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 화두’가 간화선의 출신활로…‘최고 경지’

 

“부처나 조사들이 전한 禪 
문자 언어에 있는 게 아니다 
문자는 다만 중하근기 위해 
심지 알려주는 방편에 불과”

오롯이 ‘사교입선’ 주장 
‘만법귀일 일귀하처’ 참구
염불은 유심정토·자성미타 
‘자력적인 염불선’ 강조

1348년, 48세의 보우는 귀국해 중흥사에 머물렀다. 도를 더욱 깊이 수행코자 미원(迷源)의 소설산(小雪山, 현 경기도 양평)으로 들어가 4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보림했다. 이때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를 짓기도 했다. 1352년(공민왕 1년) 궁중에서 설법했으며 경룡사(敬龍寺)에 있다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소설산으로 옮겼다. 

1352년 왕의 청으로 봉은사에서 설법하고, 그 해 4월 왕사(王師)로 책봉돼 광명사에 머물렀다. 보우는 왕사로서 광명사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해 9산선문의 통합을 꾀하며 불교의 여러 교단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 보우는 승가의 규율을 강조코자 백장청규 사상을 강조했지만 교단 통합으로의 결실은 이루지 못했다. 보우는 사찰의 주지 임명권과 불교계를 통괄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고의 승직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코 권력에만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수행터인 소설산으로 돌아가 많은 제자들을 지도했고, 간화선의 체계를 정립했다. 

1359년(공민왕 8년)에 신돈이 정치계에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신돈은 공민왕과 밀착돼 국정 전반에 걸쳐 정치 일선에 나섰다. 1362년 보우는 희양산 봉암사에 머물렀고, 다시 1363년 가지산 보림사로 옮겼다. 보우는 신돈을 경계하는 글을 올리고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가서 머물렀다. 1368년 신돈은 보우가 갖고 있던 사찰 임명권이나 불교계를 통괄하는 일을 도맡았다. 공민왕이 신돈과 점차 밀착 관계를 이루면서 신돈의 모함으로 보우는 속리산에 금고됐다. 

이듬해 신돈이 죽임을 당하고, 공민왕은 보우의 고향인 홍주(洪州)를 목(牧)으로, 모친의 고향인 익화현(益和縣)을 양근군(楊根郡)으로 승격시키고, 그를 왕사로 책봉했다. 공민왕은 보우를 영원사의 주지로 임명했지만 보우가 사양했다. 이에 왕은 보우로 하여금 소설산에 있으면서 영원사에 머물 것을 청했다. 1381년, 보우는 양산사(陽山寺)로 옮겼으나 우왕이 다시 국사로 봉했다. 1382년, 82세의 보우는 소설산으로 돌아가서 ‘사람의 목숨이란 물거품처럼 공허한 것, 80여년이 꿈속에서 지나갔네. 임종하는 오늘, 이 몸 버리니 둥근 해가 서봉에 지네’라는 임종게를 설하고 입적했다. 법랍 69세, 세수 82세였다.

 네 가지 면모 

원증국사탑. 태고보우스님이 오랜 기간 머물렀던 고양 중흥사 태고암에 있다.

보우의 선사상은 오롯이 간화선 지향이지만, 대략 법어를 통해 보우의 사상적 면모를 보자. 첫째, 사교입선(捨敎入禪)적인 측면이다. 지눌이 선교일치를 주장했던 반면, 보우는 오롯이 선만을 강조했다. <태고록> ‘의선인(宜禪人)에게 내린 법어’에 이런 내용이 있다. “부처나 조사들이 전한 묘한 선(禪)은 경전 같은 문자나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전의 문자는 다만 중하근기를 위해 심지를 가르쳐 주는 방편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것들을 버리고 오직 단 하나의 화두만을 참구하며, 소득이 있으면 조사를 찾아가 확인을 받으라.” 또한 공부에 진척이 없다면 선지식을 찾아가 확인을 받아야 하며, 화두를 참구하는 과정에서 어떤 알음알이(知解)도 용납치 말라고 했다. 

