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쓰는 화두 한국불교]<34>정당한 역사 평가 못받는 불교 上 실상
[함께 쓰는 화두 한국불교]<34>정당한 역사 평가 못받는 불교 上 실상
  • 박부영 기자
  • 승인 2019.01.1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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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않고, 기록 남기지 않는 불교 미래는?

기독교 천주교 싣고 불교 빠진
‘6,10 민주화 운동’ 역사 책자
임진 병자 승군, 3, 1운동 활약
불교 역사적 공헌 늘 뒷전 밀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지선스님)는 2017년 1987년 6월 항쟁 30주년을 기념하며 당시 상황을 일지식으로 정리하고 배경을 분석한 ‘6월 항쟁과 국본’을 펴냈다. 이 속에는 전체 운동권의 당시 동향을 담은 본편 외에 천주교 기독교 편이 별도로 들어갔다. 책을 기획하고 서술한 주역이 당시 기독교 천주교 실무자였다. 불교는 본편에 잠깐씩 언급됐다. 기독교 천주교가 별도 편을 차지해 상세하게 기술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를 본 지선스님이 불교 편을 별도로 서술토록 해 지난 해 별책으로 나왔다. 10,27 법난과 그 후 불교계 사회화 운동의 배경과 과정, 6월 민주항쟁 전후의 기록을 담았다. 필자가 당시 운동에 직접 관여하고 참여해 사실감이 높다.

그러나 본편이 아닌 별책이라는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 1년 전 나온 본편에 불교편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관심 갖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본편 1편에 간간히 실린 불교 이야기가 6.10 민주항쟁의 전부며 공식 기록으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1987년 6.10 민주화 운동 과정에 불교는 주류가 아니었다. 운동 전체를 주도하고 이끈 주역에 불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기독교 천주교가 주도한 것도 아니다. 1980년대 운동 주체는 학생운동과 학생운동 출신의 재야활동가들이었다. 학생운동이 역량의 대부분을 동원하고 다른 부문은 보조 역할에 그쳤다. 하지만 30년 뒤 당시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와 천주교는 주류가 되었고 불교는 빠졌다.

민주화 운동사에서 빠진 불교

역사에서 불교 활동이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는 일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다. 아주 보편적이다. 어쩌면 한 번도 예외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정부 차원의 행사와 더불어 각 분야에서 연구와 기념 사업 준비가 한창이다. 3,1 운동을 주도하고 전개한 초기 주역은 종교계 였다. 불교를 비롯 천도교 기독교가 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했다. 손병희 최린 등 천도교가 가장 많았고 기독교가 그 다음이었다. 불교는 백용성 만해 두 명이었지만 역할은 컸다. 33인 대표는 아니지만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은 불교 학림 출신 불교신자다. 만해는 공약삼장을 지었으며, 태화관에서 연설을 했다. 33인 중 많은 인사들이 변절하거나 독립운동과 관련 없는 종교 활동 만 매진할 때 용성 만해스님은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33인 대표만이 아니다. 3,1 운동 전날인 2월28일 밤 계동 만해의 집에는 신상원, 백성욱, 김상헌 정병헌 김대용, 오택원, 김봉신, 김법린, 중앙학교의 박민오 등 승려들이 모여 거사를 결행했으며, 이들은 전국의 사찰로 흩어져 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이끌었다. 전국 불교계의 총궐기를 위해 ‘전국불교독립운동 총참모본부’를 두고 향후 3.1운동을 진두지휘 하였다. <한국호국불교의 재조명7>

이처럼 불교는 3.1 운동을 처음부터 주도하고 전국적 네트워크를 조직하여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지만 현재 역사학계는 3.1운동을 기독교 주도로 보는 시각이 팽배하다. 기독교는 관련 연구도 활발하다. 지난해 5월 현 민주당 원내대표인 홍영표 의원실이 주관한 ‘3,1 독립운동 100주년 맞이 학술회의’에서는 “시위 물결이 천도교와 기독교의 국내 산하 지방 지역 조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나왔다. 천도교의 중앙과 지방조직, 기독교의 노회가 중심이 된 지방 조직이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반면 불교는 “불교는 전국적인 지방네트워크를 형성하지는 못하였지만, 3, 1운동을 지방으로 확산하는데 나름대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는 정도였다. 관련 연구를 한 학자의 주장이지만 지방 강원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위를 주도하고 수많은 스님들이 옥고를 치른 역사적 사실을 비춰볼 때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특히 이러한 주장이 여당의 중진의원실이 주관하고 정부의 공식 기구인 3,1운동100주년기년사업회가 주최한 학술회의에서 나왔다는 점이 불교계로서는 아쉽다.

