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31일 제야의 종은 불교서 유래
섣달그믐 사찰의 108번 타종서 기원
지난해 뉘우치고 부처님과 새해 맞이
보신각범종 기독교 반대 다른 종 대체

연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단연 제야의 종이 아닐까? 보신각에서 방송 3사의 카운트 다운과 함께 진행되는 33번의 타종 행사는 깊은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요즘에는 화려한 폭죽까지 가미되곤 하니, 삿됨을 물리치고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로 금상첨화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제야의 종과 33번 치는 것이 모두 불교에서 유래한, 부처님을 상징하는 의식임을 아는 분은 많지 않은 것 같다.

1394년 이성계의 한양 천도와 함께 경복궁과 한양성이 축조된다. 조선은 이성계가 건국하지만 이의 설계자는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한양의 4대문을 유교의 4덕(四德)인 인의예지에 맞추었다. 해서 동-흥인지문(興仁之門), 남-숭례문(崇禮門), 서-돈의문(敦義門), 북-홍지문(弘智門.숙정문)의 구조가 갖추어진다. 1396년 한양성이 완성되고 이후 1398년에는 종루가 갖춰진다. 이때부터 새벽 4시에 33번 종을 쳐 성문을 열고, 저녁 10시에는 28번 쳐 문을 닫는 의식이 시작된다. 그러나 조선의 이 관종(官鍾)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이후에는 현 탑골공원에 있었던 원각사의 종을 옮겨와 타종했다. 원각사 종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초 정릉사에 걸렸던 종이다. 이때부터 정부의 종인 관종은 사찰의 종인 범종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한양의 종루가 보신각으로 위상을 높이는 것은 대한제국 시절인 1895년의 일이다. 인의예지에 신(信)이 추가되면 오상(五常)이 되는데, 이를 통해서 무너져 내리던 나라의 권위를 추슬러보고자 했다. 그러나 이 당시는 제야의 종을 치는 풍속은 없었다.

제야의 종을 치는 것은, 섣달그믐에 사찰에서 108번 종을 치며 지난해를 뉘우치고 새로운 해를 부처님과 함께 맞이한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이를 어둠을 물리친다고 해서 ‘제석(除夕)’이라고도 하고, 또 크게 뉘우친다고 해서 ‘대회일(大晦日)’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사찰의 풍속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1953년 보신각과 결합하면서 제야의 종으로 완성된다. 즉 제야의 종은 이제 환갑을 지난 정도의 그리 오래지 않은 풍속인 셈이다. 그러나 현재 보신각종은 사찰의 범종이 아니다. 보물 제2호이기도 한 구(舊)보신각종은 문화재 보호와 제야의 종에 불교 종을 친다는 기독교인의 반대로 인해 1986년 새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현재는 우리의 전통 종을 변형한 품격 없는 종이 새해의 벽두를 알리고 있다.

그렇지만 종은 바뀌었어도 33번 치는 의식은 변동이 없다. 언 뜻 33번 치는 것은 성문을 여는 것에서 차용한 것 같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이는 부처님께서 수미산정인 도리천에 계신다는 의미로 사찰에서 새벽에 33번 타종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인도말의 ‘도리’는 33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찰에서는 부처님을 도리천에 모신다고 해서 현재도 불단을 수미단이라고 한다. 즉 ‘제야의 종’과 ‘33번 치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가피를 통해 묵은 어둠을 벗고 새로운 행복한 한 해를 열려는 의미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제야의 종 타종은 거국적인 새해맞이인 동시에 부처님의 은덕이 충만한 불교 행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야의 종 33번 타종과 함께 부처님의 가피가 온 국가와 겨레에 충만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부처님 안에서 우리는 매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신문3452호/2018년12월26일자] 

자현스님 논설위원·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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