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2019 불교신문 제언

한국불교 더 이상 ‘영웅’은 없다
대중 스스로 최고 책임감 가져야
한국불교와 종단명운 걸린 한 해 

851년 범일국사는 강릉에 사굴산문을 열었다. 스님은 일심(一心)을 강조하고 늘 제자들에게 “한 번 지켜서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스님이 머물던 굴산사에 남아있는 당간지주는 스님의 ‘일심(一心)’처럼 남아 2019년에도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한다. 강릉=김형주 기자

2019년 불교계는 중대 기로에 섰다. 지난해는 최악이었다. 총무원장스님이 공중파 고발 프로그램에 두 번이나 불려나올 정도로 수모를 겪었다. 문화재 구역 입장료를 받는 사찰을 향해 언론이 공공연하게 ‘산적’이라며 비아냥거려도 누구하나 항변하지 못했다. 종단이 세간의 지탄을 받은 적이 한 두 번 아니지만 지난해 사태를 특히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불교를 향한 냉소와 비하가 모든 스님과 불자들이 느낄 정도로 보편 현상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은 지금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했고 종단 지도부가 거의 관련됐지만 분위기는 지금이 더 나쁘다.

이유가 있다. 우선 불교를 비롯 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다. 그 때는 ‘우리 주지스님’을 믿고 따랐다. 불교에 기대는 신도가 많았다. 두 번째 선지식들이 있었다. 성철스님 등 국민들 존경을 받는 고승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사회가 불교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대했다. 셋째 수좌들이 살아있었다. 아무리 싸워도 선원에서 목숨 걸고 정진하는 수좌들을 믿고 의지했다. 불교가 그래도 이판(理判) 덕분에 산다며 안심했다. 지난해는 확인되지 않은 총무원장 개인 의혹이었고 시기도 짧았다. 과거처럼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더 심각한 것은 선지식, 수좌 같은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영웅’이 사라진 불교계를 살릴 최후의 보루는 그래서 대중 자신이 되어야한다. 나를 구하고 종단을 구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모든 언로(言路)가 열린, 직접 민주주의 시대에 종단 직책이나 법랍 등과 같은 형식은 무의미하다.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미도 언론의 힘을 빌려 종단을 뒤흔드는 시대다. 대중이 모두 선지식이며 총무원장이라는 책임감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납자의 몫을 다해야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해방 후 봉암사에서 결의했던 ‘부처님 법대로’ 살면 된다. 그 때 20~30대 젊은 수좌들은 ‘부처님 계율과 조사들의 수행 가풍을 본받아 구경각을 성취한다’며 18가지 규약을 정했다. 수행자가 부처님 제자답게 사니 신도들에게 머리 숙일 것을 가르쳤다. 부처님 법답게 사는 것은 다름 아닌 계율을 지키는 청정한 삶이다. <선가귀감>에 이르기를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하는데 하물며 청정한 깨달음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 당연한 규칙을 지키지 않으니 종단이 시끄럽고 자신도 괴로운 것이다.

봉암사 결사 참석자들은 공주규약을 지키지 않거나 의지가 없는 이는 쫓아냈다. 종단도 이제 비상한 각오를 다져야한다. 숫자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만인의 스승으로 부처님 법 계율을 지키며 사는 스님만 받아들이고 어기거나 혼란을 야기하는 자는 산문출송으로 종단의 규율을 세워야 한다. 대중 한명 한명이 종단을 책임지는 주인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좇아 살아간다면 종단과 한국불교는 끊이지 않고 그 맥이 이어질 것이요, 공부 보다 다른 데 관심 갖고 승복을 유니폼으로 여긴다면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 2019년은 종단과 한국불교 명운이 걸린 해다.

[불교신문3453호/2019년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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