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44> 고려 마지막 국사와 왕사
[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44> 고려 마지막 국사와 왕사
  •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19.01.25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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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 주지 하라는 공민왕의 청 거절하고…”

 

 보각국사 ‘환암 혼수’ 
25가지 방편…능엄경 진수 터득
조용한 수행 일관하고자 했으나 
세상이 그의 법력ㆍ위의 드러내 


 대지국사 ‘목암 찬영’
수선사 선풍 수용…보우 법 계승
공민왕·우왕·공양왕·태조도 칭송
입적 후 추대 ‘고려 마지막 국사’

충주 청룡사지에 있는 국보 197호 환암혼수의 탑과 탑비(보각국사탑).

밤하늘에 달이 있고, 그 주위로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린다. 한 개의 달만으로는 밤하늘의 우주를 아름답게 하지 못한다. 달 주위에 수백, 수천 개의 별들이 서로 서로 비추면서 반짝거리기 때문에 밤하늘이 아름다운 법이다. 

별이 각자의 위치에서 반짝거리는 것처럼 한국불교 역사 이래 근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승려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으로 살다갔기 때문에 한국불교는 살아 있는 것이다. 환암 혼수와 목암 찬영 두 스님도 그러하다. 

‘국사’ 두 차례 반납, 환암 혼수

환암 혼수(幻菴混修, 1320~1392년)는 나옹혜근이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할 때, 유일하게 법기로서 인정을 받은 인물이다. 휘는 혼수(混修), 자는 무작(無作), 시호는 환암(幻菴)이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가 잦았다. 출가하면 무병장수하고 큰스님이 될 거라는 주위의 말에 부모는 환암을 절에 보내려고 했다. 12세 이후 계송(繼松)스님을 따라 출가했는데, 정확한 나이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후 스승 계송스님을 따라 불교 경전부터 유학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공부, 22세에 선시(禪試)에 응시해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했다. 

환암은 29세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행에 전념했다. 대략 2년이 흐른 31세에 모친이 병환으로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이 있는 경북 성주로 내려가 그곳에서 5~6년을 지냈다. 모친이 별세하자, 환암은 <법화경>을 독송하고 사경하며 모친에게 효도를 다했다. 일반적으로 승려들은 출가하면 부모 인연을 끊는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중국의 도륜(度輪, 1918˜1995년)은 15세에 출가해 18세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염불하며 시묘살이를 했다. 이 스님이 위앙종의 제9대요, 선화(宣化) 상인이다. 또한 본환(本煥, 1907˜2012년)도 모친이 위독하자 병간호를 하고,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소지공양을 했다. 고려의 일연, 조선의 진묵스님도 효자로 이름나 있다. 

탑이 함께 있었으나 유실돼 비석만 남아 있다.

환암은 강화도 선원사의 식영연감을 찾아갔다. 환암은 식영연감 문하에 머물며 <능엄경>의 25가지 방편수행을 수학하여 그 진수를 터득했다. 환암은 식영연감에게서 감화를 받고 그의 법제자가 됐다. 환암에게 영향을 끼친 스승 계송과 식영연감은 모두 몽산 덕이의 선(禪)을 수용한 이들이어서 환암도 몽산의 선풍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환암은 태고 보우의 제자가 됐다. 이후 환암은 휴휴암(休休庵)에서 사부대중을 위해 <능엄경>을 강의하고, 이곳에서 3년을 주석한 후 충주 청룡사(靑龍寺) 연회암(宴晦庵)으로 옮겼다. 

환암은 양주 회암사 주지를 맡아달라는 공민왕의 청을 거절하고, 금오산과 오대산에 주석했다. 또한 궁에서 설법해달라는 청도 거절하고, 산속에 은거했다. 50세 무렵에는 안성 서운사(瑞雲寺)에 주석하면서 가람을 크게 일으키고 선법을 진작시켰다. 

1371년 회암사에서 공민왕의 명으로 공부선장(功夫選場)이 실시되어 선교양종(禪敎兩宗)의 고승들이 참여했는데 환암도 이 선장에 동참했다. 감독관 나옹혜근이 일착어(一著語)를 던졌는데 환암만이 당문구(當門句)·입문구(入門句)·문내구(門內句) 삼구(三句) 법문에 대답했다. 

이후 환암은 근방의 위봉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54세에는 내불당(內佛堂)을 맡아달라는 왕명을 피해 영덕의 평해에 은둔했다가 다음 해에 내불당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왕과 그 권속들을 위해 널리 법문을 펼쳤다. 같은 해 공민왕이 승하하고 우왕이 즉위하면서 환암은 왕에게 ‘광통무애원묘대지보제선사(廣通無碍圓妙大智普濟禪師)’라는 법호를 받았다. 1383년 64세에는 ‘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오불심종흥자운비복국리생묘화무궁도대선사정편지웅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知雄尊者)’ 칭호를 받으며, 국사로 책봉됐다. 

65세에 충주 개천사에 주석했는데, 도적들이 빈번히 출현해 광암사로 옮겨갔다. 다음 해에 이곳에서 능엄법회를 개설하여 50일 동안 천재지변이 없도록 기원하는 법회를 열며 유학자들과 승려들에게 법을 설했다. 67세에 대비의 요청으로 개성 보국사에서 선왕(先王, 공민왕)을 위한 능엄법회를 개최하고, 69세에 충주 개천사로 돌아갔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선사는 국사를 반납했으나 재차 국사에 책봉됐다. 73세에 조선이 건국됐는데, 환암은 다시 국사직을 반납하고 청룡사로 옮겨가 그곳에서 주석하다 조용히 앉은 채로 입적했다. 조선의 태조는 선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시호를 보각(普覺), 탑호를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고 했다. 그해 12월에 청룡사 북쪽 봉우리에 부도탑을 세우고 유골을 봉안했다. 환암의 비문은 선사가 입적한지 2년 만인 1394년에 청룡사에 건립됐다. 비문은 고려 말부터 문장가로 이름이 높은 권근(權近, 1352~1409년)이 태조의 명을 받아 지었다. 

