발굽처럼 휘돌아 흐르는 구릉의 중복에 개착된 아잔타석굴은 오랑가바드(Aurangabad)에서 북쪽으로 약 104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석굴은 모두 29개로, 입구의 1번 동굴에서부터 가장 안쪽인 29번 동굴까지 반달형의 계곡을 끼고 형성되어 있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개착되어 기원후 7세기경까지 오랜 기간 동안 개착된 이 석굴은 8세기에 들어서면서 불교가 점차로 쇠퇴함에 따라 수백 년간 잊혀졌다. 그후 1819년 와고라강 유역에 호랑이 사냥을 나왔던 영국군 병사 존 스미스 (John Smith)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고, 1893년 퍼어슨(Person)이 조사 발굴하면서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잔타석굴이 처음 개착된 시기는 기원전 2세기~기원후 1세기 즈음이었다. 당시는 부파불교(部派佛敎)를 신봉하던 시기였으며, 따라서 불상은 전혀 조각되지 않았다. 승려가 거주하는 승원과 스투파(불탑)를 모신 탑원이 세워졌다. 이때 조영된 대표적인 석굴로는 8, 9, 10, 12, 13, 15A굴 등이 있는데, 그중 제9굴과 10굴에 당시의 벽화가 일부 남아있다. 

아잔타 석굴 1굴 후랑좌부.

10굴은 가장 오래된 석굴로 석굴 중앙에 탑이 봉안된 탑원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좌우 양측랑(兩側廊)의 상반에 띠 모양으로 길게 벽화가 일부 남아있다. 지금은 대부분 박락되고 간신히 남아있는 부분도 그을음으로 매우 검게 변색되었으나, 보리수와 불탑을 예배하는 왕의 행렬과 샤마본생, 육아백상본생(六牙白象本生) 등이 긴 부조로 남아있다. 

산 속에서 눈먼 부모를 공양하던 샤마선인이 수렵하러 왔던 왕의 화살에 맞아 죽었으나 그 효양의 덕이 하늘과 통하여 본래대로 살아 돌아갔다는 샤마본생, 첫째부인을 질투하여 죽인 코끼리왕의 둘째 왕비가 사냥꾼이 가져간 어금니를 보고 결국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쓰러져서 지옥에 떨어져 버렸다는 육아백상본생은 희미하긴 하지만 이른 시기부터 본생도가 사원벽화의 주요한 주제였음을 보여준다. 열주와 천장 등에는 입, 좌상의 불상이 그려져 있으나 이것은 후대에 그려진 것이다. 

9굴 또한 같은 시기에 조영되었으며 용왕예배도, 불탑공양도 등이 남아있다. 10굴과 9굴 등 초기에 조성된 석굴에는 본생도를 위주로 한 벽화가 주류를 이루는데, 당시는 아직까지 소승불교가 우세했던 시대로서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였기 때문에 예배도는 그려지지 않았다. 대신 본생도와 불전도 위주의 그림들이 벽화를 장식하였다. 

아잔타 석굴 17굴 정면랑 취상조복. 부처님을 해치려고 한 술 취한 코끼리가 오히려 부처님에게 감복해 조복했다는 일화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3세기 이 지역을 다스리던 사타바하나왕조가 붕괴한 후 잠시 석굴의 개굴이 중단되었으나 5세기가 되자 바카타카(Vakataka) 왕조 하에 대승불교 신도가 대규모의 승원과 스투파를 모시는 굴을 개착하기 시작했다. 5세기후반~7세기 초에 이루어진 아잔타석굴의 제2조영기에는 1굴과 2굴, 16굴, 17굴 등 벽화로 유명한 석굴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석굴이 개착되었다. 

이때는 바카타카왕조의 후원 아래 불상 위주의 승원굴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이 시기는 제1기 때와는 달리 대승불교가 성행하면서 불상예배가 성행했기 때문에 스투파의 전면에 커다란 불상을 안치하고, 승원의 내당에도 불상을 모셨다. 벽면에는 회화로 가득 장식하였는데, 본생도와 불전도, 설화도 외에 존상도(尊像圖)가 증가한 것이 특징이다.

