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마지막’ 범종장인들…이후 쇠퇴 가속

이만돌 범종 계승한 두 계열 
유사성 보이며 독자성 ‘지녀’
양식 혼란 기술 쇠퇴 ‘가속’
화려한 범종전통 점차 종말 

권동삼 선운사종, 1803년.

이만돌(李万乭)의 범종을 계승한 이만중(李萬重), 권동삼(權東三)과 이만숙(李萬叔), 이영희(李永喜)는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두 계열로 나뉘어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다시 대흥사 종루종(大興寺鐘樓鐘, 1772), 여주 신륵사종(神勒寺鐘, 1773)을 만든 이만숙(李萬叔), 이영산(李永山)과 이영희(李永希), 이영준(李永俊)의 칠장사종(七長寺鐘(1782), 이영희(李永喜)의 망월사종(望月寺鐘, 1786)으로 계승을 이룬다. 

김종득, 김종이, 석천사종, 1832년.

그러나 이씨파라 분류되는 이들이 만든 범종은 양식상 크게 유사한 점이 있기 보다는 각기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지니고 있어 정말 같은 유파로 볼 수 있는 가에 대해서는 보다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이만중(李萬重)은 옥천사 종루종(玉泉寺 鐘樓鐘, 1776), 법주사종(法住寺鐘, 1785)을 만들었던 장인으로서 22년의 활동기간 동안 6점의 범종을 제작하였으며, 활동 초기에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이후 충청도와 전라도로 활동 범위를 넓혔던 주종장으로 파악된다. 

이만중의 범종은 그가 단독으로 활동하던 시기와 백여적(白與<汝>積) 계와 함께 활동한 이후의 시기로 구분된다. 이만중이 단독으로 활동한 시기의 범종은 종신에 횡대를 통해 문양을 구분하는 경향이 일부 보이면서 종신에 범자와 보살상만을 표현하는 단순한 범종을 제작하였다. 이후 백여적과 옥천사종(玉泉寺鐘, 1776) 제작을 함께 제작한 이후에는 상대의 범자문, 보살상 등에 17세기 승장 계열 양식이 표현되는데, 이는 직접적으로 승장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백여적의 범종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만중이 제작한 대표적인 작품인 고성(固城) 옥천사종(玉泉寺鐘)을 보게 되면 크기가 111cm로서 조선 후기 종으로는 대형에 속하는 종이다. 형태나 세부 문양면에서 아직까지 18세기 전반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는 종으로서 불룩히 솟아오른 천판 중앙에는 하나의 몸체로 이어져 서로 반대로 머리를 돌린 쌍용으로 구성된 용뉴가 표현되었다. 

이만숙, 대흥사종, 1772년.

그러나 종의 몸체에 비해 용뉴의 크기가 작은 편이며 ∩형으로 휘어진 고리의 상부에는 뾰족한 돌기가 솟아 있으며 용두의 모습은 몸을 웅크린 들짐승에 가깝게 변화되었다. 천판의 바깥쪽으로는 융기선을 둘렀고 그 아래 붙은 상대에는 2단의 구획을 나누어 조선 후기 범종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원형 테두리 안으로 양각된 범자문을 빙 둘러가며 가득 장식되었다. 상대에서 조금 아래쪽의 4방향에 위치한 방형의 연곽대에는 조밀한 당초문을 시문하고 연곽 내부에는 원형 테두리 안에 꽃문양이 장식된 연좌 가운데 얕게 돌기된 연꽃봉우리를 9개씩 장식하였다. 

이 연곽과 연곽 사이에는 단독의 보살압상을 부조하는 일반적인 조선 후기 범종과 달리 세 구씩의 보살입상을 부조하였는데, 중앙의 보살상은 정면을 향해 합장한 모습이며 그보다 약간 작게 표현된 좌, 우의 보살입상은 모두 몸을 오른쪽으로 튼 채 합장한 자세이다. 대좌는 연화와 구름을 혼합한 듯 양 발은 연화를 밟고 있지만 이 아래로부터 유려한 구름문이 다리 뒤로 굴곡지며 솟아 있다. 종구에서 훨씬 위로 올라와 배치된 하대에는 모란과 연화당초문이 화려하게 시문되었다. 

이처럼 이 옥천사종은 용뉴에서는 중국 종 양식을 반영하고 있으나 연곽과 하대와 같은 전통형 종도 함께 볼 수 있는 점에서 혼합형 종으로 분류된다. 1776년에 옥천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제작자는 이만중(李萬重),과 백여적(白詣適)이 함께 만든 종임을 알 수 있다. 

이만숙 신륵사종, 1773년.

그의 말년에 만든 무주(茂朱)의 안국사종(安國寺鐘, 1788)에서는 처음으로 권동삼(權東三)이란 인물이 등장된다.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은 건륭 53년인 1788년에 안국사 종으로 다시 고쳐 만든 것이며 제작자로는 ‘편수 권동삼 도편수 이만중(片手權東三 都片手李萬重) …’이라 기록되었다. 여기에서 편수로 등장된 권동삼은 보현사명 관음사종(普賢寺銘 觀音寺鐘, 1794), 고창 선운사종(禪雲寺鐘, 1818)의 제작자로 활동한다. 권동삼보다 조금 먼저 활동한 이만중이 도편수로 기록된 것은 결국 이만중의 범종 제작기술을 권동삼이 계승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더 앞선 계급인 ‘도편수’를 뒤로 기록한 이유는 단순한 구분이라기보다 책임자를 뒤로 하여 총괄한 것으로 이해된다. 안국사종은 비록 용뉴가 결실되어 상태가 완전하지 못하지만 조선 후기 18세기 후반의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이만중과 대구와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권동삼이 함께 만든 종이라는 점에서 당시 장인사회의 활동 상황이나 계보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만숙 신륵사종, 1773년.

