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위해 역사의 진실을 교육한 것이 잘못이냐”

1943년 1월 고경스님이 입적한 창성여관이 있던 ‘합천동 574’ 주변. 골목 끝이 스님 재적 등본의 입적 장소로 기재된 ‘합천동 556-2’이다.

치안유지법 위반 강제 연행
모진 고문 받고 여관서 입적
종성스님, 유족 나서 ‘선양’
2011년 뒤늦게 유공자 인정

“민족을 위해 역사의 진실을 교육한 것이 잘못이냐” 1943년 1월 21일(또는 1월10일) 삭풍(朔風)이 부는 날이었다. 합천군 합천면(지금의 합천읍)에 자리한 창성여관(昌成旅館)의 허름한 방에 누워 있던 해인사 주지 고경(古鏡) 스님이 이 말만 되풀이 했다. 해인사 스님들에게 항일 의식을 갖도록 했다는 이유로 일경(日警)에 강제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난 직후였다. 얼마나 심한 고초를 겪었는지 스님의 몸은 해인사로 돌아갈 상황이 되지 못했다. 경찰서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창성여관에서 생명의 불꽃이 사그러 들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11월 14일. 합천군 합천읍을 찾았다. 스님이 고문을 당한 경찰서와 입적한 창성여관을 탐문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합천경찰서와 창성여관의 위치를 제대로 기억하는 주민을 만나긴 어려웠다. “창성여관이에. 그게 어딘교.” “잘 모르겠심더. 지금 경찰서는 옮긴 것인데….”

합천문화원에서 만난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에게 신통한 답을 듣지 못하고 찾아간 곳은 합천읍사무소였다. 방문 이유를 설명하자 뜻밖의 답을 얻었다. “바로 이곳이 예전에 경찰서가 있던 곳입니더.” 일제강점기 합천경찰서는 지금의 합천읍사무소에 있었다는 것이다. 스님이 돌아가신 창성여관의 현재 위치는 1936년 발간된 <합천군지(陜川郡誌)>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합천군지 인쇄겸 발행소가 ‘창성여관’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주소가 ‘합천동(洞) 574’로 기록되어 있었다.

고경스님이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던 합천경찰서. 지금은 합천읍사무소이다.

읍사무소 직원이 출력해준 자료(지적도)를 갖고 ‘합천동 574번지’를 찾아 나섰다. 옛 경찰서가 있었던 읍사무소에서 불과 200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합천동은 합천리(里)로 바뀌었다. 스님이 입적한 창성여관 주소지는 길로 바뀌어 있었다. 인근에서 만난 한 주민은 “예전에 건물이 있었는데, 길이 생기면서 사라졌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사라진 건물이 창성여관인지는 모르겠고 덧붙였다. 하지만 스님의 재적등본에는 입적 장소가 ‘합천동 556-2’로 되어 있다. ‘합천동 574번지’와는 불과 30여 미터 거리이다.

고경스님이 경찰서로 연행된 것은 1942년 11월 경이었다. 세속 나이가 이순(耳順)을 넘겼을 때였다.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를 댔다. 4~5명의 해인사 스님들이 함께 구금됐다. 사실은 친일승려인 변설호(卞雪醐)가 밀고했던 것이다.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당시 함께 투옥됐던 민동선(閔東宣) 스님은 훗날 참혹했던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한바 있다. “한 번 질문한 뒤에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면 최소한 열 번은 마구 때렸습니다. 물고문은 물론 심지어 불고문까지 했습니다. 완전히 귀축(鬼畜, 아귀와 축생, 야만적이고 잔인한 짓)의 세계요, 인간 상실의 세계였습니다.”

해인사 홍제암의 사명대사비. 일본인 합천경찰서장이 동강을 낸 흔적이 생생하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합천경찰서장 다케우라(竹浦)가 해인사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泗溟大師)의 비를 동강내면서 반일(反日) 분위기 고조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僧兵)을 일으키며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 왜군(倭軍)을 물리친 사명대사를 기념하는 비석을 훼손하면서 스님과 주민들 사이에서는 반일(反日) 분위기가 더욱 확산됐다. 홍제암 안내판에는 1943년 일본인 합천경찰서장이 사명대사비를 파손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파손시기에 대해선 재확인이 필요하다.

경찰서에서 몸이 상할 정도로 고문을 받았지만 고경스님은 일경들이 원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피를 쏟았다. 한겨울 추위에 스님의 몸은 더욱 상했다. 목숨을 잃을 상황에 도달하자, 일경은 서둘러 스님을 경찰서 밖으로 내보냈다. 치료는 고사하고 사실상 내동댕이 친 것이다. 창성여관의 구석진 방으로 옮긴 스님은 일주일 만에 입적하고 말았다. 돌아가실 때는 병석에서 일어나 가부좌를 했다고 전해진다.

