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정월29일 사택왕후가 가람을 세우다

서탑 조성자와 조성연대
사리봉안기 통해 밝혀져

무왕의 정치적 지지기반
사택왕후가 조성 주인공
선화공주 관계 규명숙제

<가만히 생각하건데, 법왕(法王,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감응(感應)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왕궁(王宮)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사리(舍利)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 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오색(五色)으로 빛나는 사리(舍利)를 7번 요잡(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광겁(曠劫,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今生)에 뛰어난 승보(勝報, 과보)를 받아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보력(寶曆, 치세)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왕후(王后)의 신심(身心)은 수경(水鏡)과 같아서 법계(法界)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 700년)의 구원(久遠)까지도 함께 복리(福利)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사택왕후의 발원문

꼭 10년 전이다. 지난 2009년 1월14일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났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익산 미륵사지의 실체를 밝히는 기록이 나온 것이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西塔)을 수리하는 과정에 미륵사 서탑의 조성연대와 조성 주인이 적힌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가 나왔다. 전설처럼 전해오던 미륵사와 탑의 존재가 사실로 세상에 드러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미륵사 서석탑 심주석 사리공 안에 안치된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두께 1.3㎝로 금판 앞·뒷면에 각 11행에, 한 줄에 9자씩, 앞면 99자, 뒷면 94자, 총 193자가 새겨져 있었다. 뒷면 3행은 8자로 썼다가 나중에 1자를 중간에 삽입하였다. 앞면에는 붉게 주칠을 하여 문자를 더욱 선명히 드러나게 하였으며 문장은 유려했다. 그 내용은 석가모니 부처님에 관한 첫 문단을 시작으로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가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 즉 639년 정월 29일 사리를 봉안했다는 사실이었다. 

가람을 세운 공덕으로 무왕의 장수(長壽)와 정법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모든 중생의 성불 성취를 발원하는 것으로 마무리 한 이 봉안기가 나오면서 오랜 역사 논쟁이 종지부를 찍고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 밝혀졌다. 두 가지 논쟁이 끝났다. 백제 무왕의 아버지 법왕(法王)이라는 시호가 불교에서 나왔음이 분명해졌다. 무왕은 부왕의 시호를 법왕이라 했는데 이를 일부 학자들은 유교적 의미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봉안기에는 법왕(法王)을 부처님이라고 분명히 밝혀 무왕이 아버지인 선왕을 부처님에 빗대고 있다. 

미륵사 창건 주체가 밝혀졌다. 그동안 무왕과 신라 출신 왕후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세웠다는 <삼국유사>가 정설로 자리 잡았다. 마를 파는 서동이 노래를 지어 선화공주와 결혼에 이르렀다는 삼국시대 판 ‘러브스토리’는 지금도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봉안기에 등장하는 조성 주인공은 선화공주가 아니라 익산의 유력가문 집안 출신 왕후였다. 가장 극적인 내용은 조성연대다. 그동안 미륵사 조성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출생연도는 현실과 허구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역사적 실존 여부에 대해 논란이 없는 것은 아쇼카 석주에 출생연도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생이 불분명한 예수는 아직도 역사적 실존 여부를 놓고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미륵사도 10년 전 출생연도가 밝혀지기 전 까지는 전설과 현실을 오갔다. 분명히 눈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취급됐다. 조성연대가 불분명해서다. 서탑 사리 봉안 연대가 밝혀지면서 모든 안개가 걷혔다. 639년 1월29일. 639년은 올해와 같은 기해년(己亥年)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9년 1월14일 명문기가 세상에 나오고, 올해와 같은 돼지해에 탑을 조성했으니 예사 인연이 아니다.

전설이 사실로 드러나

지난해 12월28일 찾아간 익산 미륵사지는 영하 10도를 밑도는 한파에 꽁꽁 얼어붙었다. 인적은 끊기고 공사 트랙터 소리만 울려 퍼졌다. <삼국유사>를 재현한 연못에는 두꺼운 얼음이 얼었다. 사자산 아래 넓은 익산 평야에 서있는 사찰 터는 넓고 탑은 웅장했다. 정문을 들어서니 ‘세계유산 지구’ 안내판이 자랑스럽게 서있다. 크고 웅장한 자태로 하얗게 반짝이는 동탑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모든 사람들이 동탑 앞으로 모여든다. 그러나 동탑은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된 허상(虛相)이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 복원한 동탑은 호남 민심을 달랜다는 이유로 기술적 고려 없이 서두르는 바람에 역사상 최악의 복원으로 남았다. 어디 정치인 만의 잘못이겠는가? 정치인은 사람의 욕망에 편승 했을 뿐이다. 허물어진 탑처럼 힘없고 소외받는다는 의식이 크고 화려한 탑을 만들게 했을 것이다. 백제가 멸망한 것도, 미륵사 탑이 무너진 것도 자연스러운 이치다. 

