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입으로만 불교 입으로만 신심 외치나”

 

운허스님과 동국역경원 전신 
법보원 설립…역경사업 헌신
출재가 종단운영기획위 구성

선학원이사장·총무원장 비롯
중앙승가대 초대학장 등 역임

포교·교육·행정·역경·복지 …
사회·교단이 바라는 선구자
근대 한국불교 상징 ‘보현행’

석주스님은 종단의 주요 소임을 두루 역임하면서도 맡은 일을 다 하고나면 미련 없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보현행을 하는 근현대불교사에 존경받는 수행자였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석주당(昔珠堂) 정일(正一, 1909~2004) 대종사는 평생 올곧은 수행자로 살면서 인재양성(승려 자질향상)과 역경·포교에 온 힘을 다했다. 종단의 주요 소임을 두루 역임하면서도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당신이 맡은 일을 다 하고나면 미련 없이 수행자 본연의 자리로 돌아갔다. 종단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종도들은 스님에게 중책을 맡겼고 스님은 이를 받아들여 묵묵히 할 일을 원만히 처리했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성정(性情)에 너른 포용력으로 사부대중을 보듬고 감싸 안았다. 깊은 수행력에다 막힘없는 행정력으로 종단과 종도들을 이끌었다. 

“모름지기 부처님 제자들은 부처님 잘 믿고 부처님 가르침대로만 실천하면 만사가 좋은 것입니다.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하지 않습니까. 좋은 교훈이 없어서 세상살이가 괴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수승한 교훈입니다만 불자들이 입으로만 불교를 말하고 입으로만 신심을 외치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혼란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지요. 불교는 실천의 종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작은 일이라도 몸소 실천을 해야 성불(成佛)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들이 모이면 이 땅은 자연히 불국정토가 되는 거예요. 불자 여러분들도 항상 스스로를 다스리고 자기 안의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늘 마음속에 원(願)을 세우며 살아가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출가결행 경구

석주스님은 1909년 3월4일 경북 안동군 북후면 옹천마을에서 강대업 옹과 유정각화 보살을 부모로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9세 때부터 고향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논어> 술이편(述而篇)에 ‘공자 왈(曰), 조이불강(釣而不綱)하고 익불사숙(不射宿)하라’. 즉 낚시질은 하되 그물은 치지 말 것이며 활로 새를 잡되 잠을 자고 있을 때는 쏘지 말라는 구절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었다. 또 인(仁)을 주장하는 공자의 측은지심에 관하여 의문을 품던 중 불경(佛經) <법망경>을 보다가 ‘일체유명자(一切有命者)를 부득고살(不得故殺)하며 부득축살중생구(不得蓄殺衆生具)하라’. 생명 있는 온갖 것을 짐짓 죽이지 말지니라, 죽이는 기구를 마련하여 두지 말라는 계목에 이르러 무차평등(無遮平等)하고 무연대비(無緣大悲)한 불교사상에 감동을 받고 출가를 결행했다.

1923년(15세) 서울 선학원에서 남전스님을 은사로 정하고 6년간 행자생활 끝에 1928년 부산 범어사에서 스님이 되었다. 1933년 범어사 강원(승가대학) 대교과를 마친 스님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오대산 상원사, 금강산 마하연사, 덕숭산 정혜사, 묘항산 보현사 등에서 효봉·해산·해안스님 등과 함께 참선정진에 몰두했다.

1940년 부산 온천동 금정선원장에 취임, 1945년 3월15일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혜일 율사로부터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1946년 민족불교진흥을 위해 경봉, 동산, 금오, 청담, 대의, 용담, 석기스님등과 불교혁신연맹을 조직, 왜색불교혁신운동에 앞장섰다. 1951년 김해 은하사 주지, 그 해 10월 효봉 경봉 동산 금오 청담 자운스님 등과 함께 선학원에서 한국불교 교단정화운동을 촉구하는 결의를 다져 정화의 당간을 더욱 높이 세웠다. 1954년 5월 대의, 정영스님, 이종익 이재열 등과 함께 조계종 종조인 종래의 태고 보우스님을 보조 지눌스님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태고화상을 종조로 하는 왜색대처(帶妻)세력과의 결별을 위한 입장이었다. 

1958년 불국사 주지, 1959년 범어사에서 대덕법계 품수. 1960년 교단 정화불사로 비구·대처승간에 분쟁이 격화되자 5월20일 조계종 제16회 임시중앙종회에서 비상사태수습대책위원에 선출됐다. 1961년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 역임. 운허스님 등과 함께 현 동국역경원 전신인 법보원을 설립하여 불경 역경사업에 헌신했다. <열반경> <법화경> <유마경> <육조단경> <현우경> <선가귀감> <부모은중경> <목련경> <우란분경> 등의 한글 번역사업을 시작한 것이 1964년에 설립된 동국대 부설 역경원 사업의 기조가 되었다. 

1963~1966년 출가 스님과 재가 신도들의 종단운영을 위한 기획위원회를 청담·석호(서옹)·운허·경산스님 등과 함께 구성했다. 

