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박에서는 둥글게, 튜브 속에서는 길게 살라”

긴(長) 문화 이면에 있는 것들

베트남 문묘와 사당에서 흔히 보는 ‘거북과 봉황’의 청동상이 바이딘사원의 삼세불전 좌우에 서 있다. 이는 유불도(儒佛道)가 긴밀히 결합된 양상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롱박에서는 둥글게 살고 튜브 속에서는 길게 살라”는 베트남 속담이 있다. 환경에 적응하며 살라는 뜻인데, 베트남 도심지의 주거형태인 도롱집을 ‘튜브 하우스’라고도 부르니 이를 연상하게 된다. 도롱집은 2~5m의 폭에 15~60m 길이의 좁고 긴 집을 말하며, 옆집과 붙어있어 창문이나 발코니는 앞쪽으로만 내게 되어 있다. 프랑스강점기인 19·20세기에 건물의 가로면적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했기에, 국민들은 좁은 폭에 길이가 길고 높은 집을 짓기 시작했던 것이다. 

긴 주택이 프랑스의 영향이라면, 베트남의 상징인 여성들의 긴 의상 ‘아오자이’는 중국의 영향이다. 본래 동남아의 다른 나라들처럼 베트남에서도 태양을 피하고자 남녀 없이 긴 천으로 감싸는 사롱을 하의로 입었다가, 1000년간 중국지배를 받으면서 그들과 같이 바지를 입기 시작했고 18세기부터 중국 전통의상을 본 딴 아오자이를 본격적으로 착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삼모작을 하여 쌀 수출국 1, 2위를 다투는 베트남은 연중 황금색 논이 이어지는 풍요의 땅이다. 따라서 베트남의 대표음식인 쌀국수와 함께, 그들의 의식주를 상징하는 아오자이, 쌀국수,도롱집이 묘하게도 ‘길다(長)’는 공통점을 지녔다. 

그런가하면 나라의 지형도 하염없이 길다. 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를 길게 감싸 안은 채 위로는 중국과 맞닿아 북방대륙과 남방해안의 문화가 공존함은 물론, 불교 또한 두 계통이 나란히 존재한다. 북부의 하노이에 있는 한기둥사원 일주사(一柱寺)는 아기를 점지해주는 곳으로 이름 높다. 과거 리(李) 왕조의 태종이 연꽃 위에 앉은 관세음보살로부터 아이를 건네받은 꿈을 꾼 뒤 아들을 얻어, 그에 대한 감사로 물위에 떠있는 연꽃을 본 따 세운 절이다. 기둥 하나에 의지한 인공연못 위의 작은 절이지만 국보1호인 일주사는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대승불교의 꽃, 보살신앙을 상징한다. 

이에 비해 남부지역에서는 남방 상좌부불교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호치민 이남의 메콩델타지역에는 크메르 언어로 표기된 절들이 무수하다. 이곳의 스님들은 남방불교의 전통에 따라 살아가고 있으니 베트남에는 두 개의 불교전통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북방과 남방 불교 나란히

두 개의 불교전통이 공존하지만 교세(敎勢) 차이는 커서 베트남불교는 대승불교로 분류된다. 본래 상좌부불교에서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데 비해, 대승불교의 경우 시공간적으로 무수한 부처가 존재한다는 다불(多佛)과 다보살(多菩薩) 사상이 신앙의 기반을 이룬다. 그런데 베트남 상좌부불교는 대승불교와 결합되어 있거나 여러 모로 자유롭다. 

우선 석가모니불만이 아니라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여러 보살상을 모신 상좌부불교 사찰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관음신앙은 다른 상좌부불교 국가에서도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중생의 고통을 헤아리는 대자대비의 존재가 지닌 보편성은 수행계통과 무관함을 깨닫게 한다. 그러다보니 대승불교의 교리를 일부 수용하게 마련이다. 

스님들의 탁발이나 시주도 절충식이고, 열려 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정구역을 다니는 탁발이 아니라 주말마다 신도들이 사찰에 와서 스님 한 분 한 분께 시주 물건과 돈을 고루 보시한다. 또 특정장소에서 지역의 모든 스님들을 모시고 올리는 시주, 우리의 옛 탁발승처럼 개별적으로 방문하는 스님에게 올리는 시주 등 자유롭다. 양상은 다양해도 신도는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스님은 축복을 전하며, 잉여의 시주를 필요한 이웃과 다시 나누는 점은 다르지 않다. 

베트남 불교의 역사는 매우 길어 기원전 3세기에 상좌부불교가, 기원후 1~2세기에 중국불교가 전해졌다. 당시의 상좌부불교는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지금의 북베트남으로 유입된 것이었다. 따라서 초기의 상좌부불교는 중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점차 대승불교로 바뀌었다면, 현재 남부의 상좌부불교는 크메르족의 영토를 정복한 흔적이다.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과 서구열강의 외침의 역사이자 침략의 역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감싸 안은 길고 긴 베트남. 인도와 중국의 거대양국 사이에 있어 얻게 된 ‘인도차이나’라는 반도이름의 상징성은 불교에서도 두 갈래의 뿌리로 나누어져 베트남에 함께 담겨 있으니 오묘하다. 

