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겨울 고향에 작은 밭을 샀다. 밭가에는 큰 호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와 높이가 하늘을 가릴 듯 우람스러웠다. 그동안 아무도 관리를 안 한 탓에 매년 호두나무의 열매는 청설모 차지라고 했다. 이제 주인이 바뀌었으니 열매를 따려면 청설모네 식구들이 새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할 텐데 큰일이라며 이장님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곧 동화 한 편을 썼다.

아픈 엄마 때문에 억지로 시골로 이사 온 솔이. 시골은 재미없고 지루하기만 한데 어느 날 검은 꼬리를 단 아이가 나타나 둘은 신나게 논다. 눈이 오는 겨울 밤 누가 노크를 한다. 아무리 깨워도 엄마아빠는 일어나지 않고 솔이는 천천히 현관문을 연다. 문 앞에는 앞치마를 두른 청설모 엄마가 서 있다. “안녕하세요. 우리 애가 그러는데 새 친구가 이사 왔다고 해서 인사하러 왔어요. 이건 작년에 딴 호두에요. 맛 좀 보시라고요.”하고 청설모 엄마는 솔이 손에 호두를 건넨다. 그리고 뒤뚱뒤뚱 걸어 눈 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내용이다. 이 동화를 쓰며 나는 호두나무 열매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청설모 영역을 침범한 것임을 분명히 자각했다. 단순히 그 땅을 샀다고 모든 소유권이 나한테 있다는 것은 그저 우리들 사람의 해석일 뿐이었다.

지난 달 아들과 함께 고향에 내려가 가을걷이를 했다. 사과와 감을 따고, 대추를 터는 큰일들이 끝나자 소일처럼 밤을 주웠다. 힘들다며 투덜대는 어린 아들은 아래 밭에서 놀게 하고 나는 산 중턱 밤나무까지 올라갔다. 매서운 가시투성이 밤송이를 벌리니 윤기 흐르는 굵은 밤이 들어 있었다. 하나씩 주워 주머니에 넣으며 자연이 주는 이 위대한 결실에 또 숙연해져 나는 속으로 자꾸만 ‘부처님, 고맙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 한참 밤을 줍는데 위쪽 바위에서 언 듯 뭔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 들어 보니 아기 다람쥐였다. 이 녀석은 도망가지도 않고 요리 갔다 조리 갔다만 했다. 이내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가더니 또 이쪽에서 저쪽 나무로 옮겨갔다. 그러면서도 계속 내가 하는 양을 고개 들어 살폈다. 지켜보는 눈이 있으니 나는 밤 줍는 일이 마치 도둑질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개를 들고 다람쥐에게 말했다. “너 그만 좀 봐.” 그래도 다람쥐는 바위에서 가만히 나를 보았다. 이윽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다람쥐야, 미안. 조금만 나눠먹자. 봐봐, 나 몇 개 안 주웠어.” 아래 밭에서는 아들이 계속 소리쳤다. 도대체 엄마는 누구하고 말 하냐고.

[불교신문3448호/2018년12월12일자]

전은숙 동화작가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