고경스님의 다비는 합천 읍내에 있는 연호사에서 치렀다고 한다. 스님의 유족인 이용수 옹 지난 2011년 <불교신문>에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합천읍에서 진주 쪽으로 가는 남진교 오른쪽에 있는 연호사에서 종조부(從祖父, 할아버지의 형이나 아우)를 화장했습니다. 한겨울 섣달이었기에 강바람이 무섭게 몰아쳤고, 진눈깨비가 날렸습니다. 장작불 불똥이 마른나무에 옮겨 붙어 산불이 날뻔했습니다.”

고경스님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것은 이때만이 아니다. 1924년 합천경찰서 정보부장인 일본인이 해인사 대적광전에 군화를 신은 채 들어가는 작태를 벌였다. 소식을 전해들은 고경스님은 젊은 스님들로 하여금 정보부장을 끌어내 일주문 옆에 있는 연못에 빠트렸다.

‘창성여관’ 주소가 나와 있는 ‘합천군지’

또한 고경스님은 왜색불교에 맞선 ‘조선불교유신회(朝鮮佛敎維新會)’와 한용운 스님을 중심으로 결성한 항일비밀결사체 ‘만당(卍黨)’에도 참여하는 등 조선의 독립과 조선불교의 중흥을 위해 헌신했다.

1912년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에 실린 ‘주지제씨(住持諸氏)에게 진정(進呈)’이란 글에서 스님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스님은 “각별한 주의를 기하여 3000년을 이어온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승계해 부처님 도량을 이루는데 막중한 책임을 버리지 마소서”라면서 “모든 대중이 힘을 합친 후에 청년의 교육, 포교, 개혁, 건설, 참선, 강학(講學)을 차근 실행하면 조선불교 사원(寺院)의 중흥이 가능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고경스님이 해인사 젊은 스님들에게 조선 중기 문신 정인홍(鄭仁弘)이 지은 한시(漢詩)를 들려주었다. “방인막도송저탑(傍人莫道松低塔), 송장타일탑천저(松長他日塔遷低)”. 우리말 풀이는 이렇다. “사람들아 소나무가 탑 밑에 있다고 이르지 마라 / 훗날 소나무가 자라면 탑이 밑으로 가노라.”

비록 탑 밑에 소나무가 있지만, 무럭무럭 자라면 돌로 만든 탑도 쓰러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지금은 큰 돌이 작은 소나무를 이긴 것 같지만, 결국은 생명이 있는 소나무가 큰 돌을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일경들은 “이러한 시를 어떤 이유로 젊은 스님들에게 일러 주었는가?”라면서 “송(松)은 조선이요, 탑(塔)은 일본을 지칭한 것”이라고 자백을 강요했다고 한다. 스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모진 고문에도 묵빈대처했다.

고경스님

해방 후 혼란기에 스님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다만 해인사 홍제암 종성스님과 고경스님 유족들이 스님의 행적을 복원하고 선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지난 2011년 8월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로 인정 받았다. 이에 앞서 <불교신문>은 2011년 3·1절 특집기사로 고경스님을 보도했다.

해인사승가대학장 무애스님은 “일제강점기 어려운 시절에 수행자의 길을 걸으며 일제에 맞섰던 고경스님의 숭고한 뜻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경스님은

1882년 부여에서 태어났다. 1904년 해인사에서 보담보하(寶潭寶河)스님에게 사미계를, 1909년 해인사에서 남전(南泉)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법명은 덕원(德元), 법호는 고경(古鏡)이다. 은사는 일하법린(日荷法璘) 스님이다. 1910년 대선(大禪), 1914년 대덕(大德), 1916년 대교사(大敎師) 법계(法階)를 받았다. 해인사와 통도사 선원에서 정진하고 강원에서 교학을 연찬했다. 해인사립(寺立) 해명학교(海明學校) 불교과 강사, 통도사 금강계단 갈마아사리, 해명학교 교감, 남해 화방사 주지, 안변 석왕사 포교당 포교사, 중앙학림 강사및 학감, 마곡사 불교전문 강사, 해인사 불교전수강당·금강계단 갈마아사리·경리위원·법무·감무 등의 소임을 보았다. 1933년 9월 8일 해인사 주지를 맡았으며, 1943년 1월 입적했다. <해인사약지(海印寺略誌)>(1933), <불교와 예수교>(1938) 등의 책을 냈다.

------------------------------------------------------------------------------------

* 참고자료 = 국가보훈처, <합천군지>,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독립운동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