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조의 붉음 보거든 나의 원력이 그런 줄 알아라”

봉려관 스님이 개산한 제주 관음사의 1936년 모습.

1918년 법정사 무장항쟁 등
제주 지역 항일운동 ‘후원’
대흥사에서 의병 보고 원력
군자금 지원으로 ‘독사설’

“이 몸 타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연기가 고르게 오르지 못할까 걱정이다. 낙조의 붉음을 따라 갔다가, 또한 붉음을 보거든 나의 원력이 그런 줄 알아라.” 조선 후기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시기에 제주불교 중흥의 씨앗을 뿌린 비구니 봉려관(蓬廬觀) 스님의 열반송이다. 봉려관 스님은 일제에 맞선 법정사 무장항쟁을 지원하는 등 빼앗긴 나를 찾기 위해 나선 제주불교인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일제에 항거한 제주불교를 이야기 할 때 봉려관 스님을 빼놓을 수는 없다.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쟁을 주도한 김연일, 강창규, 방동화, 정구용, 김인수, 김용중, 강림호 스님 등을 지원했다. 항쟁의 중심이 된 법정사도 봉려관 스님이 사실상 창건했다. 항쟁이 성공하기 위해선 인적 자원과 함께 물적 토대가 필요하다. 사람과 자금을 준비해야 거사를 단행하고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 역할을 봉려관 스님이 담당했던 것이다.

<근대제주불교사 자료집>은 “봉려관 스님은 방동화 스님과 동행하여 육지까지 시주를 하러 다녔다”고 전한다. 방동화 스님은 법정사 항쟁을 주도한 스님 가운데 한 명이다. 이 기록에 근거하면 봉려관 스님이 제주 지역 스님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조직하고 그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헌신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단법인 봉려관선양회에서 발간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은 이렇게 적고 있다. “(봉려관 스님은) 제주도에서부터 독립운동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전초기지로 생각하고, 거사를 준비했던 것이다. … 봉려관 스님은 항일 독립운동에 소리 없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봉려관 스님 진영

봉려관 스님의 항일운동 지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다. <해월당 봉려관 스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강창규 스님을 비롯한 무오 (법정사) 항일 항쟁을 주도한 분들이 관음사와 산천단 소림사(지금은 당시 제단만 남아 있으나 그때는 자그마한 암자가 있었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1913년 법정사 주지로 김연일 스님이 맡게 된 일, 그리고 항일 의병 참모장 상운(김석윤) 스님이 관음사 서무와 1911년 관음사 해월학교 교사로 활동한 점, 의병 활동 자금과 본사인 대흥사에 독립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법회를 자주 연 점 등을 볼 때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제주도 북제주군이 발간한 <제주 항일인사 실기>에도 봉려관 스님의 항일운동 참여 사실이 적혀 있다. “김석윤(상운스님)은 불교에 더욱 정력을 쏟아 안봉려관이 색수수(塞水藪)에 관음사를 창건할 때, 불교를 설법하며 많은 재력을 쾌척하였다.” 김석윤은 항일 의병 참모장인 상운스님이다. 의병을 모아 사라봉 남쪽 화사평에서 훈련을 진행한 상운스님은 제주시 광양 대장간에서 무기를 제조하기도 했다. 의병을 모으고 무기를 제작하려면 자금이 필수적이다. 봉려관 스님은 의병으로 나선  상운스님의 든든한 후원자 였던 것이다. 상운스님은 1911년 봉려관 스님이 제주에 개설한 해월(海月)학원의 교사로 활동한 인연도 있었다.

제주 관음사 비림에 있는 봉려관 스님 비석.

<해월당 봉려관 스님>에 실린 혜전스님(도남 보덕사 주지)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봉려관 스님의 5대 손상좌인 혜전스님은 “당초 항일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산천단 포교소가 일경들의 감시가 강화되면서 활동에 제약을 받게되자 봉려관 스님과 김연일 스님이 의논을 했다”며 “이때 대안으로 봉려관 스님이 창건한 법정악 법돌암으로 김연일을 형식상 주지로 정했다”고 밝혔다. 이어지는 혜전스님의 육성이다. “김연일은 법돌암에 주석하면서 이름을 법정사로 개명하여 그곳을 항일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것이다. 물론 이때도 모든 재정 지원은 봉려관의 몫이었다. 항일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김연일의 달변과 박식(博識)이 많은 협력자들을 규합할 수 있었고, 지역 유지들과의 관계에서 조력자들을 얻어 결국은 항일항쟁의 횃불을 올릴 수 있었다.”

