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통해 받아들인 불교, 과연 참인가

“격의불교·교상판석으로 인해
중국 대승 초기불교와 멀어져
원전 토대로 사상 역사 재정립”

한국불교는 지금까지 중국의 문화와 사상, 언어의 영향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21세기를 맞아 그동안 중국을 통하여 받아들인 불교가 과연 참인지 아닌지 한번쯤은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첫째, 번역문의 한계성과 모호함 때문이다. 즉, 한문은 고착어이고 인도어와 한글은 굴절어이기 때문에 직접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둘째, 중국의 격의불교에서 시작된 법의 변질성이다. 이 문제는 이미 많은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 지적된 바가 있다. 셋째, 지의와 현수대사의 교상판석 때문에 인도불교는 중국불교의 하위에 위치하게 되었고, 더불어 불교의 전통성을 중국에 두려고 하는 중국학자들의 의도 때문에 오늘에 와서는 중국의 대승불교가 초기불교의 본질과는 너무나 멀어지게 된 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고,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등의 원전을 직접 접하여 볼 수 있는 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원어인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티베트어를 통하여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는 불교를 다시 사상적으로, 역사적으로 재정립해 보려 한다. 

불교란 팔리어로는 붓다 사사나(Buddha sasana) 또는 붓다 담마(Buddha dhamma)이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내용 그것이 불교인데,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부처님이 가르치시려고 했던 불교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일단 역사적으로 관찰해 보자. 부처님께서 성도하신지 채 3개월도 되지 않아서 콘단냐 등 5비구와 야사와 그의 친구들, 3가섭과 그들의 제자들, 모두 1100여명의 제자들을 제도하셨다. 제자들이 법을 증득한 후에 그들을 향하여 “가라 비구여 둘도 말고 혼자서, 많은 생명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생명들의 행복을 위하여”라고 전법선언을 하셨던 것이다. 그들이 법을 깨달은 것은 불과 3개월 사이였다. 그동안에 그들이 듣고 깨달은 법, 전하라는 법,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법이라 할 수 있다. 3가지 초기경전을 순서대로 듣고 이들이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기록되어지고 있다.

그 중 첫 번째 <초전법륜경>에서는 쾌락은 무상하고, 고행은 무익하므로 정견 등의 팔정도를 기본으로 한 고락 중도를 강조하였고, 두 번째 <무아상경>에서는 고통 받는 자의 주체 없음을 오온무아(인무아)를 통해서 설파하셨고, 세 번째 <불타오름의 경>에서는 삼계화택의 비유를 통해서 마음이 인식 대상 그 어느 곳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법무아를 가르치셨다. 그 다섯 비구들은 이 세 가지 초기 경전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여 모두 아라한과를 얻은 것인데, 정견 등을 비롯한 팔정도의 수행으로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지 않게 되어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 이 가르침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초기경전들의 가르침이 대승불교의 핵심인 <금강경>에서도 그대로 보여 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모든 중생을 구제하되 한 중생도 구제한 바가 없다는 인무아(人無我)와 대승 수다원과 아라한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대상과 그 어떤 법에도 집착함이 없다는 법무아(法無我)의 수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르침들은 <구사론>과 <유식론>에서 다시 인무아는 견도(見道), 법무아는 수도(修道), 해탈은 무학도(無學道)라는 이름의 언어로 재 강조되어졌다. 이들은 다시 중관학파에서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다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교신문3455호/2018년1월12일자] 

등현스님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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