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신영 연구원 “천룡산석굴과 차이”

서기 560년부터 개착(開鑿)된 것으로 보이는 천룡산 석굴의 최근 모습.

한국미술사연구소 학술대회 발표
굴실 표현 시대 장소에 따라 변화

중국 고대 건축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는 천룡산석굴(天龍山石窟)과 신라시대 원효스님이 수행한 혈사(穴寺)로 알려진 경주 골굴석굴(骨窟石窟)의 건축을 비교한 논문이 발표됐다.

손신영 한국미술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지난 8일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 제1강의실에서 ‘골굴석굴과 중국석굴’이란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두 석굴을 건축을 조명한 연구결과를 선보였다. 이날 학술대회는 사단법인 한국미술사연구소와 한국불교미술사학회가 주최했다.

손신영 연구원은 ‘천룡산석굴과 골굴석굴의 건축’이란 주제발표에서 “천룡산석굴은 중국 석굴 중에서도 당대(當代) 목조 건축이 잘 표현된 사례”라면서 “특히 굴실 정면의 처마와 공포 및 기둥이 입체적으로 조각돼 주목돼 왔다”고 밝혔다. 이어 “굴실 정면의 목조가구가 실제 구조와 비례에 맞게 조각됐다”고 지적했다.

중국 산서성 태원 서남쪽 해발 1430m에 자리한 천룡산석굴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조각상으로 유명하다. <가정태원현지(嘉靖太原縣志)>의 “북제(北齊) 황건(皇建) 원년(560년) 천룡사에 석실(石室)을 세워, 24감(龕)과 석불 4존이 조성됐다”는 기록에 근거하면 서기 560년부터 천룡산석굴이 개착(開鑿)된 것으로 보인다.

천룡산석굴과 달리 골굴석굴은 목조건축을 암벽 면에 조각하는 대신 목조가구를 가설(架設)했을 가능성이 크다. 골굴석굴 자료는 조선 후기 여행기나 회화식 지도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이다. 창건이후부터 조선후기에 이르는 900여 년간의 모습은 확인이 어려운 현실이다. 다만 조선후기까지 불사(佛寺)나 수도처(修道處)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손신영 연구원 입장이다.

권위(權暐,1552~1630)의 <옥봉집(玉峯集)>,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우담집(愚潭集)> 등 10명의 문인이 남긴 글을 통해 골굴석굴의 당시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홍세태(洪世泰, 1653~1725)는 <유하집(柳下集)>의 ‘골굴(骨窟)’에서 당시 모습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새기고 그린 수많은 기이한 형상, 중간에 오묘한 굴이 크게 열렸네… 처마 얹어 빈 하늘에 잇닿았도다. 각 방면의 형세에 기대어 여섯 개 선방으로 나눠 만드니…”

손신영 연구원은 “암벽 면을 파내 형성된 굴실 가운데 6곳에 처마와 벽체를 만들고 문을 달아 출입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애초 조성 당시 암벽 면에 부조되지 못했거나, 혹 목조가구가 부조됐더라도 풍화작용으로 마모되고, 굴실 내부 공간 활용을 위해 목조가구를 가설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손신영 연구원은 “예불과 수도를 위해 마련된 석굴사원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역할에 큰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다만 굴실의 표현에 있어서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손신영 연구원

한편 이날 학술대회는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의 ‘골굴석굴과 운강석굴 제6굴’이란 기조발표에 이어 △용문석굴 구양동과 골굴석굴(이분희 불교중앙박물관 학예실장) △공현석굴 1굴과 골굴석굴(주수완 고려대 전 교수) △북향당산석굴북대굴과 골굴석굴(강삼혜 국립춘천박물관 학예연구사) 등의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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