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인검으로 ‘삼산양수처(三山兩水處)’를 찾을 것인가

나옹혜근은 원나라에서 인도 마갈타국 왕자 출신 지공 문하에서 2년을 머무르며 수행의 기틀을 마련했다. 지공은 충숙왕 때 고려를 다녀간 적도 있다. 양주 회암사 조사전의 나옹혜근.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고려 말 나옹 혜근의 작품으로, 불자들이 가장 많이 애송하는 선시 가운데 하나다. 가수들의 작사에도 쓰일 만큼 널리 알려진 선시이다. 시에서 말하는 대로 주변 모든 만물이 우리에게 진리를 설해 주건만 우리는 예사로 보아 넘긴다. 삶은 길지 않고, 수행할 시간도 많지 않다. 짧은 인생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인생을 가득 채우며 산다. 무거울 텐데 짊어지고 있지 말고, 조금 내려놓으면 어떨까? 

출가와 구도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년)은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아(牙)씨, 속명은 원혜(元惠), 법명은 혜근,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이다. 종7품 선관서령(膳官署令) 벼슬을 하던 부친 영해부인(寧海府人) 아서구(牙瑞具)와 모친 영산군인(靈山郡人) 정(鄭)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사의 모친은 태몽으로 금빛 나는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어머니의 머리를 쪼은 뒤 알을 품안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이미 상서로운 아이가 태어날 것을 예견했다. 

1340년 나이 20세 무렵 혜근은 이웃 친구의 죽음을 목도하고 무상감에 방황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주위의 어른들에게 물었지만 제대로 해결해주는 이가 없었다. 답답함을 풀고자 경북 문경의 공덕산 묘적암에 주석하고 있던 요연(了然)에게 출가했는데 요연이 먼저 물었다. “무엇 때문에 중이 되려고 하느냐?” “삼계를 뛰어넘어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합니다. 스님께서 제게 좋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이곳에 온 것은 어떤 물건인고?” “네, 능히 말하고 들을 줄 아는 자가 왔습니다. 그런데 보려고 하면 볼 수 없고, 찾으려 하면 찾을 길이 없으니 답답함을 풀 데가 없습니다. 스님, 어떻게 닦아 나가야 알 수 있는 겁니까?” “나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다. 너의 질문에 답할 만큼 근기가 수승하지 못하다. 다른 훌륭한 선지식을 찾아가서 물어 보거라.” 

나옹스님의 스승 지공화상.

혜근은 요연의 충고를 듣고 요연 문하를 떠났다. 이때 요연 선사가 혜근의 질문에 당황해 적당히 둘러댔다면, 우리나라의 위대한 선사 혜근은 그냥 묻혀 졌을지도 모른다. 선사상 가운데 사빈주(四賓主: 主中主, 賓中主, 主中賓, 賓中賓)가 있는데, 스승과 제자가 견처(見處)에 대해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혜근의 경우는 학인의 견처가 스승보다 뛰어난 두 번째 빈중주(賓中主)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혜근은 스승과 헤어져 운수납자로 여러 곳을 유행하였다. 25세 무렵, 경기도 양주 천보산 회암사로 들어가 4년간 장좌불와하며 용맹정진했다. 마침 이 절에 일본 승려 석옹(石翁)이 머물고 있었는데, 법문을 하다가 선상(禪床)을 치면서 말했다. “대중은 이 소리를 듣는가?” 아무도 대답이 없자, 혜근이 일어나 게송으로 답했다. “선불장 가운데 앉아서 성성역력하게 보아라. 보고 듣는 것이 다른 물건이 아니요, 원래 그것은 옛 주인이로다(選佛場中坐 惺惺着眼看 見聞非他物 元是舊主人).” 

혜근은 회암사에서 4년간 수행한 뒤 겨울(29세), 눈이 쌓인 뜰을 거닐다가 조금 일찍 꽃핀 매화를 보고 깨달았다. 

나옹스님의 제자 무학대사 진영.

