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 교체…귀족불교 물결 속 ‘선불교 중흥조’ 등장

 

“불법이 동방으로 건너갔다”
中 석옥청공으로부터 인가
영녕사 주지 수용…개당법회

“경전은 방편…참선에 전념”
공민왕 스승으로도 인연
중생과 함께 하는 ‘화광동진’ 

  성철스님 “해동 종조” 평가  

태고보우스님이 임제종 18대 법손인 석옥청공에게 ‘태고암가’를 올려 선적 경지를 인가 받은 중국 절강성 호주 하무산 천호암(현 운림선사).

고려는 원나라에 오랫동안 항전했으나 결국 패배하고,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고려 말기로 접어들어 사회가 변화되면서 새로운 지배 세력이 등장했다. 이러한 여러 변화는 지배 체제의 문란을 초래했고, 이는 사회·경제면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났다. 농장이 확대됨에 따라 국가의 공전(公田)이 침식되고 이에 따라서 국가재정의 곤궁과 궁핍이 초래됐다. 이때 권문세족이 등장했다. 권문세족은 고려 전기부터 형성된 문벌귀족 일부와 무신 집권기에 성장한 가문, 그리고 몽골어 통역관이 출세하는 등 몽골과의 친선 관계를 통해 새로 등장한 가문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원나라의 강대한 세력을 의지해 권력을 앞세워서 민중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만들고 양민을 억압해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편 무인정권으로 말미암아 귀족정치가 붕괴된 이후에 새로운 관료층이 등장했다. 그들은 학문적인 교양을 갖췄으며, 정치 실무에도 능한 사대부들이었다. 이들의 사회적 진출은 고려 말기 정치적 대세를 일변시켰다. 

이 무렵 중국은 명나라가 세력을 모으고 있었고, 원나라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때 원나라에서 돌아온 고려의 공민왕은 자주적이고, 혁신적인 개혁정치를 단행했다. 대외적으로는 반원(反元) 정치가 시작됐고, 대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을 무력화시키는 두 가지 정책이었다. 공민왕 말년, 중국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됐다. 

그렇다면 고려 말기, 불교는 어떠했는가? 백련사(천태종의 결사)도 귀족불교적인 성향으로 기울어지면서 국가의 안녕을 빌어주는 원찰로 전락했고, 해인사를 기반으로 화엄종단이 활동했지만 미비했다. 법상종 계통에서 충렬왕 이후 국사 및 왕사를 배출했지만, 불교의 역할이 저조한 편이었다. 선종은 고봉 원묘(1238~1295년)의 <선요(禪要)>와 몽산 덕이(1231~?년)의 선풍이 진작되고 있었다. 덕이본 <육조단경>과 <몽산법어>가 간행됐고, 사굴산문이나 가지산문 선사들이 몽산 덕이의 간화선 선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정치적으로나 대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세 명의 선사가 등장했는데 태고 보우·나옹 혜근·백운 경한이다. 

 한국선사상사에서 본 보우 

양평 사나사 조사전 태고보우국사 진영.

조계종 종헌 제2장 6조에 의하면, “본종(本宗)은 신라 헌덕왕 5년(813년)에 조계 혜능의 증법손 서당지장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은 도의(道義) 국사를 종조(宗祖)로 하고, 고려의 태고 보우국사를 중흥조로 하여 청허와 부휴 양 법맥을 계승한다”고 명시돼 있다. 

고려 말기,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년)가 남긴 업적이나 선사상은 한국 선사상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 보우에 대한 평가는 학자에 따라 양분된다. 타락한 고려 말기의 한국선을 중흥시킨 중흥조로 보기도 하지만, 권력승이라는 이미지 또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보우선사는 한국선의 정체성 성립에 중흥조 역할을 했으며, 선사에 대해 이 점만큼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중앙승가대 전 총장 종범스님은 “세간 속에서 중생의 구염(垢染)이 없이 중생과 함께 하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이 태고스님의 선풍”이라고 했다. 전 종정 성철스님은 “달마는 서천에서 동토에 법을 전하였으니 동토의 초조(初祖)가 되며, 태고 보우는 중국에서 해동으로 등불을 전하였으니 해동의 종조가 된다”고 평하고 있다. 

보우는 나옹 혜근과 같은 시대 인물이다. 이전 신라 말, 고려 초기 선사들은 중국의 스승 문하에서 공부한 뒤 인가를 받고 법을 받아왔다. 하지만 보우는 오롯이 깨달음의 인가를 받고자 중국에 가서 임제종의 법맥을 받은 특수한 경우이다. 이런 점에서 유추해 볼 때, 고려 말기 선사들이 중국의 임제종 승려들과 교류가 빈번했으며, 보조 지눌의 선사상이 후대까지 고려 불교사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태고 보우는 성은 홍씨,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이다. 경기도 홍주(洪州) 출신이다. 아버지는 홍연(洪延), 어머니는 정씨이며, 해가 품에 들어오는 태몽이 있었다. 13세에 출가하여 양주 회암사 광지(廣智)의 제자가 됐고, 얼마 뒤 가지산문으로 입문했다.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혼자서 참구해 깨달음의 첫발을 내딛었다.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한 후 경전을 열람하면서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보우는 경전은 방편일 뿐 참다운 수행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참선에 전념했다. 