기독교 중심의 3,1운동사

이는 불교계의 3, 1 운동 연구가 기독교에 비해 저조한 탓도 크다. 기독교는 민족지도자 뿐만 아니라 각 지역과 개인의 활동 까지 발굴하는 논문이 다수인 반면 불교는 만해 한용운스님 연구가 거의 대부분이다. 최근 들어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등 지방 강원 차원의 운동이나 개인의 활동을 분석한 연구가 나와 그나마 낫다. 종단에서 불교사회연구소를 만들어 의승, 3,1 운동 등 개별 학자나 동국대학에서 수행하지 못하던 역사 연구를 진행한 효과 덕분이다. 최근 주목할 만한 성과가 몇 편 나왔다. 기독교 지역 운동으로 알려졌던 철원의 애국단 연구와 불교와 관련성을 최초로 연구한 이경순 박사의 ‘철원 애국단 사건과 불교계 항일운동’, 하버드대 한국인 최초의 박사 학위 취득자가 통도사 승려였다는 황인규 교수의 ‘통도사 승려 박민오의 생애와 활동’ 등이 그 예다. 이처럼 3,1 운동이나 독립운동에서 미미한 취급을 받는 불교계 활동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불교 차원의 조명과 연구가 뒤따르지 못한 우리 내부의 안일과 태만의 결과라는 점에서 종단 차원에서 연구 인력을 확충하고 대대적 지원을 펼쳐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임시정부와 불교관련도 연구가 전무한 분야다. 임시정부에서 불교계가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나 연구들이 나와 특히 안타깝다. 1970년 3월 15일자 ‘불교신문’에 실린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는 불교가 임시정부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이지만 이에대한 종단이나 동국대 차원의 연구는 근 50년 동안 진행되지 않았다. 1919년 11월 15일자 중국 상해에서 12명의 승려 이름으로 발표된 이 독립선언서는 1969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굴해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던 임영정교수가 불교신문에 소개했다. 선언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관계 문건 중에서 발견됐는데 ‘평등과 자비는 불법의 종지이다. 일본은 겉으로는 불법을 숭상한다고 하면서 지난 세기의 유물인 침략주의·군국주의에 빠져서 명분없는 전쟁을 일으켜 인류의 평화를 교란시켰다“며 ”우리는 대한의 국민으로서 대한 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완성하기 위하여 대한불교가 일본화되는 것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 7천의 대한승려는 결속하고 일어섰으니 큰 소원을 성취하기까지 오직 전진하고 피로서 싸울 뿐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3,1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신상완, 범어사 주지 오성월, 통도사 주지 김구하 스님 등 당시 불교계 고승들이 이 선언서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이 상해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조선시대부터 현대 까지 불교가 민족사에 기여한 공은 철저하게 외면하거나 왜곡돼 왔다. 임진왜란에서 승병의 활약상을 담아 화제를 모았던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승병 활약 지운 조선 정부

시간을 거슬러 조선시대로 가도 마찬가지다. 조선에서 탄압받았던 불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일으켜 혁혁하 공을 세웠다. 서산은 칠순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승병을 일으켰으며 그 제자인 사명 영규 대사는 직접 전쟁터에서 활약했다. 기허대사는 금산 전투에서 호남으로 진군하려는 왜병을 막고 8백의 승군과 함께 전사했다. 영규대사로 인해 남해 수군은 배후 공격을 받지 않고 전력을 보전할 수 있었다. 전주 사고에 있던 조선실록이 고스란히 남아 지금까지 인류문화 유산으로 남겨진 것도 금산 전투 승리 덕분이다. 그 전공을 기려 선조 때부터 지금 까지 정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공식 명칭이 ‘조헌과 7백 의사’다. 영규대사를 뺀 800의 승군은 존재 조차 없다. 불교계에서 제기를 했지만 정부는 지금 껏 모르쇠다. 사명은 서울 수복의 결정적 계기가 되는 노원평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비공식 사절단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포로로 잡힌 조선인들을 송환 했다. 사명의 공적은 그러나 조선시대 공식 외교사로 기록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는 수승군(水僧軍)이 있었다. 그 명단이 지금도 여수 흥국사 대웅전에 적혀 있다.

승군은 전투에 그치지 않고 성벽을 쌓고 변방을 지키는 호국군으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정부는 전쟁이 끝나자 이를 탄압하고 역사에서 그 활약을 지우고 숨겨왔다. 조선 조정은 승병의 조직력 무장력에 위기를 느껴 술과 여자를 승병들에 보내 파계, 환속하도록 유도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불교를 무시하고 그 공을 애써 지우듯 지금은 기독교의 종교 편향을 이유로 들어 불교가 국가에 헌신한 공적을 외면한다. 승병의 최고 지도자인 서산대사의 제사를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지내야한다는 대흥사를 비롯한 종단 차원의 요청이 나온지 10년이 됐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불교 기여 외면하는 정부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한강 이남에 정부부처를 이전하는 정부 정책에 호응해 종단은 봉은사 부지를 매각했다. 1970년대 초반 종단이 봉은사 부지를 정부에 매각한 것은 호국불교 전통에 따른 불교계의 대승적 결단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상 매매라는 것이 정부의 주장이다. 봉은사 뿐만 아니라 서울 부산 등 대도시의 수많은 아파트와 정부 기관들이 사찰 부지 위에 들어섰다. 하지만 정부는 강제로 수용하고도 그에 대해 불교계에 감사를 표시하거나 이를 역사 기록으로 남긴 적이 없다. 도심에서 사찰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교회가 들어섰다. 서울 도심의 수많은 대형 교회 역사를 따라가면 사찰이 나온다. 사찰이 아파트와 고층 빌딩으로 혹은 교회로 바뀌듯 불교가 민족과 함께 해온 역사도 지워지고 있다. 그러나 정부 잘못만 아니다. 불교계와 종단도 이를 방치한 책임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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