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술의 거장 피카소
그의 명작 중 노년에 그린 
‘어항’이 사랑을 받는 것은 

어항 속 새의 평화스러움이 
사랑으로 반추되었기 때문…

삶의 근원이 사랑이라는 걸 
매순간 깨달을 수 있기에 
이젠 종소리가 두렵지 않아

12월 달력은 유난히 빨리 지나간 것 같다. 머지않아 제야에서 새해로의 분수령을 넘게 될 그날을 기다리는 듯. 그 때문인지 시간에 관한 잠언과 유머와 그 내력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이제는 지나온 날보다 남아있는 날들이 더 짧다고 느껴지는 긴장이 수반된 까닭일 것이다.

어쩌면 화살처럼 흐른다는 시간의 속성을 거부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누구나 똑같이 평등하게 예외 없이 받아들여지는 흐름으로 인식 한 것인지도. 그것도 아니라면 연대기적인 현존의 시간, 우리가 모두 하루하루를 똑같이 지내고 보내고 돌아서는 그 시간을 말하는 모양새는 아닐까도 싶고, 또 달리 생각하면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흘러가는 이 시간은 새롭게 규정하는 개념일 것이다. 우리의 모든 시간이 각자 쓰는 사람에 따라서 의미와 가치가 달라지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사람의 의지와 목적에 따라서 속도와 길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러한 사유를 다시 반추하는 데에는 개인적인 사정도 크게 작용한다. 몇 달 전, 안질이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았더니 황반변성이라고 수술을 받지 않으면 실명될 수 있다는 진단에 말문이 막혔다. 함께 간 친구가 옆에서 “거봐, 너무 혹사했잖아”라는 말에 “그깟 수술이 내 삶을 지배하지는 않아!”라는 말을 남기고 병원을 나왔지만 시간의 노예로 살아왔다는 인증이라도 받아야 될 것처럼 결국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실명 위기에 처해서야 몸과 마음은 상반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실 나이가 들면 누구에게나 나타난다는 백내장이나 황반변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드렸던 건, 그만큼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많이 흘러갔음을 명증하는 뜻이었기에 대범한척 능청을 떨었던 것 같다. 하지만 수술을 받고 난 이후로는 마음이 바빠졌다. 뭔가 놓지는 것은 없는지 짚어보고 뒤돌아보면서 시간의 채찍을 휘두르다보니 연말 모임에도 빼놓지 않고 쫓아다니게 되었다. 작년 이맘 때, 이제 송년회는 그만 끝내자고, 내가 먼저 제안을 해놓고는 12월 달력을 넘기면서 은근히 송년회 소식을 기다렸던 것은 시간에 쫓기는 조급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하늘은 회색빛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일을 모르고 사는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몸을 움츠리느냐는 동창회장의 말이 아니어도, 이제는 누구라도 나를 만나겠다고 하면 모두 반길 수 있을 것 같다. 더구나 함께 있으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가족이나 친지, 지인이나 동료들까지 어느 누구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이 내게 커다란 힘을 주고 긍정적인 사고와 풍요를 주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막상 모임에 가보면, 인생이 덧없고 허무하다는 말이 대부분 중요 안건이다. 그래서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하지 않는가.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내 삶을 일장춘몽에 비길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죽을 때까지 내 삶을 잘 지켜내며 열심히 살아왔지만 이제는 더욱 잘살아보려고 애쓰는 중이니까. 20세기 미술의 거장인 피카소는 92세까지 강력한 창조적 에너지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명작들 중 노년에 그린 ‘어항’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어항 속에서 새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날고 있는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을 선호하는 이유도 어항 속에 있는 새의 평화스러움이 사랑으로 반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근원이 사랑이라는 걸 매순간 깨달을 수 있기에, 이제는 제야의 종소리가 두렵지 않을 것 같다. 

[불교신문3450호/2018년12월19일자]

안혜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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