법맥과 법거량 

1347년(29세), 원나라로 건너간 혜근은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 당시 고려 사찰)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승려 지공(指空)을 찾아갔다. 지공이 먼저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고려에서 왔습니다.” “배편으로 왔느냐, 육로로 왔느냐, 신통으로 왔느냐?” “신통으로 왔습니다.” “그러면, 신통을 내게 보여 주시오.” 그러자 혜근이 지공 앞에서 두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지공이 다시 물었다. “고려에서 왔으면 동해를 보고 왔는가?” “안보고 어찌 올 수 있겠습니까?” “12개 방자(房子)를 다 가지고 왔는가?” “네 가져왔습니다.” “누가 이렇게 너를 오게 하였는가?” “제가 스스로 이렇게 왔습니다.” “무얼 하러 왔는가?” “후인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법거량을 통해 혜근은 지공 문하에서 2년을 머물렀다. 혜근은 지공 문하에서 자신이 닦아온 수행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지공(指空)은 인도 마갈타국(磨竭提, Magadha) 왕자 출신으로 선종 법맥 108대 조사이다. 그는 당시 중국으로 건너왔고, 충숙왕(忠肅王) 때에 고려를 다녀간 적도 있다. 

이후 혜근은 지공 문하를 떠나 선지식을 찾아 다녔다. 혜근은 강소성(江蘇省) 항주(杭州) 정자사(淨慈寺)의 평산 처림(平山 處林, 1279〜1361년) 문하에 이르렀다. 혜근이 승당에서 거닐고 있으니 처림이 물었다. “대덕은 어디서 왔는가?” “대도(연경)에서 왔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는고?” “서천 지공화상을 만났습니다.” “지공화상은 일용에 뭘하던고?” “지공은 천검(千劍)을 쓰나이다.” “지공의 천검은 차치하고 그대의 일검(一劍)을 가져와봐라.”

혜근은 좌복으로 선사를 내리쳐서 넘어뜨린 다음, 다시 처림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내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살릴 수도 있다.” 처림은 혜근의 법기를 알아보고, 그에게 법을 전했다. 

‘내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살릴 수도 있다’는 혜근의 말은 ‘활인검(活人劍) 살인도(殺人刀)’라고 한다. 이 공안은 스승이 제자를 제접할 때 자재한 작용을 칼에 비유하기도 하고, 선승들이 서로 선기(禪機)를 겨루는 데 활용된다. 여기서 유래되어 선방의 편액을 ‘심검당(尋劍堂)’이라고 한다. 

혜근은 처림의 도량에서 몇 개월간 머물렀고, 처림은 혜근에 대해 “그대의 말이나 기운이 불조(佛祖)와 맞고, 종지(宗旨)의 안목이 분명하고 매우 높다”고 평가해주었다. 혜근도 스승의 도량을 떠날 때, “서로 믿고 의지하지만 공부를 위해 떠난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여주 신륵사에 있는 나옹혜근(보제존자)의 석종과 석종비.

32세의 혜근은 다시 몽당(蒙當), 몽산(蒙山), 오광(悟光), 설창(雪窓), 무상(無相), 요당(了堂), 박암(泊菴) 등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녔다. 이렇게 행각하면서 수많은 선사들과 법거량을 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선사가 몽산덕이다. 덕이는 고려말기, 우리나라 선사들과 법연이 많은데, 혜근이 직접 덕이와 법거량을 했다는 점이다. 혜근은 행각 중 33세에 무주의 천암 원장(千岩元長)을 만났다. 이곳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몇 년간 유행한 뒤 다시 법원사의 지공을 찾아갔다. 혜근은 자신이 고려로 돌아가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의 앞길을 물었다. 지공은 혜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본국으로 돌아가 삼산양수처(三山兩水處)를 찾으면 불법이 흥하리라.” 이 삼산양수처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는데, 인도의 나란타대학이 있었던 곳과 유사하다고 한다. 

[불교신문3455호/2018년1월12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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