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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43>  이만돌의 범종18세기 중후반 충북서 활동한 이씨파 계열 수장
  •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 승인 2018.12.04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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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형 양식 가까운 혼합형 
영랑사, 영국사 종 등 조성
보살입상 도상 채택해 흥미
불국사 금고까지 만든 장인

가야사명 영탑사종.

18세기 중엽부터 후반까지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이만돌(李万乭)은 영랑사종(影浪寺鐘, 1759), 영국사종(寧國寺鐘, 1761), 관문사종(觀門寺鐘, 1768), 숭암사명 갑사종(崇岩寺銘 甲寺鐘, 1774)을 제작한 장인이다. 만돌이란 그의 독특한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전 시기 장인들과 다른 신분 출신이었다는 것이 쉽게 짐작된다. 이만돌은 쌍룡(雙龍)의 용뉴와 상대(上帶) 없는 원권(圓圈) 범자문(梵字文), 그리고 종신에는 두세 줄의 돌기대를 가미하여 전통종보다는 중국형 양식에 가까운 혼합형(混合形) 범종을 따르고 있다. 

여기에 연곽과 연곽 사이에 배치된 보살상, 횡대 사이에 배치되는 명문과 하대(下帶)를 배치하는 동일한 문양 구성을 보인다. 그리고 일부 작품에서는 승장의 영향으로 보이는 연꽃을 들고 있는 보살입상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용뉴를 비롯한 전체적인 작품의 완성도는 부족한 편으로서 전 시기의 사장(私匠)들에 비해 기술적 역량은 조금 뒤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작품을 시대순으로 살펴보면 가장 먼저 만들어진 종이 천룡사명(天龍寺銘)을 지닌 은해사종(銀海寺鐘)으로서 1759년에 제작되었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당진(唐津)의 영랑사종(影浪寺鐘)종에는 이만석(李萬石)으로 제작자가 표기되었지만 함께 제작에 참여한 신덕필(申德必)이란 장인이 그 다음해에 다시 가야사명 영탑사종(伽倻寺銘 靈塔寺鐘)에도 등장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같은 이만돌이 만든 종으로 추정된다, 

갑사 범종.

이후에는 주로 이만돌 혼자서 제작한 작품이 눈에 띤다. 1761년 충북 옥천의 영국사종(寧國寺鐘)을 만든 이후 1769년에는 불국사(佛國寺) 금고, 1771년에 창녕의 관룡사(觀龍寺) 금고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관룡사 금고는 제작자가 이만석(李萬石)로 표기되었지만 이 역시 영랑사종과 마찬가지로 이만돌과 동일 인물로 보인다. 이만돌이 제작한 마지막 작품은 1774년에 제작된 숭암사명 갑사종(崇岩寺銘 甲寺鐘)으로서 이를 통해 볼 때 그의 활동은 1759년부터 1774년에 이르는 그리 길지 않은 시기이지만 7점에 이르는 범종과 금고를 만들며 활발히 활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1768년 관문사종(觀門寺鐘)의 제작자인 이만석(李萬碩)과 1769년 건륭24년명종(乾隆三十四年銘鐘)의 이만원(李萬達)이란 장인도 이만돌과 관계가 깊은 장인 집단으로 추정된다. 이만돌에 의해 주도된 작품 경향은 19세기로 이어지면서 이만중(李萬重), 권동삼(權東三)의 계열과 이만숙(李萬叔)과 이영희(李永喜)의 두 계열로 나누어 계승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이만돌은 18세기 이씨 일파의 가장 첫머리에 활동한 인물이란 점에 그의 작품 경향과 가계 등에 관한 새로운 주목이 필요하다, 

그가 제작한 범종 가운데 대표적인 두 점의 범종과 한 점의 금고를 살펴보면 우선 1761년에 제작된 영국사종(寧國寺鐘)을 들 수 있다. 이 종은 충청북도 영동(永同) 영국사(寧國寺)에 소장된 범종으로서 높이 97cm에 이르는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의 범종은 쌍용의 용뉴(龍)와 종신 상부에 상대 없는 원형 테두리 안에 범자문을 두르고 중신 중단과 하단부에 두세 줄의 돌기띠를 가미한 모습이 특징적이다. 

이 종 역시 그러한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쌍용의 용뉴 정상에는 보주가 받치고 있으며 입 안에도 각각 여의주를 물고 있다. 험상궂게 표현된 용뉴에 비해 반원형으로 이루며 힘없이 늘어진 가는 다리는 도식적인 발톱이 묘사되었다. 천판 외연과 맞닿는 종신 상부에 1조의 융기선이 돌려지고 그 바로 아래를 돌아가며 원형 테두리로 둘러진 범자문이 장식되었다. 17세기 종과 달리 각각의 글자 배치와 형태가 분명치 않아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종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18세기 중엽 이후에 나타나는 공통되는 현상 중의 하나이다. 이와 조금 떨어져 네 방향으로는 방형의 연곽을 배치하였는데, 연곽대에는 화려한 당초무늬를 장식하고 연곽 안으로는 국화 모양을 부조시킨 화문좌(花文座) 위에 얕게 돌기된 종유(鐘乳)가 9개씩 표현되었다. 

영국사종.

