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가운데 화두 놓지 않아야 신령스러운 일”

 

사교입선 임제종풍 간화선 강조
무학 환암 등 수선사 제자 유명

양주 회암사 ‘삼산양수처’ 삼아 
도량 정비…낙성회 베풀며 중수

공민왕대~조선초 불교계 주도 
지공-혜근-무학 지칭 ‘삼화상’
불교의식 ‘증명법사’로 이어져  

나옹혜근은 만년에 양주 회암사를 ‘삼산양수처’로 삼아 도량을 정비하고 낙성회를 베푸는 등 사찰 중수에도 족적을 남겼다. 그래서 회암사에는 그에게 유골을 전한 지공화상 그리고 후에 왕사로 추대된 제자 무학의 부도 등이 함께 전한다. 지공화상 부도비와 부도탑 ,

1358년 39세의 혜근은 10년 만에 고려에 귀국했다. 혜근은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신해 있다가 공민왕의 청으로 해주 신광사(神光寺)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지도했다. 그 해 홍건적이 침입해 사람들이 모두 남쪽으로 피난을 갔으나 스님만은 대중을 안심시키고 평상시와 똑같이 법을 설하고 정진했다. 하루는 홍건적 수십 명이 절에 들어왔으나 너무나 태연자약한 스님 모습에 감화돼 법당에 향을 사르고 스님에게 절을 하고 물러갔다. 스님아 계속해서 절을 떠나지 않으니 이후 홍건적이 와도 사람과 물건을 해치지 않았다. 

혜근은 신광사를 떠나 여러 곳을 순례하다가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머물렀을 무렵 지공의 유골을 받았다. 51세가 된 1370년에는 왕이 불러 광명사에서 5교양종(五敎兩宗)의 납자들을 시험케 했는데, 이를 공부선(功夫選)이라고 한다. 

혜근은 공부선의 주맹(主盟)이 되어 법좌(法座)에 올라 선사상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하면 승려들의 공부를 높일 수 있을 것인지 고민했다. 이때 혜근이 지은 것이 공부십절목(工夫十節目)이며 이 무렵 공민왕으로부터 왕사 책봉을 받았다. 

이후 혜근은 수선사(송광사)에 머물렀다. 1371년부터 1373년까지 2년 동안 수선사의 사주를 역임했으며, 이어서 제자인 무학 자초(1373˜1375년 역임)와 환암 혼수(1375˜1376년 역임)가 수선사의 사주를 역임했다. 만년에 혜근은 지공이 말했던 ‘삼산양수처’로 회암사를 생각하고, 그곳에 머물며 도량을 정비하고 낙성회를 베푸는 등 회암사를 중수했다. 

신륵사에서 걸음을 멈추다 

나옹혜근의 부도 및 석등.

56세 때 회암사에 머물고 있던 혜근을 중신들이 모략하여 ‘경사 근처에 머물지 말고, 밀양 영원사(瑩原寺)로 옮겨가라’고 우왕에게 왕명을 내리게 했다. <고려사>에 ‘지공선사와 나옹(혜근)스님이 법회를 열면, 고려 귀족들과 사대부들 수천 명이 운집하여 성황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아마도 혜근이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혜근은 어쩔 수 없이 회암사를 나와 영원사로 옮겨가다가 병이 깊어 신륵사에서 멈췄다. 결국 혜근은 신륵사에서 임종을 하게 된다.

입적 전에 한 제자가 물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사가 주먹을 세웠다. 제자가 다시 물었다. “4대(四大)가 흩어지면 어디로 갑니까?” “(스님은 주먹을 맞대어 가슴에 대고) 오직 이 속에 있다.” “그 속에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별로 대단한 것이 없느니라.” “노승은 오늘 그대들을 위해 열반 불사를 지어 마치리라.”

저서로는 <나옹화상어록> 1권과 <가송> 1권이 전한다. 혜근의 법랍 38년, 나이 57세였다. 혜근이 입적한 후 법신에서 무수한 사리가 나왔다. 입적 후 ‘나옹현창’ 운동이 전개됐다. 혜근의 사리탑이 각지에 건립되고, 그를 생불(生佛)로 숭앙하거나 석가의 후신으로 알려졌다. 혜근은 국외에도 알려져 조선 태종 때, 일본 승려가 대장경 인본과 혜근의 초상화를 구하고자 요청한 일이 실록에 전한다. 또한 세종 초에는 묘향산의 적휴(寂休)라는 승려가 중국으로 입국하면서 나옹의 사리를 가지고 간 사건도 있었다.

혜근에게 법을 받은 이는 42명 정도라고 하는데, 이 숫자보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다. 대표되는 제자가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 정지 지천(正智智泉), 고봉 법장(高峰法藏), 죽간 굉연(竹磵宏演), 절간 익륜(節磵益倫), 고암 일승(皐菴日昇) 등이다. 익륜과 일승은 회암사의 주지를 역임했다. 