1333년 33세의 보우는 성서 감로암에서 7일 동안 용맹정진에 들었다. 이때 푸른 옷을 입은 두 아이가 나타나서 더운 물을 권했는데 받아서 마셨더니 감로수였으며, 그때 홀연히 깨친 바가 있었다. 이때 1차 깨달음을 경험한 것이다. 보우가 예전부터 ‘만법귀일’ 화두를 놓지 않은 점으로 보아 이 화두 참구를 통해 정각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1337년 37세 때 보우는 불각사에서 <원각경>을 읽다가 “일체가 다 사라져 버리면, 그것을 부동(不動)이라고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모든 알음알이(知解)가 타파됐다. 바로 2차 깨달음인 것이다. 그 뒤 38세에 송도의 전단원에서 조주의 ‘무(無)’자 화두를 참구해 마침내 크게 정각을 이루었다. 

그 뒤 양근(楊根)의 초당에서 어버이를 봉양하며 1700칙 공안을 점검했는데, 어떤 공안에도 전혀 막힘이 없었다. 그러다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에서 오랫동안 막혀 있다가 홀연히 그 뜻을 깨달았다. 1339년 소요산 백운암에서 머물렀고, 이때 <백운가>를 지었다. 보우는 41세 때 1341년(충혜왕 복위 2년)에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했고,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지어 이곳에서 5년 동안 머물렀다. 이때 영가 현각(665〜713년)의 <증도가>에 견주어서 그 유명한 <태고암가> 1편을 지었다.

 보우의 중국 행적 및 법맥 

태고보우스님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고양 삼각산 중흥사 옆 태고암의 비각.

보우는 중국 승려인 무극(無極)을 만났다. 무극은 보우의 행업이 순일함에 감복해 ‘원나라로 들어가 임제종의 18대손인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년)을 만나 인가받을 것’을 권했다. 1346년, 46세 보우는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의 대관사(大觀寺)에 머물렀다. 마침 황제 생일 때, 보우는 왕궁으로 초청돼 경(經)을 설했다. 그 다음 해, 보우는 남소(南巢)의 축원성(竺源盛)을 찾아갔는데, 선사는 벌써 입적했다. 마침 보우는 축원성의 문인인 홍아종(弘我宗), 월동백(月東白) 두 사람을 만나 서로 선문답을 나누다가 그들로부터 역시 “이 시대 강호(江湖)에는 석옥 청공뿐”이라는 말을 들었다. 

보우는 1347년 7월 중국 절강성(浙江省)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 천호암(天湖庵)으로 가서 임제종 18대 법손인 석옥 청공을 만나 그의 문하에서 보름 정도 머물렀다. 보우는 청공에게 ‘태고암가’를 올려 마침내 그의 선적 경지를 인정받고, 인가를 받았다. 청공은 보우에게 ‘불법이 동방으로 건너갔다(佛法東矣)’며, 그를 칭찬한 뒤에 ‘노승이 오늘에야 300근의 무거운 짐을 놓아버려서 그대에게 대신 걸머지우게 하니, 두 다리를 편히 뻗고 자게 되었다’라고 했다. 청공은 ‘태고암가’에 발문을 지어주고, 가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가사는 오늘의 것이지만 법은 영축산에서 흘러나와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 이것을 그대에게 전하노니 잘 보호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라.” 

보우는 청공의 문하를 떠나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한 ‘사석옥화상(辭石屋和尙)’을 지어서 청공에게 올렸다. 보우는 ‘법을 전수한 은혜는 분골쇄신해도 다 갚을 길이 없다’는 성의를 담았다. 필자는 2017년 겨울, 절강성 호주 천호암을 다녀왔다. 그래서인가 보우가 스승과의 이별했을 그 날, 그 시간에 함께 있던 느낌이 든다. 이 암자는 해발 1000여m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하는데,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 옛날 우리나라 선사들이 스승을 뵙고자 걸었을 그 험한 길을 걸으면서 우리나라 선사들의 구도에 감사드렸다. 

보우는 그해(1347년) 10월 무렵, 다시 연경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벌써 보우가 청공으로부터 법맥을 받았다는 소문이 원나라에 퍼져 있었다. 보우가 도착하자, 연경의 장로들이 환영을 했으며, 대신들은 황제에게 ‘보우를 영녕사(永寧寺) 주지로 봉할 것’을 청했다. 보우는 영녕사의 주지를 받아들여 개당법회를 했다. 당시 보우가 3일 동안 행한 영녕사의 법회가 얼마나 성대했는지는 법회를 직접 목도하고 그 체험한 것을 서술한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마침 고려의 공민왕이 보우의 이런 행적을 지켜보았다. 공민왕(1351˜1374년 재위)은 유년시절 원나라에서 자랐다. 공민왕은 ‘다시 고려에 돌아가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보우를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공민왕은 그 나라의 공주인 노국과 결혼해 고국으로 돌아와 고려 31대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이 왕에 즉위한 뒤 14년간 보우와 공민왕은 스승과 제자로서의 인연이 됐다. 

[불교신문3447호/2018년12월8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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