지난해 더운 여름 충주시 소태면 청계산에 올랐다. 청계산 입구에 들어서면 그 옛날 큰 도량이었을 청룡사지가 눈에 들어온다. 몇 기의 승탑이 있고, 가장 윗부분에 환암의 탑과 탑비, 석등까지 온전한 모습을 띠고 있다. 환암의 탑은 국보답게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어떻게 돌로 저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환암의 행적과 사상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조선중기, 청허 휴정의 문도에 의해 법맥이 정리될 때, 환암의 위상이 정립되면서 보우의 법맥을 받은 인물로 되었다. 다시 환암의 법은 구곡각운(龜谷覺雲)에게 전해지는 것으로 되었다. 이런 계맥이 훗날 정설로 굳혀져 오늘날까지 수용되고 있다. 

둘째는 고려 중기 이자현 거사도 <능엄경>의 능엄선을 중시했듯이 선사도 <능엄경>을 소의경전으로 삼았다. 셋째는 환암은 명예를 탐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조용한 수행으로 일관하고자 했으나 그의 법력과 위의를 세상은 가만두지 않았다. 송곳이 날카로움을 감추고자 하나 언젠가는 밖으로 튀어나오는 법이라고 했던가. 

멀리 논밭 가운데 충주 억정사 목암찬영의 비각(대지국사비각)이 보인다.

‘벽안 달마’ 목암 찬영

목암 찬영(木庵粲英, 1328˜1390년)은 양주 출신으로 성이 한씨(韓氏), 자가 고저(古樗), 호가 목암(木庵)이다. 14세에 삼각산 중흥사로 출가해 태고보우의 제자가 되어 그곳에서 5년간 머물렀다. 

이후 수선사 14세인 정혜국사의 가르침을 받고, 가지산 총림의 제2 수좌(首座)가 됐다. 또한 금강산 유점사의 수자(守慈) 화상의 지도로 참선했으나 보우의 법을 받는다. 1350년 24세에 구산선과(九山禪科)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 3년 후에는 공부선(功夫選)에서 다시 장원으로 합격했다.

찬영은 젊은 나이에 대흥사 주지로 임명됐으나 공부에 뜻을 두어 양주 소설산과 삼각산에서 정진했다. 1359년 공민왕은 선사를 ‘벽안(碧眼) 달마’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해 “승록사(僧錄司)의 일이 매우 중대하므로 보통 승려에게는 맡길 수 없다”며 31세의 찬영에게 양가도승록대사(兩街都僧錄大師)로 임명했다. 하지만 찬영은 몇 년 후 이 직책을 사양하고, 석남사 월남사 신광사 운문사 등지에 머물며 정진했다. 
 1372년, 찬영은 공민왕으로부터 ‘정지원명무애국일선사(淨智圓明無碍國一禪師)’ 호를 받았다. 몇 년 후 우왕이 찬영을 부르자, 병을 핑계로 보개산(寶蓋山)에 운둔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왕이 다시 불러 ‘선교도총섭정지원명묘변무애국일도대선사(禪敎都摠攝淨智圓明妙辯無碍國一都大禪師)’ 호를 내린 뒤에 가지사에 머물도록 했다. 44세에 ‘선사’, 49세에 ‘대선사’ 품계를 받았다. 
 찬영은 1382년 54세에다시 청량산으로 들어갔으나, 그 이듬해 우왕이 찬영을 ‘왕사’로 봉하고(이때 환암혼수는 국사로 책봉), 충주 억정사에 머물도록 했다. 찬영은 1384년 스승인 보우의 비를 삼각산 중흥사에 세우고, 왕명에 따라 광명사로 옮겼다. 1388년 창왕이 즉위해 선사를 다시 왕사로 봉했으나 선사는 사임했다. 그 이듬해 공양왕이 즉위해 선사를 왕사로 모시고자 했으나 충주 억정사에서 제자들을 지도하며 두문불출했다. 1390년 62세에 선사는 열반당으로 들어가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 공양왕은 시호 ‘지감국사(智鑑國師)’, 탑호 ‘혜월원명(慧月圓明)’을 내렸다. 조선이 들어서고 그 이듬해 태조는 다시 시호는 ‘대지국사(大智國師)’ 지감원명(智鑑圓明)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찬영의 탑과 탑비가 충주 억정사에 있었으나 현재는 탑비만 전한다. 억정사지는 충주 엄정면 괴동리 마을인데, 사찰 터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언덕배기 위에 밭으로 둘러싸인 속에 비각만이 우뚝 서 있다. 
 찬영에게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점은 두 가지다. 첫째, 수선사의 선풍을 수용한 뒤에 보우의 법을 받은 점이다. 둘째, 공민왕·우왕·공양왕·태조 등 역대 왕들로부터 존숭 받은 인물로서 입적 후에 국사로 추대된 고려의 마지막 국사이다. 셋째, 그의 높은 명예에도 불구하고 정치승려가 아닌 올곧은 선지식으로 남아있다. 

[불교신문3459호/2019년1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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