둘째, 염불에서는 유심정토(唯心淨土), 자성미타(自性彌陀) 등 자력적인 염불선을 강조했다. 혜근은 염불에서는 타력과 자력적인 면을 강조하나 보우는 자력적인 면만 강조했다. 

셋째, 간화선을 지향했는데, 오로지 화두 챙길 것을 강조했다. 보우가 강조한 몇 화두를 보자. ①보우는 ‘조주의 무(無)자’ 화두 참구를 강조했다. 보우는 무자 화두가 간화선 수행 중에 최고이며, 이 무자 화두가 간화선의 출신활로이며, 선이 지향하는 유일한 길이자 최고의 경지라고 강조했다. ②보우는 19세부터 ‘만법귀일 일귀하처’ 화두를 혼자서 참구했다. 보우는 만법귀일을 강조하면서 다음 법어를 내릴 정도였다. “그 하나는 곧 일물에 해당하며 일물은 곧 만법이며, 만법이 곧 일물이다. 이러한 만법과 일물을 중도관으로 관하는 만법귀일의 화두는 곧 일물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③<태고화상 어록>에 담긴 몇 선시 및 법어를 보자.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은 파괴되어 없어지는데, 그 파괴되어 없어진 것은 어느 곳에 존재하는가?”, “놓아라! 망상하지 말라! 이것이 여래의 대원각이다. 하나 속에 일체이고 일체 속에 하나, 하나도 없는 데서 항상 또렷하네.”

고양 삼각산 중흥사 동쪽 태고암에 있는 ‘원증국사비'.

 보조 지눌 그리고 신돈과는… 

보우와 지눌은 우리나라 선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다. 하지만 두 선사는 법맥, 선교(禪敎)관 등에서 다소 차이를 볼 수 있다. <표 참조> 

보우와 신돈은 영원한 평행선에 서 있다. 당시 같은 세대의 인물로 신돈과 보우는 원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신돈은 역사상 ‘요괴’라는 이미지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편! 신돈에 대해 재해석해 평가하다보면, 자연적으로 보우에 대한 평가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우는 결코 평가 절하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단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기로 하자. <표 참조> 

공민왕은 어린 시절을 원나라에서 보냈고, 원에서 정략 결혼한 노국공주가 고려로 돌아왔다. 이 공주가 아기를 해산하다 죽자, 공민왕은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정사에 관여치 않았다. 이때 등장한 승려가 편조(遍照)인데, 바로 신돈辛旽(?˜1371년)이다. 신돈은 무인 김원명의 추천으로 기용돼 공민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신돈은 1365년(공민왕 14년) 공민왕으로부터 진평후(眞平侯)라는 봉작을 받아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곧 외부로는 공민왕을 도와 반원(反元) 세력을 키워나갔고 내부적으로는 혼탁한 사회적 폐단을 타개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당시는 보수 세력인 권문세족과 진보적인 사대부로 나누어져 있었다. 권문세족은 불법으로 대농장과 토지, 노비 등을 소유했다. 이에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라는 토지개혁 관청을 두어, 당시 귀족이었던 권문세족들이 양민들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각 소유자들에게 돌려주었다. 또한 노비로서 자유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양인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었다. 국가재정을 관리하며, 서민 편에 섰던 신돈은 민중이나 노비들에게는 인심을 얻은 반면, 권문세족들과 사대부들의 질시와 미움을 한 몸에 받았다. 결국 이제현, 이색 등 유학자와 권문세족들의 반발로 반역죄라는 죄명을 쓰고 죽음을 당했다. 신돈이 죽은 뒤 3년 만에 공민왕 또한 서거해 자주 회복이 좌절됐고 고려는 망하게 된다. 한편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은 신돈의 아들이라는 설로 죽임을 당했다. 신돈의 집권기간이 6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기간에 추진된 개혁을 통해 다음 시대를 이끌어 갈 신진 사대부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양평 사나사 ‘원증국사 석종비'.

[불교신문3449호/2018년12월15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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