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기해년 새해, 나눔의집을 가다

일본이 ‘위안부’ 동원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안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할머니들이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은 이제 25명뿐이다. 사진은 나눔의집에 거주하는 강일출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240명에서 25명으로 줄어
지난해 할머니 8명 세상 떠나

나눔의집 거주 할머니 6명
대부분 90세 넘긴 고령에
노환과 지병으로 활동 힘들어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두어야 한다.” 지난 1991년 8월14일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실상을 증언한 고(故) 김학순 할머니(1921~1997)가 남긴 말이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일본군의 전쟁 범죄가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1992년 1월8일부터 매주 수요일 할머니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주장하며 정기 수요시위에 나섰다. 그렇게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명예회복을 주장해 온지 어느덧 27년이 지났다.

하지만 일본은 줄곧 ‘위안부’ 동원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할머니들이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지난 12월14일 세상을 떠난 이귀녀 할머니를 비롯해 2018년 세상을 떠난 피해 할머니만도 8명이다. 이제 할머니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도 240명에서 10분의 1 수준인 25명으로 줄었다. 이 가운데 6명이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이사장 월주스님)에서 생활하고 있다. 새해를 열흘 앞둔 지난 12월21일 할머니들을 만나기 위해 나눔의집을 찾았다.

평균 나이 90세를 넘긴 할머니들에게 겨울은 견디기 힘든 계절이다. 할머니들은 겨울이 되면 수요시위 참여와 같은 외부 활동은 가급적 자제하고 나눔의집에 머물며 보낸다. 노인건강체조와 치매예방 프로그램, 종교활동 등 나눔의집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하며 일상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주말이면 할머니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학생들과 후원자, 자원봉사자들을 만나고 있다.

나눔의집에서 체계적인 관리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다. 안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할머니들의 기력도 점점 약해지고 있다. 최근 들어 할머니들이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이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의 설명이다. 안신권 소장의 설명을 듣고 나눔의집을 둘러본 뒤, 할머니들이 거주하는 생활관으로 들어섰다. 생활관에는 강일출, 박옥선, 이옥선(부산), 정복선, 이옥선(대구), 하수임 할머니 등 6명이 함께 지내고 있다.

나눔의집에 조성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흉상.

“선생은 집이 어디요? 어디에서 왔소?” 생활관에 들어서자 거실을 지키고 있던 강일출 할머니가 인사를 건넸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강일출 할머니는 1943년 중국 심양을 거쳐 장춘 목단강에서 ‘위안부’ 피해를 당했다. 그 때 강 할머니의 나이 겨우 16세였다. 한창 또래 친구들과 뛰어놀며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울 나이였다. 나라가 힘이 없던 시절, 소녀의 꿈을 지켜줄 이는 없었다. 그렇게 강일출 할머니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사춘기 16세 소녀는 어느덧 망백(望百)의 나이가 됐다. 모진 세월을 스스로 감내하며 역사의 증언자로 자신이 겪은 일을 잊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홀로 거실에 나와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건강도 염려돼 질문을 건넸다. 주변 도움 없이 거동도 쉽지 않지만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강 할머니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특히 일본 정부의 공식사죄를 촉구할 때에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왜 나와 앉아 있냐고? 이렇게 누구라도 손님이 왔을 때 나와서 한 마디라도 해야지. 그러려면 거실에 나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지. 건강은 어떠냐고? 솔직히 많이 힘들어. 그래도 건강을 잘 지켜야지. 오래오래 살아서 일본놈들한테 사과도 받고, 한 마디라도 더 증언하려면 건강을 잘 지켜야해. 무엇보다 역사문제는 똑바로 해야 해. 후대들이 당하지 않으려면 역사를 똑바로 해야 돼. 새해에는 전쟁이 없이 평화로운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 나도 내가 당한 일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려면 건강해야지. 암, 건강해야 해. 우리들은 늙어서 힘이 없지만 후대들이 역사문제를 지키고 알리기 위해 노력해줬으면 해.”

강일출 할머니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이옥선(부산) 할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이옥선 할머니 역시 16세인 1942년 중국 연길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이옥선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 주로 방에서 지내고 있다. 이옥선 할머니는 지난 2015년 박근혜 정부의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를 비판했다. 할머니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고 일본 정부의 공식사죄나 책임 규명없이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나마 합의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이 해산돼 기대를 갖고 있다고 했다. 나눔의집에서 함께 생활하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말을 쉽게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그 뜻은 분명했다. “죽기 전까지 반드시 일본의 공식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어려서 끌려가서 평생 좋은 일은 못 보고 살았지. 지옥같은 삶을 살았어. 요즘은 건강이 제일 걱정이지 뭐. 건강해야 하는데. 가끔 같이 지냈던 할머니들 생각이 나기도 해. 배춘희 할머니는 노래를 참 잘 했는데…. 새해에는 꼭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야지. 꼭 받아내야 돼.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여자가 대통령이 됐으니 우리들의 아픔을 알아주고 잘 도와줄 줄만 알았지. 근데 일본이랑 엉뚱하게 합의하고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을 보면 답답하지 뭐. 그래도 문재인 대통령이 되고 정부가 바뀌고 했으니 좀 나아지겠지. 일본으로부터 공식 사죄와 배상을 받을 때까지 건강해야지.”

“건강하셔야 한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이 할머니 방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대구 출신의 또 다른 이옥선 할머니가 병원 진료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들어섰다. 이옥선 할머니는 13세 때 만주 혜성으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하는 아픔을 겪었다. 최근 몸이 안 좋아져서 병원에서 정밀 검진을 받고 오는 길이었다. 여전히 거실을 지키고 있던 강일출 할머니가 손수 귤과 빵을 간식으로 챙겨 주었다.

“선생은 고향은 어디요? 내 고향은 곶감과 대추가 유명한 상주요. 우리 집에서도 감나무를 많이 키우고 겨울이 다가오면 사람들이 모여서 곶감을 만들었지. 한 번을 가지도 못했는데 요즘에는 고향 생각이 많이 나. 꼭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선생, 사진 한 장만 찍어줘. 꼭 보내줘야 해.” 강한 어조로 일본을 성토하던 강 할머니도 고향 이야기가 나오자 말끝이 흐려졌다. 강일출 할머니에게 “사진 꼭 보내드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생활관을 나섰다.

“이제 할머니들도 20여 분밖에 남질 않았다. 남은 할머니들도 대부분 90세를 넘긴 고령이라 이제 한계가 있다”는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은 “할머니들이 살아 계신 동안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연대와 지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안신권 소장은 “할머니들의 역사는 근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역사다. 본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며 “역사를 올바로 기억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왜곡되기 마련이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해다. 나눔의집을 중심으로 불교계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에 나서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나눔의집 생활관 한편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트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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