1969년 사회사업후원회 발족, 동국역경원 부원장, 봉은사 주지, 1970년 대한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총재. 1971년 조계종 제8대 총무원장. 1976년 은해사 주지. 1977년 초대 포교원장. 1978년 제15대 총무원장, 원로회의 부의장 1980년 중앙승가대 초대학장. 1983년 6월 비상종단수습대책위원장에 피선, 1984년 제23대 총무원장, 1985년 제주 관음사 주지, 1988년 중앙승가대 명예학장, 1989년 재단법인 동국역경사업후원회 이사장. 1991년 조계종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에 추대되었으며 1994년 조계종 개혁위원회 의장에 추대되었다. 

1995년 스님은 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역경사업후원회 회장을 맡아 역경 원력을 놓지 않았다. 그러는 한편 종단의 취약한 노인복지사업을 진흥시키는 일에 진력했다. 구순을 바라보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충남 아산시 염치읍 송곡리 금병산 보문사 경내지에 노인불자를 위한 불교사회복지시설 안양원을 건립, 종단의 복지사업에 일조했다. 

2004년 조계종 명예원로로 추대되었다. 아산 보문사 불교사회복지관장, 서울 칠보사와 봉은사 조실. 2004년 11월11일(음력10월3일) 오후 6시 보문사 염화실에서 입적했다. 법랍 82세, 세수 96세. 입적 3일전 스님은 봉은사 누각에서 주련 글씨를 쓰다가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시 한수를 읊었다.

“96세의 무상한 세월 되돌아보니, 마치 장자의 아들이 구걸함과 같았네. 보배를 지니고도 품팔이 하였으나, 지금과 옛 모습 조금도 다름이 없네(回顧九十六年事 猶如懷珠傭作擔 一朝知得衣中寶 本地風光古如今).” 사부대중은 이를 보고 스님의 임종게라 했다. 스님의 장례는 11월18일 부산 범어사에서 거행됐다. 범어사에서 다비 후 오색이 영롱한 수많은 사리가 출현했으나 당신의 유언에 따라 공개하지 않고 사리탑에 봉안했다. 

스님은 선교(禪敎)에 두루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선서예(禪書藝)에도 빼어났다. 불사(佛事)에 필요하다면 사부대중 누구에게나 휘호를 흔연히 내주었다. 스님의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원행(願行)은 근대 한국불교를 상징하는 보현행이었다. 

포교·교육·행정·역경·사회복지 등 우리 사회와 교단이 요청하는 모든 분야에 선구자였다. 스님이 창건한 아산 보문사(주지 송운스님)에는 석주당 정일대종사 사리탑과 탑비가 있다. 비문은 전 총무원장 지관스님이 썼다. 또한 어린이를 사랑한 스님을 기리는 비 ‘어린이 사랑 석주큰스님 추모비’가 있다. 2008년 10월3일 한국불교아동문학회에서 세웠다. 

 문집 법어집

‘크신 원력 수미산 넘어’

‘그리운 석주 큰스님’ …

스님 생전 석주 큰스님 94회 탄신문집 <크신 원력 수미산을 넘어>가 나왔다(2002년). 이 책에는 석주스님을 기리는 스님과 재가불자들의 글을 담고 있다. 스님 열반 후 석주 큰스님 탄신 100주년기념문집 <그리운 석주큰스님>을 한국불교선리연구원에서 펴냈다(2009년). 

이 책은 회고 및 추모편에 월운 청화 혜총 현해 암도 인환스님의 글을 실었다. 법문 및 대담 편에는 열반송, 법문, 대담, 기고, 비문 그리고 석주스님의 스승이 스님에게 보낸 편지를 실었다. 논문편에는 법진스님, 홍윤식, 송운스님, 김선근, 고명석의 글을 실었고 석주스님의 행장과 사진자료도 함께 수록했다.

2014년 석주문도회에서는 석주대종사 법어집을 펴냈다. “불교가 중흥해야 한국이 잘 산다”고 누누이 일러주신 석주 큰스님. ‘大雄殿(대웅전)’을 ‘큰법당’이라고 우리말로 손수 써서 칠보사와 보문사에 내건 스님. 절집의 주련도 한글로 써서 선구자의 모습을 보인 스님. 나라사랑과 우리말 사랑에 극진함을 보인 어른이다. “중 벼슬 닭 벼슬보다 못하다”며 후학을 경책한 스님의 말씀은 큰 울림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다가온다. 

“둥글고 가득 찬 지혜의 해/ 온갖 것 두루두루 비치며/ 캄캄한 번뇌 없애버리고/ 모든 중생들 안락케 하는/ 여래의 한량없는 그 모습/ 어쩌다 이 세상 오시나니”(보문사 큰법당 주련) 

“바다 속 한 떨기 홍련/ 파도따라 신통 보여/ 어제 보타 관자재가/ 오늘 도량 오시어라/ 한결같은 큰 자비로/ 설흔두(서른둘) 몸 나투시네.”(보문사 관음전 주련 글) 

“지장보살 위신력을 내가 살피니/ 항하사겁 설해도 다 할 수 없네/ 한 순간 보고듣고 예배하여도/ 인간 천상 이익이 한량없어라/ 지극한 정성 대사에 귀의하면은/ 수명 늘고 죄업은 스러지리라.”(지장전 주련 글) 

[불교신문3457호/2019년1월19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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