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원자의 마음 고스란히 담긴 그림으로 읽는 경전

 

공덕을 쌓는 방편인 ‘사경’
고려는 국가서 사경원 운영
조선 사실상 중단 판경 대체

감지에 금은니로 그린 변상도 
조선시대 들어 전통 거의 단절

‘대보적경 권32 변상도’, 1006년, 감지금니, 일본 문화청 소장.

얼마 전 충남 예산 수덕사 무이당에 봉안된 소조(塑造)여래좌상 내부에서 고려시대~조선 초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희귀불경들이 다수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한 바 있다. 불상 안에서는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 등의 경전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자비도량참법은 목판본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쓴 사경(寫經)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사경(寫經)이란 말 그대로 ‘글로 쓴 경전’을 말한다. 목판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경전을 모두 베껴 쓸 수밖에 없었으므로 일찍부터 사경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목판술이 발달함에 따라 경전은 활자로 찍어 인쇄하는 판경(板經)으로 대체되었다. 경전을 베껴 쓰는 것은 공덕을 쌓는 방편이었기에, 사경은 최고급종이인 감지(紺地, 닥종이에 푸른색으로 물들인 종이)에 금니(金泥)와 은니(銀泥)같은 귀한 재료를 사용하여 호화롭게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금니를 사용한 화려한 사경들이 조성되었으며, 특히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으로 사경원(寫經院)을 둘 정도로 사경 제작이 성행하여 국왕을 비롯한 권문세가, 귀족들에 의해 제작된 초호화판 사경들이 많이 남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면 사경의 제작은 거의 중단되고 인쇄된 판경(版經)으로 대치됨에 따라 사경의 전통은 거의 사라져갔다.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 754~755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러한 사경의 앞부분에는 경전의 내용을 압축,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런 그림을 변상도(變相圖)라고 하는데, 변상도는 서사한 경전의 내용을 압축하여 앞부분에 그리거나 모든 장마다 경전의 내용을 요약하여 그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경전을 수호하는 신장상(神將像) 만을 그리기도 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경변상도는 754년~755년에 제작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사경변상도(국보 제196호)이다. 이 변상도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불화이자 최고(最高)의 사경변상도로, 황룡사 승려인 연기법사(緣起法師)가 발원, 조성하였다. 중국 당나라 때의 승려 실차난타(實叉難陀, 652~710)가 번역한 <신역화엄경(新譯華嚴經, 80권본)> 내용을 서사한 후 자색(紫色)의 닥종이에 금니로 은니로 그렸는데, 현재는 1권~10권 1축과 44권~50권 1축 만이 남아있다. 1권 앞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과 신장상(神將像)이 그려진 표지가 있고 표지 뒷면에는 비로자나불과 보현보살을 비롯한 여러 보살들을 그린 경변상도가 있으며, 10권 끝에 발문(跋文)이 붙어있다. 

이곳에 그려진 그림들은 호화로우면서도 정교한 묘선, 풍만하면서도 균형이 잡힌 인물의 모습 등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 불교회화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이 시기 불교회화가 당나라의 불교미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변상도의 끝에 첨부된 14줄의 조성기에는 사경의 제작연대와 연유, 종이 만드는 과정, 사경 만드는 의식, 경을 만드는 공덕,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의 출신지 등이 기록되어 있어 사경제작을 둘러싼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수준 높은 뛰어난 사경 변상도가 제작된 시기는 역시 고려시대이다.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왕실에 의한 대장경(大藏經)의 사경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1281년에는 충렬왕대의 고관인 염승익(廉承益)의 저택에 금자사경소(金字寫經所)가 설치되는 등 왕실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사경을 조성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현재 국내를 비롯하여 일본 등지에는 고려사경의 변상도가 다수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1006년의 <대보적경(大寶積經)> 사경변상도이다. 일본 문화청에 소장되어 있는 이 변상도는 목종(997~1009)의 어머니인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씨(皇甫氏)가 외척인 김치양(金致陽)과 함께 발원하여 제작한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 변상도로서, 표지에는 은니(銀泥)의 보상화문이 유려한 필치로 그려져 있고 그 안쪽에는 세 보살이 산화공양(散花供養)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묘법연화경 권1변상도’, 1415년, 부안 내소사 소장(국립전주박물관 보관).