불교 용어를 빌리면 무상(無常)이다. 동탑은 모든 존재하는 것은 인연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진다는 무상의 도리를 거스른다. 그래서 동탑은 현대인들의 욕망이 투영된 허상이다. 아무런 상처도 없이 밝고 깨끗한 모습으로 서있는 동탑은 세월을 비껴간 그 모습으로 인해 미륵사를 비현실적 존재로 만들었다. 서탑을 정상으로 만든 것은 동탑의 교훈 덕분이다. 무너지고 깎여나가 위태로운 모습을 한 서탑이야 말로 불교 가르침에 합당하다.

사리봉안기가 드러난 그 해 학계는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웠다. 진실이 드러난 것을 환호하는 측도 있었지만 불편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특히 사찰과 탑의 주인공이 선화공주가 아닌 다른 인물이라는데 사람들의 충격은 컸다. 적국의 몰락한 왕자를 사랑한 죄로 왕궁에서 쫓겨났지만 화려하게 재기한 공주와 왕자의 ‘러브스토리’를 산산조각 내는 ‘진실’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선화공주 없는 미륵사는 우스개말로 ‘오아시스 없는 사막’과 같다. 

사람들은 그래서 조성 주인공이 밝혀졌는데도 선화공주를 여전히 놓지 못한다. 일반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그러하다. 선화공주를 떨치지 못하는 학자들은 무왕은 여러 비(妃)를 두었으므로 선화공주도 그 비중 한 명 일지 모른다거나 미륵사가 중원 서 동탑 등 3원으로 이루어졌고 오랜 세월에 걸쳐 조성되었으므로 선화공주는 중원이나 동탑 조성자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를 어느 학자는 “명문기를 통해 조성자가 누군인지 드러났는데도 다른 주장을 펼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람들이 믿고 사랑한 ‘연인’을 진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내쫓는 것도 옳지 않다. 진실은 밝히되 사람들의 마음도 소중히 간직할 때 미륵사는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지 모른다.

학계의 관심 집중돼

봉안기를 통해 드러난 사실 중 하나는 백제가 삼국을 통일한 신라도 감히 사용하지 못했던 ‘대왕폐하’라는 호칭을 붙일 정도로 당당하고 자주적인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비옥한 땅과 한반도의 젖줄이며 교통로인 한강을 장악하고 중국 일본과 교류했던 백제는 한반도 남쪽의 실질적 지배자였다. 

반면 신라는 추풍령 이남 변방의 소국이었다. 두 나라의 사정이 역전 된 것은 6세기 이후 중국에 통일 강국이 등장하면서 였다. 수천년을 여러 나라로 나뉘어 싸우던 중국이 6세기 후반 통일국가 수에 이어 당이 등장하면서 평온하던 동북아는 크게 소용돌이 친다. 당이 북방의 패자(覇者) 고구려를 침범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위세에 눌려있던 신라가 기지개를 켜고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면서 한반도 남쪽의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했다. 

부상하는 신라의 기를 꺾기 위해 장인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무왕은 수차례 전쟁을 벌였지만 번번이 패하며 결국 그 아들 대인 의자왕에 패망한다. 어디 국제정세의 변화 뿐이겠는가? 외부가 불안할수록 내부가 단합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친다면 외세를 능히 극복하지만 한 국가든 집안이든 불행은 겹쳐 오는 법. 난파하는 배에 서로 살겠다고 앞다퉈 뛰어내리 듯 서로 다투고 분열하니 멸망을 재촉하는 것이다. 

백제가 그러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642년 의자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백제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무왕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사택 왕후의 죽음이 의자왕의 지지기반을 흔들어 내부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써 익산에 기반을 둔 사택가문과 손을 잡고 백제의 부흥을 꿈꿨던 무왕의 꿈도 사라지고 백제도 역사적으로 사라졌다.

올해는 서탑 건립 1380주년

그러나 탑을 조성하며 세웠던 발원은 여전히 유효하다. “위로는 정법(正法)을 받들고 아래는 중생을 교화하며 모두 성불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조성한 그 염원은 왕조의 흥망과 상관없이 영원하다. 어쩌면 사리봉안기가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진실’은 그 염원에 있는 지 모른다. 올해 3월5일은 서탑 건립 138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일주일 뒤 3월12일 서탑 준공식이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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