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오를 길이라도 있는 듯 기어오른 극락암
팔월 땡볕엔 부처도 없고 스님도 없고
방금 세상 한 바퀴 돌고 온 듯 고무신 한 켤레
섬돌 위에 하얗게 낮달로 떠 있다

심심한 절 마당에 졸고 있는 배롱나무 꽃그늘에
혼자 읽는 경전이 재미없던 말매미
슬쩍 옷가지 벗어 두고 어디 갔을까

-전인식 시 ‘극락암’에서


불볕더위가 쏟아지는 한낮에 시인은 극락암에 오른다. 절은 텅 빈 듯하다. 다만 섬돌 위에 흰 고무신 한 켤레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하늘에는 깨끗한 낮달이 떠 있을 뿐이다. 시인은 그 검소하고 정갈한 한 켤레의, 아마도 스님의 것일 고무신을 본다. 

흰 고무신에서 부처와 스님과 낮달의 맑음과 청빈한 정신을 본다. 절 마당은 졸고 있는 듯 조용하고, 배롱나무 꽃그늘 속에서 울던 말매미는 울음을 뚝 그치고 어딘가로 가고 없다. 말매미가 벗어 놓은 허물만 남아 있다. 고요가 깊디깊은 절의 풍경이다.

[불교신문3459호/2019년1월26일자]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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