정면을 향해 거의 같은 간격으로 나란히 서있는 세 보살 중 중앙의 보살은 정면을 향해 오른손으로는 꽃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가슴에 받쳐 들고 왼손으로 꽃을 뿌리고 있으며, 좌우의 두 보살은 중앙을 향해 꽃을 뿌리고 있다. 균형이 잡힌 늘씬한 체구에 둥글고 풍만한 얼굴, 작은 이목구비의 보살들은 통일신라 미술의 사실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초기의 불상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고려 후반기도 왕실에 의한 대장경의 사경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려후기 왕실에 의해 제작된 사경은 충렬왕이 발원한 <감지은자불공견삭신변진언경(紺地銀字不空索神變眞言經, 1275년), <감지은자문수사리문보리경(紺地銀字文殊舍利問菩提經, 1276년), <감지은자보살선계경(紺地銀字菩薩善戒經, 1280년) 등을 비롯하여 충렬왕의 왕비인 원(元) 원성왕후에 의해 발원된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 1288년), 염승익이 발원한 <감지은니묘법연화경(紺紙銀泥妙法蓮華經, 1283년 이전> 등이 다. 

이 가운데 <불공견삭신변진언경>과 <문수사리문보리경>, 염승익 발원 <묘법연화경> 등에는 경전의 앞머리에 유려한 필치의 신장상이 그려져 있다. 우락부락한 얼굴과 험상궂은 표정, 불거져 나온 근육 등 화염에 둘러싸인 신장의 양 어깨와 팔을 따라 흘러내리는 천의자락의 동적이며 활기찬 모습, 배를 약간 내밀고 고개를 돌린 신장의 생동감 있는 자세 등에서 화가의 능숙한 필력이 돋보인다. 아마도 화원소속의 화가가 사경소(寫經所)에 파견되어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이외에도 <법화경>과 <화엄경>의 사경변상도가 다수 제작되어, 현재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2변상도(고려,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백지묵서묘법연화경> 변상도(1377년, 국보 211호, 호림박물관 소장),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5변상도(1400~1404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 법화경변상도와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권31변상도(고려, 국보 215호, 호암미술관 소장),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권56변상도(고려, 보물 755호, 호림박물관 소장) 등 화엄경변상도가 전하고 있다. 

변상도는 감지에 금니(金泥)나 은니(銀泥)로 그려진 것이 많다. 매권 책머리에 1매의 변상을 그리고 그 권수에 해당하는 경문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였으며, 그림의 우측에는 먼저 경의 제목과 권수를 밝히고 좌측에 경문의 내용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시행한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하여 사경 제작 역시 급격하게 감소되었고, 이에 따라 고려시대 이래의 사경 및 사경변상도의 전통은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내소사사경(來蘇寺寫經, 보물 278호)과 같이 고려사경의 전통을 계승한 사경이 제작되기도 했다. 내소사 사경은 1415년(태종 15)에 이씨 부인이 남편 유근(柳謹)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제작한 <묘법연화경> 필사본으로, 모두 7권 7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지는 짙은 푸른색이 감도는 감지(紺地)에 금니로 외곽을 두르고 내부에 4매의 연화문을 배치한 후 그 안에 ‘묘법연화경 권제1’ 등의 서명을 쓰고, 이어 흰 바탕에 묵서(墨書)로 법화경의 본문을 필사하였다. 

‘불공견색신변진언경 변상도’, 1275년, 개인 소장.

각권마다 2절 4면에 걸쳐 금강저(金剛杵)로 외곽을 두른 후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부처님과 권속들을 섬세한 정교한 필선과 능숙한 솜씨로 그려낸 변상도가 그려져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씨 부인이 죽은 남편 유근의 복을 빌기 위하여 글 한자 쓰고 절 한번 하는 일자일배(一字一拜)의 정성으로 써서 공양했는데, 사경이 끝나자 죽은 남편이 나타나 부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는 애틋한 전설이 전해온다. 

정교한 필치와 찬란한 금니, 치밀한 구도 등으로 불경의 광대무변한 세계를 그려내는 사경변상도는 어떠한 불교회화보다도 뛰어난 작품이자 공덕을 쌓는 마음으로 한자 한자 정성스레 사서하고 그렸다는 점에서 서사자(書寫者)와 화원, 및 발원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화려한 채색이 아닌 한 가지 색 만으로 그려낸 변상도, 그야말로 화가의 필치가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작품이자 그림으로 읽는 불경이 아닐까. 

[불교신문3448호/2018년12월12일자]

김정희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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