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살 사춘기 딸과 뽀뽀를 하고 싶어서 입술을 내민다. 돌아오는 건 딸의 찡그린 얼굴이다. 아이는 마지못해 내 볼에 해준다. 절대 이런 날이 올 것 같지 않았는데 어느새 딸은 훌쩍 커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인격체로 가고 있었다. 생활적으로 많은 부분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마음과 행동은 그보다 훨씬 앞서 어른을 향해 가고 있다. 안다. 이제 아이는 더 이상 어리지 않고 내가 예의를 지켜야 하는, 타인보다는 조금 가깝지만 타인 같은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타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가끔 버스나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부모들의 목소리에서는 짜증이나 화를 쉽게 본다. 나부터도 버럭 화를 낼 때가 있다. 처음에는 몰랐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는데 내 뒷자리에 앉은 엄마와 초등학생 아이의 대화를 들었다. 별일 아닌 것 같은데 엄마 목소리가 무척 짜증스러웠다. 마침 남편과 같이 버스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버스에 내려 집에 오는 길에 남편이 말했다. 나도 똑같다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무엇이 저 엄마나 나에게 저런 목소리와 짜증을 아이에게 하고 있는가. 아이가 말을 듣지 않아서? 아이가 어리석어서? 아이가 무례해서? 아이가 한 말을 또 하게 해서? 하지만 어른이라고 다르지 않다. 어른들도 무례하고, 한말 또 하게 해도 여전히 듣지 않고, 자기 고집만 피우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들에게 우리는 버럭 화부터 내지 않는다. 그들은 같은 어른이기에 함부로 화를 낼 수 없다. 그러면 화를 내서 어른이나 아이나 말을 들을까? 나는 여전히 엄마 말을 잘 안 듣고 있다. 엄마도 내말을 잘 안 듣는다. 우리는 서로 각자 주장하고 주장의 중간 지점에서 타협할 뿐이다. 하지만 아이와는 타협을 하지 않는다. 타협은 존중하고 배려할 때 할 수 있다. 부모들은 나와 아이의 관계가 동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기에 나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와 자식관계에서도 힘의 관계가 끼어든다. 힘이 있는 쪽은 힘이 없는 쪽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다. 힘이 있으면 상대를 존중이나 설득 같은 어려운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기 보다 더 손쉽게 폭력이나 억압으로 누르려 한다. 그게 훨씬 간단하고 쉽고 편하고 빠르기 때문이다. 갑질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자신의 뜻대로만 하려는 거다. 나의 몸속에도 갑의 습이 배어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본다. 갑질 멀리서 생각하지 말자. 

[불교신문3446호/2018년12월5일자]

이은정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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