선사상 그리고 그의 화두 

무학대사 탑.

혜근은 첫째, 사교입선(捨敎入禪)적인 임제종풍의 ‘간화선’을 강조했다. 혜근은 그의 어록에서 임제종에 대해 “삼현삼구(三玄三句), 사료간(四料簡), 사빈주(四賓主) 등 할방(喝棒)은 임제종의 의지(意旨)일 수 없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역력고명(歷歷孤明)함이 자기에게 현전할 수 있는 그 본연의 세계를 얻는 것이 정종(正宗)”이라고 했다. 혜근이 중시한 화두는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무자구불성(無字狗佛性), 시심마(是什) 등인데, 혜근은 이 가운데 ‘시심마’를 매우 중시했다. 

다음은 혜근의 간화선 사상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혜근이 각오선인에게 보인 내용으로 <몽산법어>에 수록되어 있다.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생사(生死)라고 하니, 생사가 일어나는 즈음에 힘껏 화두를 들어야 한다. 화두가 순일하면, 한 생각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어진다.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곳을 ‘고요함(寂)’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요한 경계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가 되니, 고요한 가운데서 화두를 놓치지 않아야 신령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무너짐도 없고 섞임도 없으니, 이처럼만 공부하면 반드시 성취한다.” 

둘째, ‘공부십절목’을 통해 수행자의 정진 단계를 점검하여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는 공부선을 주관하면서 수행자의 수행 정도를 시험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셋째, 염불 정토에 자력적인 측면과 타력적인 염불문, 두 가지를 모두 수용했다. 즉 유심정토(唯心淨土) 자성미타(自性彌陀)와 칭명(稱名) 염불과 관상(觀象) 염불 등 타력 염불도 강조했다. 

지공-혜근-무학의 관계 

나옹혜근 선사가 만년에 머물렀던 양주 회암사지. 경내에 들어서면 제일 하단에서 무학대사 탑과 탑비, 중간에 지공화상 탑, 가장 윗부분에서 나옹스님의 탑을 참배할 수 있다.

혜근이 50세 무렵 회암사에 머물고 있을 때 원나라의 사신이 지공의 유골을 모시고 왔다. 혜근은 회암사 경내에 탑을 안치하고 지공의 유골을 봉안했다. 혜근은 평산 처림과 지공, 두 선사로부터 법맥을 모두 받았다. 유학자 이색(1328˜1396년)이 기술한 혜근의 탑명 및 문인(門人) 학굉(學宏)이 쓴 행장에도 혜근이 지공과 평산 처림에게 법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혜근은 처림보다는 지공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지공과 7회에 걸쳐 게송을 주고받은 행장이 전해오고, 그의 문집에도 지공을 추모하는 내용이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다. 

무학대사는 조선 왕조 창업을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이다. 무학은 지공 문하에서 스승 혜근과 함께 수학했었다. 무학은 귀국 후에 신광사에서 혜근을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주위 제자들이 무학을 시기해 무학은 스스로 혜근을 하직하고, 고달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혜근이 회암사에서 낙성식을 할 때, 무학을 불러 의발을 전하고자 했으나 무학은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이후 혜근의 의발이 무학에게 전해졌다)

한편 무학은 왕실에서 국사로 모시고자 해도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는데, 조선이 세워진 해 1392년 66세에 왕사로 책봉됐다. 이후 무학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무학에게서 제자 함허 득통(涵虛得通, 1376〜1433년)이 배출됐다. 무학은 이후 회암사에 머물렀는데, 조선 태조는 회암사를 ‘작법(作法)’의 절로, 진관사를 ‘수륙재’의 절로 지정하고 노비와 재정을 지원했다. 지공, 혜근, 무학, 3대 스님을 ‘삼화상’이라고 하여 공민왕대 이후 조선시대 초기까지 불교계를 주도했다. 

삼화상은 조선 후기 불교의식집인 <선문조사예참문(禪門祖師禮懺文)>, <범음집(梵音集)> 등에도 추대되었으며, 근자에 이르러서도 불교의식에 증명법사로 삼화상이 모셔지고 있다. 

 불교사적 위상 

혜근이 살던 시대는 불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피폐된 상황이었다. 첫째, 혜근은 불교적으로 쇠락해 가는 선풍을 새롭게 진작시키며, 불교계의 통합과 정화를 위해 노력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혜근은 나말여초 9산선문과는 다른 임제의 선풍을 펼침으로써 조선불교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는다. 둘째, 사회적으로 중생들과 불자들의 권익을 위해 보살행을 실천했지만 권문세족의 체제 등으로 혜근의 법력과 영향이 사회 전반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혜근의 사회참여와 보살 정신은 불교사에 위대한 행적으로 남아 있다. 

[불교신문3457호/2019년1월19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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