종교탄압 속 다종교사회

베트남 사람들은 “첫째는 집에서 수행하고, 둘째는 시장에서 수행하고, 셋째는 사찰에서 수행한다”고 말한다. 불교신자가 가장 많지만 종교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현실의 삶에 충실한 그들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종교로서 불교’와 ‘생활규범으로서 유교’가 양대 기둥을 이루는 가운데, 도교는 민간신앙과 깊이 결합되어 있고 천주교의 세력도 만만치 않다. 

이에 베트남은 한국과 함께 다종교국가로 곧잘 거론될뿐더러 불교의 성장과정 또한 우리와 유사하다. 이른 시기에 들어온 불교는 중국지배 하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고, 938년 독립과 함께 성립된 대월국(大越國) 시기에 베트남불교는 큰 발전을 이루어 승려는 지식인의 대명사로 존경을 받았으니 우리의 고려시대가 연상된다. 그러다가 15세기 후려(後黎) 왕조에 들어서 유교중심 정책으로 전환하였고 19세기 서구의 진출까지 상대적으로 억압을 받았으니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조선시대를 보는 듯하다. 

베트남 사원에서 대경을 치며 기도하는 스님의 모습. 그림=구미래

19세기 후반부터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간 선교사들을 통해 뿌리 내렸던 천주교가 국교처럼 번성했다가, 1954년 프랑스의 완전한 퇴장과 함께 탄압받으며 막을 내렸다. 그러나 천주교는 불사조처럼 되살아났고 현재 신자 수는 인구의 7% 내외를 헤아린다. 반면 개신교의 교세는 극히 미약한데 베트남사람들은 이에 대해 “천주교는 프랑스에서 왔고 개신교는 미국에서 왔다”는 말로 정리한다. 개신교는 미국과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보기에 베트남전쟁의 상흔이 깊은 그들에게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이처럼 베트남에는 대승불교와 상좌부불교, 유교와 도교, 천주교가 공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여러 종교를 종합한 까오다이교까지 번성하고 있으니 가히 다종교사회라 할 만하다. 

그런데 같은 다종교사회라도 우리의 경우 종교탄압이 왕조시대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면, 사회주의국가인 베트남은 종교의 자유를 내세우면서도 탄압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여러 종교가 꽃을 피워나가고 있어 주목된다. 

조화롭게 융합하는 불교

베트남에는 여러 종교가 공존할 뿐만 아니라 불교 또한 다채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수백만 명 이상의 신도를 지닌 다양한 종파들이 생겨나 활약하는가하면 불교 속에 여러 전통신앙이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역사 속의 종교갈등은 위정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이었고 오늘날에도 정부와 이념투쟁이 있을 뿐, 종교 간이나 종파 간의 분쟁은 거의 없다. 따라서 베트남불교의 특성 또한 다양성과 조화로움을 꼽는다. 

전통신앙과의 결합은 전불후신(前佛後神)의 사찰구조로 정착되어 있다. 불보살을 모신 법당을 중심으로 여러 토속신·인물신을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함으로써 우리의 산신각·칠성각과 같은 전각이 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불교 속에 녹아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연현상은 농경공동체의 삶을 좌우하는 것이었기에 예로부터 구름·비·천둥·번개를 사신(四神)으로 섬겨왔는데, 불교와 결합되면서 각기 법운(法雲)·법우(法雨)·법뇌(法雷)·법전(法電)이라는 부처의 모습으로 좌정해 있다. 따라서 이들 사법불은 백성들의 순조로운 농사를 위해 몸을 바꾼 화신불인 셈이다. 

유불도(儒佛道)의 근원을 하나로 보는 삼교동원(三敎同原)의 사상도 불교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하노이 근교에 동양 최대규모로 지은 바이딘사원에 가면, 민간의 신앙과 소망을 담아 지덕체를 겸비하고 재물을 관장하는 관우(關羽)가 사천왕 대신 입구에서 반긴다. 두 분의 베트남 나한과 함께 502나한을 모신 긴 회랑을 지나 도달하는 석가불전, 삼세불전, 관세음전에는 거북의 등에 봉황이 서 있는 거대한 청동상을 좌우에 세웠다.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러한 조합은 길상과 번영에 대한 바람으로, 이곳엔 봉황의 입에 연꽃을 물려 불교적 색채를 입혔다. 

다양한 종파들의 행보 또한 다채롭다. 탁발승단으로도 불리는 걸사파(乞士派)는 1944년에 민당꽝스님이 창단해 탁발 등 초기불교의 정신을 이어가는 한편, 비구·비구니의 동등한 권리를 실천하며 대승불교와 상좌부불교를 조화롭게 아우르고 있다.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등 동서양의 종교를 아우르는 까오다이교(高台敎), 불교와 조상도를 결합한 호아하오교(和好敎)의 양대 신흥종교는 현실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것으로 이름 높다. 베트남불교에 대한 국내연구는 걸음마 단계이지만 우선 ‘다양성과 조화의 불교’로 정의해도 무방할 듯싶다.

 

구미래 소장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불교민속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조계종 성보보존위원, 충남·제주도 무형문화재위원, 불교민속학회 연구이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 등으로 있으며, 저서로는  <한국불교의 일생의례> <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 <존엄한 죽음의 문화사> 등이 있다. 

[불교신문3454호/2018년1월9일자]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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