봉려관 스님은 1920년 서귀포 법화사에서 법정사 항쟁 당시 일제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영가를 위해 천도재를 지내기도 했다. 나라를 빼앗기고, 3.1운동이 끝난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항쟁 희생자들을 천도하는 의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은 봉려관 스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스님은 제주불교 중흥을 위해 적극 나섰다. 1600년을 민족과 고락(苦樂)을 같이한 불교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겠다는 원력을 세웠던 것이다. 1924년 제주 관음사 법당 낙성식을 봉행하고, 그해 제주불교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한 1926년에는 제주불교부인회와 제주불교소년단을 결성하는 등 불자들의 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헌신했다.

봉려관 스님 행적비.

제주불교 중흥과 독립운동을 지원한 봉려관 스님을 조명하는 자리가 지난 11월22일 마련돼 주목 받았다. 제주 관음사(주지 허운스님)와 탐라성보문화원이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란 주제로 개최한 세미나는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을 보탠 스님의 행적을 살폈다. 이날 혜달스님(전 동국대 강사)은 ‘근대 한국여성의 선구자 - 해월당 봉려관 스님’이란 제목의 발표에서 봉려관 스님의 항일의지를 강조했다.

혜달스님은 법인스님(1931~2011, 안광호 스님 상좌)에게 구술 받은 내용을 소개했다. “봉려관 스님이 항일운동을 하신 것은 대흥사 때문이다. 항일운동 하는 사람들이 죽은 것을 본 것이다. 봉려관 스님은 군자금도 대흥사에 여러번 가져다 주었다. 항일투사다. 그래서 죽었다.” 혜달스님은 “대흥사 산중에 피비린내 가득한 비참한 상황(1910년 일본군에 의해 의병과 스님 등 60여명 피살)을 친히 목격한 것으로 보이는 봉려관(스님)은 이곳에서 자신의 항일의식을 다진 것으로 사료된다”면서 “이후 항일 의지 실천 방식이 매우 신중했던 것은 당시 제주불교계가 처한 상황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대흥사 항일운동의 인명 대참사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혜달스님은 봉려관 스님의 입적 원인을 두고 독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안광호 스님의 생전 증언을 전했다. “봉려관 스님은 독버섯국을 드시고 돌아가셨는데, 독살 당한 것이다. 봉려관 스님은 항일 운동하는 사람들을 뒤로 몰래 도왔다. 불사를 핑계로 불사금을 신도들한테 걷어서, 불사에는 돈을 조금 쓰고, 남은 돈은 항일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몰래 가져다주었다. 대흥사에도 군자금 주러 여러 번 갔다. 군자금 대 준 것 때문에 독살 당했다. 장례도 쉬쉬해서 치렀고, 관음사에서 화장해서 산골했다.”

봉려관 스님이 제주불교 중흥에 기여한 것은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그동안 불사 부분에만 관심이 모아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항일운동을 지원한 사실이 부각되지 않았다. 향후 보다 본격적이고 치밀한 연구를 통해 봉려관 스님의 항일운동 지원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야할 것이다.

봉려관 스님 누구인가 
조계종 제24교구 관음사는 지난 2012년 7월 봉려관 스님의 행적을 담은 비와 존상(尊像)을 세웠다. 행적비 앞면에는 행장이, 뒷면에는 오도송과 열반게가 기록돼 있다. ‘한라산 관음사 개산조 해월당 봉려관 스님 행적비’ 전문은 다음과 같다. “봉려관 스님은 1865년 제주시 화북동에서 태어났다. 34세가 되는 1899년 우연히 한 노인으로부터 관음보살상을 받은 인연으로 출가, 해월굴에서 6년여 용맹정진 끝에 크게 깨달았다.

이에 제주불교를 중흥코자 서원, 1907년 12월 전남 대흥사를 찾아 믿기 어려운 기적을 행함으로써, 청봉화상을 계사로 유장스님을 은사로 비구니계를 수계, 이듬해 1월 제주로 내려와 1908년 관음사를 창건, 개산조가 되었다. 법화사, 불탑사, 법정사, 월성사, 백련사 등을 중창 또는 창건하고 국내 대덕스님을 초청, 정법홍포에 매진하였다. 또한 법정사 무오항일항쟁의 중심에 서서 활동자금을 지원하는 등 여성의 사회참여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936년 세수 71세 법납 37세로 입적하시니 슬퍼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봉려관 스님은 조선조 억불정책으로 인한 200여 년간의 무불시대를 마감하고 이 땅에 불교를 일으켜 세운 제주불교 중흥조요, 선각자요 애국지사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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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 해월당 봉려관스님>(혜달스님), <해월당 봉려관 스님>, <제주 항일인사 실기>, 한라산 관음사 개산조 해월당 봉려관 스님 행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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