이 모습은 연뢰라기 보다 마치 떡살문에 가까워 시대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 연곽과 연곽 사이마다 구름 위에 서있는 보살입상을 1구씩 부조시켰지만 왜소해진 신체와 얼굴, 그리고 의습의 표현이 매우 경직되고 도식적으로 처리되었다. 몸을 옆으로 돌리고 합장한 채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은 전 시기 사인비구(思印比丘) 범종과 같은 승장(僧匠) 범종의 보살입상을 계승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만돌은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승려 장인 범종에 장식되는 보살입상의 도상을 채택한 점이 흥미롭다. 종신의 중단을 돌아가며 횡대(橫帶)와 같은 융기선대를 한줄 돌리고 동일한 융기선대가 종구(鐘口)에서 조금 위로 올라온 종신 하단 면에도 돌려져 있어 이 사이 여백에 양각의 명문을 새겼다. 기록된 내용은 건륭(乾隆) 26년인 1761년에 옥천군(沃川郡)의 영국사 대종(寧國寺 大鐘)으로 300근의 중량을 들여 개주(改鑄) 한 것이라 하였는데 그 때 주조된 것으로 파악된다. 제작자로는 이만돌(李萬乭) 한사람만 기록되어 단독으로 활동하면서 종을 만들기 시작한 첫 번째 작품으로 보인다. 

영랑사종.

충청남도 공주시 갑사(甲寺)에 소장된 범종은 1774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높이는 65cm로서 이만돌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크기가 작은 편에 속하는 종이다. 전체적으로 청녹이 많이 덮여 있으며 쌍룡의 용뉴 아래 띠 장식이 둘러진 종신이 연결된 형태를 취하였다. 종신의 외형은 다소 납작한 형태로서 정상부로부터 벌어지며 내려오다가 종구(鐘口) 가까이 이르러 안으로 오므라든 모습이다. 

쌍룡의 용뉴는 몸체의 좌우에 작은 머리가 붙어 있으며 그 형상이 괴수처럼 변모되었다. 종신에는 어께와 분리되는 모서리에 상, 하 주형틀의 분리선이 남아있다. 종신은 융기선 장식으로 3등분 했는데, 윗부분에는 한 줄의 굵은 융기선(太線)을 둘러 상대처럼 화형으로 외곽을 장식한 커다란 9개의 원권과 그 안에 ‘옴’ 자 한자로 이루어진 범자문을 배치했다. ‘육자대명왕진언(六子光明眞言)’이나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을 장식하는 17세기 종과 달리 상징적인 한글자만을 배치한 점에서 같은 이만돌의 범종이지만 시대적인 변화가 느껴진다. 

종신의 중단쯤에 배치된 사다리꼴 모양의 연곽대(蓮廓帶)에는 여러 겹으로 연판을 겹친 문양을 시문하였고 연곽 내부에는 조금 거칠게 표현된 9개씩의 연좌(蓮座) 중앙에 낮게 돌기된 연뢰를 9개씩 두었다. 연곽과 연곽 사이마다 원형 두광을 갖추고 합장한 4구의 보살입상이 교대로 배치되었지만 종의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크면서도 자세가 경직되어 도식화된 모습이다. 이 아래 하단부에는 띄엄띄엄 장방형의 구획을 두어 명문을 기록하였지만 내용을 판독하기 어렵다. 

경주 불국사 금고.

명문에 의하면 원래 숭암사(崇岩寺)에 걸렸던 종임을 알 수 있다. 종구 가까이에는 하대(下帶)처럼 세 줄의 융기선 띠를 둘렀으나 별다른 장식은 없으며 마치 하대처럼 종구와 구획을 이루었다. 갑사 종은 괴수형으로 변모한 섬약한 용뉴의 모습과 종신 중앙에 거칠게 표현된 연곽과 보살입상 등에서 조선 후기 범종의 도식화되는 양상을 잘 그러내 준다.

이만돌이 제작한 두 점의 금고 가운데 불국사 소장 건륭 29년명(1764) 금고는 고면(鼓面)에 두 줄의 융기동심원이 둘러져 3구로 균일하게 나누어져 있는데, 당좌구와 중구에는 문양이 없다. 중앙의 융기동심원은 한 줄의 태선(太線)이, 다음 융기동심원은 태선으로 된 두 줄이 한 조를 이루고 있다. 중앙의 당좌구와 중구는 문양이 나타나지 않고 외구에는 원권의 범자문 9개를 둘렀다. 범종과 마찬가지로 육자광명진언이 아닌, 단순한 범자문을 나열한 변화를 보인다. 측면에는 4개의 융기선이 둘렀고 가운데 융기선 위에 반원형의 고리를 중앙과 우측에 달았지만 좌측의 고리는 손상되어 그 흔적만 남아있다. 측면에서 이어지는 후면의 구연부는 안으로 접혀지고 후면이 넓게 뚫려 공명구를 형성한 가장 일반적인 형식의 금고이다. 

명문은 금고의 측면에 둘러진 융기선 사이의 여백에 따라 종서(縱書)로 기록되었다. 금고의 향 좌측에는 음각으로 ‘건륭이십구년갑신사월회일 지전○○설○○○○(乾隆卄九年甲申四月晦日 持殿○○說○○○○)’을, 향 우측에는 연점각(連點刻)으로 ‘전화주 법찬○화상 계연 유나○○ 공덕 양공이만돌(前化主 法贊○和尙 戒演 維那○○ 功德 良工李萬乭)’이란 내용을 새겼다. 제작자는 ‘량공 이만돌(良工李萬乭)’로 기록되어 이만돌이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불국사 금고는 조성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금고 걸이가 잘 남아있어 주목되는데, 채색은 남아있지 않지만 좌우 끝단을 용머리로 조각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불교신문3446호/2018년12월5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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