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망월동 국립묘지를 찾아 5·18희생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염불봉사를 하는 모습.

지난 2001년 광주 자비신행회 간사일을 보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점심공양 후에 법당에서 관음기도를 했다. 그날도 법당에서 혼자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시골집 오빠가 생각났다. 기도를 마치고 오빠에게 전화를 하니 다급하게 ‘아버지가 지금 가시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허겁지겁 옆에 있던 보살님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데 뜻밖의 물건을 챙겨주셨다. 불단위에 있는 향그릇에서 모래 한 줌과 아미타경 테이프를 챙겨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버님 가시는 길 내내 아미타경을 틀어주고 모래는 묘지에 뿌려주라고 당부했다. 그 길로 시골에 내려갔지만 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셨다. 아버님 얼굴은 매우 편안해 보였다.

형제가 여덟이어서 전국에서 찾아온 조문객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감동적인 것은 자비신행회 도반들의 장엄염불과 찬불가였다. 목탁에 맞춰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염불은 지극하고 장엄했다. 조문객들이 염불을 지켜보면서 놀라는 눈치였다. 친지는 물론 시골 마을 분들은 스님이 아닌 일반불자들의 염불을 처음 접하는듯했다. 여러 명이 합송하는 염불과 찬불가는 조문객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불자 도반들의 장엄염불로 아버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은 장중하면서도 여법했다. 

당시 여러 형제들 대부분 타종교를 신앙했고, 불교는 나 혼자였다. 장례를 마치고 큰 오빠가 아버님 장례때 독송했던 경전을 달라했다. 그후 오빠는 불자가 되었다. 둘째오빠와 여동생은 법륜스님의 팬이 되어 핸드폰으로 스님의 법문을 다운받아 듣고 있다. 그때의 환희심을 잊을수 없다. 아버님 장례이후 기이한 일들이 계속됐다. 여동생은 조문객으로 온 직장상사의 청혼을 받았다. 다리 통증으로 고생하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아픔을 가져가셨는지 건강이 좋아졌다. 형제들이 더 화목해지고 집안일이 잘 풀려갔다. 지금도 생각하면 매우 희유한 일이다. 가족들은 자비신행회 도반들의 장엄염불 공덕으로 아버님이 좋은곳으로 가셨다고 여기고 있다.

그후 염불공덕을 받았으니 염불봉사로 회향할 것을 발원했다. 자비신행회 간사일을 그만두고 하루는 장흥 보림사를 참배했다. 당시 큰 절에 주지스님 혼자 계셨다. 주지스님은 공양주도 없이 기도하면서 도량을 청소하고 계셨다. 함께갔던 도반과 백일기도를 하기로 했다. 매일 출근도장을 찍듯이 보림사를 찾았고, 기도하면서 주지 스님을 도왔다. 마지올리고 청소하면서 틈틈이 스님에게 목탁과 불교의식을 배웠다. 100일기도로 시작한 기도와 봉사가 무려 4년을 이었다. 그러면서 불교대학을 마치고 포교사가 되었다. 포교사가 되던 날 또다시 원을 굳건히 세웠다. 아버님 가시던 때 받은 염불공덕을 염불봉사로 갚겠다고 다짐했다. 염불봉사를 하면 공덕이 늘어나는 것을 실감한다. 광주전남포교사단은 상가 염불봉사뿐 아니라 망월동 국립묘지를 찾아 5·18희생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염불봉사를 하고 있다. 특히 찾는 이 없는 무연고자 묘역에서의 장엄염불은 더욱 애틋하다. 화순 암 병동에서 혈액암으로 의식조차없는 이를 위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4일간 했다. 임종을 앞둔 이는 염불소리가 들리는지 눈을 뜨려했다. 며칠 후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임종시 염불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번 실감했다.

염불봉사는 영가의 극락왕생을 위해 전념을 다하는 수행이다. 인연이 있어 염불을 할 때면 영가가 부처님 말씀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경전을 한자 한자 또박또박 읽으려고 힘쓰고 있다. 늘 감사하고 자비와 반야 지혜를 담아 염불봉사하는데 노력할 뿐이다.

[불교신문3447호/2018년12월8일자]

조현옥 포교사단 광주전남지역단 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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