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동안 한복 만들던 언니 
비단을 만지던 그 손은 이제
연필과 컴퓨터를 움직인다…

예습은 물론이고 수업 내용을 
동영상으로 찍어 와 복습한다 

예순여덟, 꿈 버리지 않고 
언젠가 꼭 이루겠다는 마음을 
묻어두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영어시간에 라이거(liger)를 배웠어. 수사자와 암호랑이가 만나 태어난 새끼야.” “아, 그래요? 이름이 라이거구나!” 언니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가방을 열어 그날 공부한 내용을 하나하나 꺼내 선생님처럼 나를 가르치며 복습한다. 영어 단어, 수학 공식, 맞춤법 등 두 귀로 들어왔다가 대부분 나가버린다지만, 남아있는 몇 가지 자료로 한 옥타브 올려 강의를 한다. 

“이렇게 열심인데 영어 노래는 외워지지 않아. 1년이 지나가는데 제대로 아는 곡이 없네”라고 말하며 아이처럼 웃는다. 자꾸 잊어버려도 영어노래를 배우고 또 배울 것이란다. 그 장단에 맞추다 어느새 나도 학생으로 돌아가 공연히 들뜬다. 

언니는 예순여덟, 중학교 2학년이다. 진형중고등학교 특성상 2년 동안 3학년 과정을 학습하기 때문에 작년 3월에 입학했지만, 2학년 과정을 배우고 있다. 노트마다 연필로 또박또박 쓴 1년 기록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42년 동안 한복을 지으며 생활하던 언니. 이제 비단을 만지던 손은 연필과 컴퓨터를 움직인다. 중학교 공부를 시작하자 앎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던 언니는 눈빛이 달라졌다. 예습은 물론이고 수업 내용을 동영상으로 찍어 와서 복습한다. 공부하고 싶은 꿈을 버리지 않고, 언젠가 꼭 그 꿈을 꺼내어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묻어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언니가 다니는 학교는 서울 도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부분 늦공부를 하는 사람을 위한 교육기관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10대에 끊어졌던 학업을 다시 이어주는 곳이다. 현재 일반 중고등학교 학생들과 똑같은 의무교육 과정을 밟는다. 다소 높은 연령대에 맞게 라인댄스, 장구, 민요 등을 배우며 앎의 즐거움을 누리는 곳이기도 하다. 요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컴퓨터,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학습한다. 억지로 떠밀려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강한 배움의 열망으로 그 시간을 채우기 때문에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며 학교에 다닌다. 또, 새로운 시대에 맞는 공부를 함으로써 지금 시대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자신감과 자존감은 누구 못지않게 충만하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음을 우리는 체험으로 잘 알고 있다. ‘때’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일을 하는 데 알맞은 기회나 시기’라고 되어있다. 이를 정해진 약속이나 규칙처럼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때는 자신이 정하고 실행해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배움의 길은 중등교육기관, 대학·대학원 과정을 다양하게 설립, 운영하고 있어서 필요한 시기에 언제라도 해도 된다는 생각에 이른다. 물론 제도권 하에서 차곡차곡 계단을 오르듯 단계별로 밟아나가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살다보면 곧은길로만 갈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길은 구부러져 있다고 하지 않는가. 삶의 길도 구부러지고 때로는 돌아가기도 하며 목적지에 다다르게 된다.

저만치 눈빛을 반짝거리며 춤을 추듯 가볍게 오는 발걸음. 누구와 대화를 하더라도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하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 짧은 겨울방학을 맞아 가을에 거둔 땅콩을 손질하는 언니는 밀린 살림을 하느라 바쁘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한 권밖에 못 읽었다는 목소리에도 생기가 넘친다. 나는 박완서의 <노란집>을 읽고 있는데 우연일까? 

[불교신문3458호/2019년1월23일자]

김양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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