여기에 다시 이만숙(李萬淑)을 중심으로 이영희(李永熙(喜), 신몽태(申夢泰), 이영길(李永吉) 등으로 계승되는 사장 계열이 활동한다. 이들 계열은 6점의 범종을 제작하였으며, 현존하는 작품 대부분이 경기도에서 제작되어 경기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장인 집단임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대흥사종(大興寺鐘)이 1587년에 제작된 이후 1717년에 1차 개조되고, 이만숙에 의해 1772년에 다시 개조하였음을 명문을 통해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만숙이 현재 알려진 장인들 중 범종 개조를 다루었던 장인 중 가장 이른 주종장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주목을 요한다. 

그리고 이만숙은 이후 신륵사종(神勒寺鐘, 1773)에서 17세기 승장의 영향을 받은 용뉴, 보살상 등을 표현하는 특징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특히 이만숙, 이영산(李永山)이 제작한 대흥사종(1772)과 신륵사종(1773)이 불과 1년의 간격을 둔 작품이면서 전자가 음통과 용뉴, 입상화문대 및 하대를 둔 전통형 종인 반면에 후자가 쌍용의 용뉴와 범자문 상대와 같은 중국종적인 경향을 많이 따른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동일한 제작자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 서로 다른 양식을 구비하고 있다는 점은 18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새로운 경향이라 하겠고 이렇게 볼 때 같은 유파의 작품도 반드시 전대의 경향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후 이만숙의 경향은 신몽태(申夢泰)로 계승되었으나 범자가 작고 하대가 생략되는 등 이만숙과는 다른 단순한 경향의 범종을 제작하였다. 더불어 이영희(喜)의 경우에도 망월사종(望月寺鐘, 1786)에서 신몽태처럼 문양 구성을 비교적 단순하게 처리한 범종을 제작하였으나, 종신의 주 문양으로 국내에서 제작된 범종 중 유일하게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표현한 점이 색다르다.

이영희 망월사종, 1786년.

앞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이만중의 차종장(次鐘匠)으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던 권동삼은 34년의 활동기간 동안 전라도, 강원도, 경상도 등에서 활동하면서 6점의 작품을 제작하였던 주종장이었다. 명문 중에 보이듯 대구(大邱)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가 제작한 작품은 비교적 용뉴의 높이가 길게 표현되거나 종신의 높이에 비해 범자문과 연곽이 크게 표현된 경향을 보인다. 다만 선운사종(禪雲寺鐘, 1803)에서는 비교적 대종으로 제작된 범종임에도 범자, 보살상, 연곽 등이 작게 표현되는 양극화된 경향이 드러난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석천사종(石泉寺鐘, 1832)과 도광17년명(道光17年銘, 1837) 금고를 제작하였던 김종득, 김종이(金鐘得, 金鐘伊) 형제 외에 이렇다 할 사장의 활동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들 형제가 제작한 백천사종(石泉寺鐘)을 살펴보면 원권 범자 원문과 보상화(寶相華) 원문과 같은 새로운 시도가 보이며, 2개의 문양을 가진 하대를 제작한 점을 통해 독창성이 강한 주종장으로 판단된다. 이 외에도 이덕환(李德還)은 남장사종(南長寺鐘, 1839)을 제작한 주종장으로서 쌍룡의 용뉴를 표현하였으나 조각 수법의 수준이 낮으며, 범자, 보살상, 연곽, 연뢰의 경우에도 정확한 문양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기술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 

한편 18세기 범종 부조상으로 가장 널리 제작되었던 제석, 범천형 보살상은 19세기 초의 봉정사종(鳳停寺鐘, 1813)까지 오랜 기간 동안 범종 부조상으로 유행을 이루었다. 그러나 18세기의 중엽을 지나면서 하반신이 생략되거나 약화된 보살입상이 표현되기도 하며 개운사종(開運寺鐘, 1712), 망월사종(望月寺鐘, 1786), 법주사 대웅전종(法住寺 大雄殿鐘, 1804)에는 보살상 대신 각각 사천왕상(四天王像), 금강역사(金剛力士像), 주악보살좌상(奏樂菩薩坐像)을 부조한 독특한 예도 확인된다. 19세기 범종의 부조상은 앞 시기에 비해 도상의 혼란이 일어나 보살상의 유려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며 조선말기의 종은 이마저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19세기 주종장들의 활동을 마지막으로 동화사종(桐華寺鐘), 고운사종(孤雲寺鐘, 1859), 보림사종(寶林寺鐘, 1870)에 보이는 것처럼 양식의 혼란과 주조기술의 쇠퇴는 더욱 가속화 되어 화려했던 한국 범종의 전통은 서서히 종말을 고하게 된다. 

[불교신문3450호/2018년12월19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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