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책 사이에도 궁합이 있는 모양이다. 한 작가가 쓴 책을 읽다보니 자신은 ‘위대한 개츠비’를 재미없게 읽었다는 구절이 눈에 띈다. 사람의 감성이 제각각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세계문학전집에서 ‘이방인’, ‘마담 보바리’와 함께 이 작품을 가장 많이 애독한 나로서는 뭔가 섭섭하지만 말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던 때의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책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질러 들여놓은 삼성출판사판 세계문학전집 50권에 끼어 있었다. 처음엔 몇 번이나 읽으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소설 중반부까지는 개츠비가 밤마다 사람들을 불러들여 요란한 파티만 벌일 뿐, 흥미진진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옛사랑을 되찾겠다는 주류 밀매업자 졸부의 일상만 그려질 뿐이었다. 책의 작은 글씨와 누런 갱지도 독서를 방해하는데 한몫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기어이 이 책을 읽고 말았다. 우와! 다 읽고 나자 절로 탄성이 터졌다. 그 동안의 독서 실패를 보답하듯이 벅찬 감동이 한꺼번에 몸 안으로 밀려왔다. 이 소설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 개츠비가 죽고서부터 살아나기 시작한다. 파티 때마다 부나방처럼 몰려왔던 사람들이, 한때 같이 사업을 했던 동업자가, 그토록 되찾으려했던 옛사랑이 그의 죽음 앞에서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보여주면서, 허위로 가득 찬 이 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십대가 가기 전 나는 몇 번 더 이 책을 읽었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서른이 넘어서도 꾸준히 읽었고 어떤 땐 이 소설의 마지막 단락, 소설이 어떻게 시가 되고 절창이 되는지 보여주는 문장들을 손 편지 쓰듯 일기장에 옮겨보기도 했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되찾으려고 만(灣) 건너편 초록색 불빛을 바라보던 것처럼 나도 저 앞 아른거리는 불빛을 보고 내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생이 대부분 그렇듯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불빛 역시 얄궂게 저만치 멀리 달아나 있다. 소설 속 문장처럼 실은 우리가 뒤로 떠밀려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탄성 대신 탄식만 자주 나오는 이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 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불교신문3450호/2018년12월19일자]

김영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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