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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사자후] <36> 용화선원 조실 전강스님 - 1975년 1월5일자 ‘금주의 법문’“타성일편(打成一片) 경계 오면 반드시 무명이 터진다"

‘구참납자도 망상경계를
이기지 못하지만 나는
용맹스럽게 뛰어나리라’

다른 이가 안 닦을수록
더욱 굳게 다짐하고
뼈아프게 경책해야 한다

이렇게 주야로 쉬지 않고 
애를 쓰면 화두에 의심이
점점 익어서 내외가 오직
의심 하나뿐인 경계가…

16세에 합천 해인사에서 출가한 스님은 23세에 깨달음을 성취해 오도송을 노래했다. 당시 6대 선지식으로 존경받고 있던 혜월·만공·한암·보월·용성·혜봉스님에게 인가를 받고 25세 되던 해에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었다.

인간(人間)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귀와 공명을 누리면 천만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니 좋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토끼뿔처럼 허망하고 무상(無常)한 것이다. 자금색상(紫金色相)으로 된 보물(寶物)을 얻어서 천하에 제일가는 부귀공명을 성취(成就)했더라도 그것은 아침이슬처럼 찰라 간에 없어져 버린다. 천상에 있는 보물도 허망한 것이요, 지하에 있는 보물도 허망한 것이요, 내지 비비상천(非非上天)에 있는 보물이라 할지라도 개시유위법(皆是有爲法)이요, 생멸법(生滅法)이다. 그러나 일심진여법계(一心眞如法界)는 불회생 불회멸(不會生 不會滅)이라, 영생불멸(永生不滅)의 보배는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을 깨달으면 일조(一朝)에 인생문제가 해결되고 영원히 타락 없는 생사해탈경(生死解脫境)에 자유자재(自由自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이란 무엇인가? 밥 먹고 옷 입고 가고 오는 주인공(主人公)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하는 주인공이 곧 마음이요, 이 마음을 찾는 공부가 참선법(參禪法)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자기자신의 마음을 찾는 참선법 - 이 법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지만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는 것이기에 어리석은 자는 믿지를 못한다. 믿지 못하는 자는 어쩔 수 없이 상견법(相見法 )에 처박혀서 죄(罪)만 짓지 별도리가 없다. 

역사(歷史) 없는 다겁생전(多劫生前)부터 오늘까지 미계(迷界)에서 윤회(輪廻)하며 지어놓은 살도음망(殺盜淫妄) 오역중죄(五逆重罪)뿐인 중생들이 어찌 쉽게 이 위없는 대도법(大道法)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한 지혜장부(智慧丈夫)가 있어서 문득 이 법을 듣고 일념(一念)으로서 알록달록한 세상에 미련과 아만심과 시비심을 일시에 놓아 버리고 이 해탈법(解脫法)에 신심(信心)만 견고(堅固)히 가진다면 능히 상근대지(上根大智)라 해도 좋은 것이다. 

초발심시(初發心時)에 문득 정각(正覺)을 이룬다 했으니 어찌 성불 못했음을 한탄할 것인가! 

무상한 세상에 태어나서 영존진리(永存眞理)를 한바탕 참구(參究)하는 것이 일생을 현명(賢命)하게 산다는 것이라고 하리라. 인생다운 인생은 오직 선방에서 참선하는 것뿐이다. 

부모처자(父母妻子) 부귀관리(富貴權利)에 애착(愛着)하지 않을 만큼 여여부동(如如不動)한 근기(根機)만 있다면 세속(世俗)에서도 능히 참선을 할 수가 있다. 

산같이 많은 재보(財寶)를 가만히 두고 거기에 조금도 물들지 않고도 충분히 수도(修道)할 수 있는 것이 참선법이나, 깨끗이 끊고 여의는 단견상(斷見相)은 못쓸 생각이다. 밥 먹고 옷 입으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참선이니 가족집안 여일 것 없이 꽃피고 새우는 곳에서도 한바탕 닦을 것이다. 부모와 처자의 애착을 여의고 출가수도(出家修道)함은 하근중생(下根衆生)의 어쩔 수 없는 공부길이요, 사업하고 생활하면서도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은 근기가 수승(秀勝)한 사람이다. 

출가하든지 재가하든지 그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나, 다만 생사의 문제가 크니 급히 스승을 찾아 정법을 채택하고 용맹스럽게 공부할 것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 눈을 크게 뜨지도 말고 아주 감지도 말고 코끝이 보일락 말락 적당히 뜨고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게 척량골(脊梁骨)을 세우고 앉아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라. 

삼라만상(森羅萬象) 산하대지(山河大地)의 주인공이요 상주천하주지(上柱天下住地)하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이뭣고?’ 망상과 무기와 혼침과 산란을 한 칼로 양단하고 화두(話頭)를 의심하라. 여기에는 오직 알 수 없는 의심하나뿐이요, 모양도 빛깔도 없다. 상견(相見)과 사견(邪見)을 구(求)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정택수저(淨澤水底)에 달 그림자가 현저하듯 본참화두만 깨끗이 깨끗이 거각하라. 

생사해탈법(生死解脫法)! 

