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 바람소리 풀벌레소리…
말벗 삼아서 흙내 맡다보면 
나의 삶이 결코 지난하지 않고 
외롭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다 

산은 아무리 오래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 
수많은 시간동안 우리와 같이 
오랜시간 지내온 세월의 깊이를 
산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아름다운 산들이 오밀조밀하게 연이어 있는데다 발길 닿는 대로 골짜기마다 전해지는 설화들이 아름아름 담겨있다. 여기에 사계절이 뚜렷하여 자연이 산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나는 이런 산에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사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굽어보기엔 이 산만큼 좋은 곳이 없다. 하지만 자연을 간직하고 있는 산은 인간들의 이기와 탐욕, 모든 시비와 차별이 끊어지고 사라진 곳이다. 그 자연을 가까이 하기엔 산만큼 좋은 곳이 없다. 지난 시절 괜한 생각도 하고, 괜한 사람도 만나고, 괜한 얘기를 많이 하고 다녔다. 이제는 이런 산중에서 자연이 주는 지복도 좀 누려가며 나를 풀어놓고 살아야겠다.

산중에서 숲속으로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 풀벌레소리가 주는 자연 앞에서 나를 돌아볼 때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내면 깊숙이 반추하여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언제까지 산과 자연이 아닌 분별로 시비에 휘말려 이러고 또 저러고 살다 말 일이겠는가. 나도 이제나마 내가 태어난 산중태생의 본향을 알고 고향과 진배없이 닮은 산속을 다시 찾았고 지금은 산이 중첩된 강원도 홍천군 깊은 산중에서 농원생활을 하고 있다. 올해 나는 산중농원에서 트랙터로 밭을 갈고 골을 만들어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비닐로 밭골을 덮었다. 그 위로 일정하게 구멍을 내어 들깨와 울금, 그리고 산마를 심었다. 열매가 많이 열게 적당히 순도 따주고 풀을 베어 밭둑을 정갈하게 했다. 

지난 가을이다. 들깨를 베고 말려서 털고 풍기에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쓸어 담아야 할 들깨는 둥근 채를 받쳐 한 번 더 걸러내니 꽤 튼실하게 여문 깨알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그 깨알들을 집어 생으로 입에 넣어 씹어보니 살짝 불에 볶은 것 마냥 아주 고소한 게 혀끝에 닿는 맛이 일품이다. 산속이다 보니 밭이나 밭둑에 농약이나 제초제 한 번 친 적이 없고 청정하게 자란 작황이 내가 봐도 품질이 우수한 특산품이다. 해거름 시간까지 일을 하다 보니 바람 한 줄기가 어느 사이 산을 텅 비우고 하늘에는 별이 친구처럼 수없이 돋아나 반짝거렸다. 

물론 이런 산중에서 산중농부로 농원을 하고 지내자면 산을 의지하고 자연을 친구삼아 살아갈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바깥세상에 비하면, 이런 여유로움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산중이 바로 별유천지와 같은 곳이다. 산중에서는 오로지 산과 더불어 자연을 벗하고 지내야 한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산의 높이가 나와 비등하여 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낼 수 있다. 흘러가는 물소리나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고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말벗 삼아 흙내를 맡다보면 나의 삶이 결코 지난하지 않고 외롭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처럼 산은 아무리 오래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수많은 시간동안 우리와 같이 오랜 시간을 지내온 세월의 깊이를 산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모태와 다름없는, 결코 허망하지 않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원형질을 산이 담고 있다. 요즘 산중에 있다 보면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한결 정겹다. 추수를 벌써 끝내고 주위에 서 있는 나무를 대하여 마주보고 있자니 겨울 풍경이 새롭게 다가왔다. 나무마저 버릴 때를 알아 그 푸르고 붉게 물든 잎들을 다 떨구어 버리고 모진 추위는 혼자서 견뎌내고 있다. 

※ 필자는 동국대를 졸업하고 지난 198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현재 ‘산중농원’ 대표를 맡고 있다. 

[불교신문3456호/2019년1월16일자] 

조철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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