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과보, 어떻게 해야 해탈할 것인가?”
생이 있는 이상 죽음도
역시 피할 수 없는 과정
이것은 ‘필연적 원리’
불교란 윤회…전생하는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한 사성생애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성문·연각·보살·부처님
사성의 생활로 옮겨야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한 것이 생멸의 법칙이라는 진리를 따라서 생긴 것은 반드시 없어지는 것인즉 인생에게는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대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라고 하여 금생에서 해결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으로 작정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면서도 생사문제에 대하여 절실하게 연구하고 해결하여 우리에게 안신입명(安身立命) 할 곳을 보여준 이가 드물다.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생사일편 부운기(生死一片 浮雲起) 사야일편 부운멸(死也一片 浮雲滅)’이라 한 것을 보면 불교에서는 나도(生) 쫓아오는 데가 없고 죽어도 향하여 가는 데가 없는 것처럼 너무 허무하게 보는 것 같지마는 이것은 생사가 무상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형용사일 뿐이요, 결단코 공에서 유가 생겼다가 다시 공으로 돌아간다는 허무맹랑한 것이 인생이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는 것은 나지 아니할 수 없는 필연적인 원인이 있고 죽는 것도 역시 죽지 아니할 수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저 자연론자나 우연론자는 인생은 자연 혹은 우연으로 났다가 또 자연 혹은 우연으로 죽는 것이라고 할는지 모르거니와 불교에서는 자연이나 우연으로 생기고 없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인생이 나지 않으면 안 될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생이 제각기 과거에 마음의 움직임(惑)이 있었고 그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동작한 업이 있었으므로 그 업이 일종의 세력이 되어 현재의 자기(苦)를 받은 것이다. 이것이 혹(惑)·업(業)·고(苦) - 인(因)·연(緣)·과(果)-의 필연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과거에 남긴 혹과 지은 업이 있으면 이 과보로서의 현재의 자기는 피할 수 없는 생이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생이 있는 이상에는 죽음도 역시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이것이 생사의 필연적 원리이다.
그러나 한번 나고 한번 죽는 것으로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요, 생명은 영원무궁한 것으로 날 적마다 형태가 달라질 뿐이니 이것을 윤회전생(輪廻轉生)이라 말한다. 아직 죽음에 이르지 아니한 현생에서 또 혹이 움직이고 업을 지어서 그 다음 고과(苦果)를 받는 것이니, 이 혹·업·고의 인과관계는 영원무궁한 미래를 향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수레바퀴 모양으로 연속된다고 하여서 윤회라 한다. 부처님께서 어느 때에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바닷물을 보고 탄식하셨다.
제자들이 그 탄식하는 이유를 물으니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모든 중생들이 과거생에서 그 부모들과의 애별리고(愛別離苦)로 흘린 눈물은 저 바닷물보다도 더 많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겠느냐.” 이것은 중생들의 나고 죽는 바다에서 윤회하고 전생하는 나그네 길이 오랜 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윤회전생하면서 갖은 고통을 받는 중생을 불쌍하게 여긴 말씀이다. 또 윤회하는 데는 윤회하는 장소가 있고, 전생하는 데는 전생할 당체가 있으니 장소는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이다. 탐욕으로 가득 찬 욕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천인이 사는 천계(天界)의 일부인 육욕천을 말하는 것이다. 욕계의 중생들은 색·성·향·미·촉의 오욕에 끄달리어 생활하는 자유를 얻지 못하는 세계요, 육욕천 위에 있는 색계의 천인들은 오욕이 없어서 좀 자유롭기는 하나 색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므로 오히려 색의 존재를 필요로 하나니 이것이 색계의 십팔(十八)천이다.
색계의 위에 있는 무색계는 색도 필요하지 아니한 순전한 정신세계이니, 무색계에는 사천이 있다고 한다. 욕계의 중생들이 선정을 닦는 수양을 따라서 욕계로부터 색계에 나고, 또 색계로부터 무색계에 차례로 올라가는 것이요, 선정의 힘이 끝나면 차례차례 아래 세계로 떨어진다. 요컨대 모든 중생은 이 삼계를 윤회하는 무대로 삼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다.
다음에 전생하는 당체는 무엇인가? 금생에는 사람이었지만 다음 생에는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가? 이 전생하는 당체는 여섯 가지로 나누이니,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도·천도의 육(六)도이다. 이 여섯 갈래를 도라고 하는 것은 그 길이 각기 다른 것을 표현한 것이다. 중생이 여섯 갈래로 윤회하면서 전생하는데 어느 도를 가릴 것인가는 자기의 자유에 달린 것이니 지옥에 가기를 원하면 오무간업(五無間業)을 지을 것이요, 아귀에 가기를 원하면 탐욕을 일삼을 것이요, 천도에 나고자 하면 십선이나 선정을 닦을 것이다. 자기의 생각을 따라 혹(惑)을 동하여 업을 짓는 대로 그 업에 해당한 과보를 받게 된다. 이와같이 모든 중생은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끝이 없는 미래까지 혹·업·고의 인과를 따라 삼계를 무대로 삼고 여섯 갈래로 윤회하면서 전생하는 것이다.
三界猶如汲井輪
百千萬劫歷微塵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삼계란 우물 긷는 도르래 같아서
억겁동안 오고간 일 셀 수 없나니
이내 몸을 금생에서 제도 못하면
어느 생에 다시 만나 제도하리요
한 것은 이 소식을 말한 것이다. 이 여섯 갈래로 윤회하면서 전생하는 괴로운 과보를 어떻게 해야 해탈할 것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성(성문·연각·보살·부처님)의 생활로 옮겨야 하나니 불교란 것은 이 윤회하며 전생하는 고통바다에서 벗어나서 자유자재한 사성의 생애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항일투사 거쳐 민족교육자 ■ 운허스님은 … |
[불교신문3447호/2018년12월8일자]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