이런 희유한 법이 있는 줄을 확실(確實)히 믿었을 진데 누가 뜬구름 같은 부귀공명에 다시 뜻을 둘 것인가?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하는 참선법에서 퇴전(退轉)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몸뚱이는 아홉 구멍에서 더러운 것만 흘러나오니 똥푸대같이 추하고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없어지기도 하니 마치 번개처럼 허망한 것인데 이것을 믿고 참선을 안 한단 말인가? 

그러나 허망(虛妄)하고 무상(無常)한 이 몸을 의지하지 아니하면 도저히 생사해탈대도를 증득(證得)할 수가 없다. 

몸뚱이 없는 중음신이라 자유가 하나도 없고 전부(全部) 망(妄)속에서만 놀아나는 것이다. 꿈속의 나를 생각해보라. 어디에 실체(實體)가 있고 실해(實解)가 있는가. 실체실해가 하나도 없는 몽신(夢身)처럼 영혼도 업장에 끌려 다니면서 괴로움만 받는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몸을 얻으면 법문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수도를 못한다. 고래같이 몸뚱이가 큰 놈도 제 목숨을 아껴서 먹을 줄도 알지만 지혜가 없어 미취(迷趣)에 빠졌기 때문에 법문을 듣지 못한다. 준동함령(蠢動含靈)도 근본성품 자체는 똑같아서 이호(釐毫)의 차별도 없다. 그러나 사신 비신으로는 도저히 도를 못 닦는 법, 오직 천지만물 중에 인간의 몸을 얻어야만 도를 닦을 수 있는 법이다. 

아무리 허망하고 무상한 이 몸이지만, 이 몸을 얻지 못하면 도를 못 닦는 법이니 이 몸이 이만큼 건강할 때 속히 닦아야 할 것이다. 닦기 어렵다 미루고, 망상내고 방일하다가 홀연히 인신(人身)을 실각(失却)하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할 것인가. 금생에 속불혜명(續佛慧命)할 것을 철저히 결심하고 해태심을 꾸짖으며 용맹스럽게 공부해야지 발심 못한 자가 공부하는 것을 보고 비방이나 하면서 물러가서야 되겠는가. 

“구참납자(舊參衲子)도 망상경계를 이기지 못하지만 나는 용맹스럽게 뛰어나리라”하고 다른 이가 안 닦을수록 더욱 굳게 다짐하고 뼈아프게 경책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주야로 불식(不息)하고 오래오래 애를 쓰면 화두(話頭)에 의심이 점점 익어서 내외가 오직 의심 하나뿐인 경계가 필경 온다.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다. 왜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닌가? 

오직 의심일념(疑心一念)이 독로(獨露)되었기 때문이다. 차(茶)를 마시고 밥을 먹어도 의심일념만 독로되었기 때문에 먹는지 마는지 분간할 줄도 모른다. 이와 같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의 경계만 오면 반드시 무명이 터진다. 알 수 없는 공안이 꽉 막혀다가 툭 터지면 일시에 백천삼매(百千三昧)와 무량묘의(無量妙意)가 갖추어져 버린다. 이리 듣고 저리 눈치 채서 알려고 하면 귀신굴을 장만하는 것이니 부디 공안상(公案上)에서 상량(商量)함을 삼가할 지어다. 

생사(生死)는 대사(大事)하고 무상(無常)이 신속하여 일념이 어긋나면 만겁(萬劫)을 어기리니 힘쓰고 힘쓸지어다. 

誰知王舍一輪月 

萬古光名將不滅  

“나 오늘 가겠다” 법문-점심공양 후 입적 

1975년 신년호인 586호(1월5일자)에 전강스님의 법문이 실린지 1주일이 지난 1월13일 스님이 입적했다. 입적 기사는 588호(1월19일) 1면과 3면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입적 당시 상황이 3면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국의 법통을 이은 전강대선사가 이 땅을 떠난 13일 용화사에는 사십구재의 초재가 있었다. 조실 전강스님은 11시부터 상단법문을 시작하여 12시에 법문을 마쳤다. 스님의 법문이 끝나고 재도 끝난 뒤 대중은 요사채로 내려가 있었다. 점심 공양을 마친 스님은 마당을 몇 바퀴 경행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정진할 때 앉는 의자에 앉은 스님은 “나 오늘 가야겠다”하고 옆에 있는 시봉들을 둘러보았다. 시봉들은 스님이 장난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스님의 기운이 약해져가는 것을 본 정해(正海)스님은 황망히 “한 말씀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하고 법을 청했다. 이때가 2시5분 전 스님은 대중을 운집케 하고 임종법문을 했다. 

“여하시 생사고(如何是 生死苦)인고?” 자문한 스님은 이어 “억-”하고 크게 할(喝)을 했다. 다시 이어서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飜成八十一)이니라”하고 말을 마친 스님은 더욱 기운이 없는 듯 보이더니 10분 후 앉은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대중이 앞으로 나아가 보니 스님의 호흡은 이미 그쳐졌고 심장의 고동도 멎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한국의 대선지식 전강 조실 스님은 금생의 학자 제접과 미혹 대중의 교화사업을 마쳤다. 이때 시간이 2시15분이었다. 

[불교신문3449호/2018년12월15일자]

정리=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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