2기굴 가운데 가장 벽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은 1굴과 2굴, 16굴, 17굴 등이다. 이들 굴에는 정면랑, 네 면의 회랑, 각 벽면 및 각 부의의 천장, 기둥 등에 설화도, 불상도, 존상화 및 장식화 등이 장식되었다. 인도 불교미술의 황금기인 굽타시대의 양식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벽화들이 석굴을 가득 메우고 있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1굴은 6세기 전반에 조영되었으며, 다양한 본생도가 석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냥꾼에 ◎⃝기는 불쌍한 비둘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잘라 준 시비왕의 이야기,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수많은 고생 끝에 공주와 결혼하여 다시 왕위를 되찾았다는 마하자나카본생이 화려한 왕궁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저 멀리 아프가니스탄에서 생산되는 라피스 라즐리의 푸른색이 어두운 벽화를 환히 빛나게 한다. 

2굴은 네 굴 중에서 제작연대가 가장 늦은 6세기 중엽 경에 조영되었다. 최근까지 석굴 안에 은자(隱者)들이 살고 있어서 연기와 불로 인한 벽화의 손상이 크다. 벽은 물론 천장에도 벽화들이 가득하고 기둥은 세밀한 조각들로 빈틈없는데, 본생도 뿐 아니라 마야부인의 태몽이야기, 싯달타의 탄생이야기, 사위성 신변이야기 등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그림도 눈길을 끈다. 

16굴에도 흥미로운 벽화들이 가득하다. 기원정사에 머물고 계시던 부처님이 도리천에 환생한 어머니를 위해 그곳에서 3개월 동안 설법하고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이야기, 부처님의 사촌동생인 난다(Nanda)의 출가이야기 등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출가 후에도 아내를 잊지 못해 틈만 나면 카필라바스투성으로 돌아가 아내를 만날 생각만을 했다는 난다의 옆에는 아름다운 아내 자나빠다깔랴니(손다리)가 슬픈 모습으로 남편을 바라보고 있다. 출가한 남편을 둔 아내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16굴 바로 옆에 위치한 17굴은 5세기말경에 조영된 석굴로, 아잔타에서 가장 벽화를 풍부한 곳 중 하나이다. 석굴 입구에는 비슈반다라(Visvantara)본생을 비롯하여 취상조복, 과거7불과 미륵보살, 오취생사륜도(五趣生死輪圖) 등이 가득 그려져 있으며, 석굴 안에도 육아백상본생도, 사위성대신변, 시비왕본생 등 본생도와 불전도가 가득 그려져 있어 그야말로 아잔타벽화의 진수라고 부를 만하다.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한 비슈반다라태자가 나라의 보물인 코끼리를 보시하여 산으로 쫓겨 가 그곳에서 아이들과 부인마저 주는 보시를 실천하였다는 이야기는 석굴로 들어가는 입구 벽에 그려져 있다. 

아잔타 석굴 17굴 정면랑 비슈반다라 본생도.

구걸하는 걸인들과 아낌없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주는 태자의 모습에서 초기 불교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술 취한 날라기리코끼리가 석가모니를 해치려 한 이야기를 그린 취상조복은 날라기리가 난폭하게 부터님을 향해 돌진하던 부처님을 향해 달려들자 오른손으로 변화를 일으켜 다섯 마리의 사자를 만들고 날라기리가 뜨거운 곳을 피해 부처님이 머무는 서늘하고 시원한 곳으로 다가오자 인자한 손으로 날라기리를 쓰다듬으며 두려움을 없애주었다는 모습이 연속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치 슬로우 모션을 보는 듯하다. 

아잔타 석굴의 본생도는 <본생경>과 <본생만경>, <육도집경>, <현우경> 등에 의거하여 그려졌다. 현재 확인 가능한 본생도 만도 25종에 달한다. 아잔타석굴을 만든 이들은 왜 어두컴컴한 석굴 안에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를 그렸을까. 부처님의 본생이야기, 그것은 단순히 부처님 전생의 한 사건이 아니라 그림으로 표현된 불교,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불교신문3460호/2019년1월30일자] 

김정희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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