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장인사는 손을 모으고 마음을 모은다는 의미도 있지만, 모두가 둘이 아니라는 의미까지 담고 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며, 인사를 하는 ‘나’와 인사를 받는 ‘그대’가 둘이 아니라는 의미도 있다. 

예컨대 왼손과 오른손은 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인 것도 아니다. 한 몸뚱이에서 나왔지만 각각의 용도는 다른 것이다. 이르자면, 오른손은 밥 먹을 때, 왼손은 뒷물할 때 사용한다.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밥 먹을 때 수저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먹는 경향이 있다. 아울러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고난 후 물을 사용해 맨손으로 뒷물을 해왔다. 그러므로 각각의 용도가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체는 하나지만 쓰임은 다른 것이 ‘둘 아님’의 의미다. <유마경>에서 이러한 ‘둘 아님’에 대해 보살들이 각각 의견을 설하고,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에게 물으니, 문수가 답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일체 법에 있어서 언설이 없고, 볼 수도 알 수도 없으며, 모든 문답을 여읜 이것이 바로 불이(不二)법문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설하고 나서 유마거사에게 물으니, 유마는 묵묵히 말이 없었다. 이에 문수가 감탄해 말했다.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문자와 언어가 없는 이것이 참으로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오천 명의 보살들이 그 자리에서 불이법문에 들어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러한 유마의 침묵이야말로 최상의 설법이라고 하는 것처럼, 선가에서도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경지를 추구한다. 동산 양개선사는 운암스님에게 물었다.

“백년 뒤에 누가 ‘스님의 진영을 그릴 수 있습니까?’하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운암스님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다만 이것뿐!” 

양개선사가 의심에 잠기었다가, 나중에 물을 건너며 그림자를 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무엇을 깨달았을까?

<유마경>에서는 보살이 중생 보기를 마치 아바타를 보듯이 해야 한다고 설한다. ‘아바타 스승(幻師)이 아바타(幻人)를 보듯이, 물속의 달을 보듯이, 거울 속의 형상을 보듯이, 보살은 중생을 관찰해야 합니다.’

아바타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쓰임이 있을 뿐!

[불교신문3447호/2018년12월8일자]

월호스님 논설위원·행불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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