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리 이어질 수 있었던 건 불자들 사랑 덕분”

지난 11월14일 만난 김 명창은 “공연이 끝나고 ‘소리가 어쩜 그렇게 좋을 수 있느냐’며 손을 꼭 잡아주는 불자들이 있어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말했다. 김형주 기자

50여 년 동안 국악인으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공연

1972년 효 정신을 담아낸
‘회심곡’ 완창음반을 발매
국악계 최초 100만장 판매

‘불교음악시리즈’ 등 출시
찬불가 대중화에 이바지

어려서부터 뼛속깊이 불자
불자대상 상금 전액도 보시
후학양성에도 늘 ‘구슬땀’

“부모님이 어떻게 나를 낳았고
세상에 태어나 죄짓지 않는
아름다운 삶 살아야 한다”는
‘회심곡’ 가사 꼭 읽어봤으면

 

전통국악계 거목인 김영임 명창이 ‘회심곡’을 통해 꾕과리 장단으로 절절히 풀어대는 소리는 인간 본연의 정신을 노래한다. 조선시대 서산대사가 지었다고 전해오는 회심곡은 삶의 무상함과 부모에 대한 효도, 선악의 과보, 충효의 노래로 엮어진 총 232구의 장편 가사이다. 이러한 김 명창의 회심곡은 우리 국악계에서 전무후무한 밀리언셀러를 넘어선 음반으로 판매가 됐고, 지금까지도 그 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1월14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김 명창을 만났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 마디 한마디에 힘이 넘쳤다.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런 목소리가 어디서 나오는지 들을수록 놀랍다. 꽃 같은 스물에 국악의 길에 들어섰고 가시밭길의 연속인 소리 인생 이었지만, 다음 생에 태어나더라도 또 소리를 하겠단다.

“친정어머님이 (불교에) 절대적이셨어요. 때론 이 길이 정말 저를 힘들게도 했지만, ‘나의 길, 나의 소리’를 사랑해주시는 불자들이 있었기에 제 소리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더 많은 분들에게 제 소리를 들려드리고 싶네요.”

김 명창은 뼛속 깊이 불자다. 어려서부터 엄마 손 잡고 법당에 앉아 향 내음을 맡으면서 자랐다. 그래서 부처님만 보면 절로 숭고한 마음이 들고 고개가 숙여진다. 특히 요즘은 신행활동에 더욱 열심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집에선 불경을 독송하고, 남편 이상해 씨와 사찰에 가서 부처님께 기도를 올린다. 잠들 기 전 <법화경> 사경도 하고 있다.

“예전엔 부처님을 마음으로 믿으면 됐지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좋은 일은 실행에 옮기는 것이 불자들이 해야 할 일이죠. 어느 순간 이걸 깨달았지 뭐예요. 아, 지금도 늦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열심히 해야겠다. (원력을 성취하려면) 정성이 지극해야 하고 노력이 따라야 해요. 시간 맞춰 불경을 틀면 제 방에 스님 목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고 오늘 한 일에 대해 돌아보고, 소망하는 일을 기도해요. 정말 마음이 편해져요.”

김 명창은 올해 조계종 불자대상을 받았다. 불자대상 선정 소식을 듣고 밤잠을 설칠 정도로 설레였다고 한다. “불교를 위해 크게 이바지 한 것이 없는데 큰 상을 받게 됐다”며 겸손함을 표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부모은중경>에 담긴 효 정신을 회심곡에 담아 널리 알리고, 꾸준히 불교음반을 출시해 음성포교와 찬불가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상을 수상하게 됐기 때문이다.

상을 받은 이후엔 무주상 보시로 또 한 번 불자들의 귀감이 됐다. 사상 최악의 태풍으로 큰 슬픔에 빠진 푸에르토리코 허리케인 피해성금으로 써달라며 상금 1000만원 전액을 쾌척한 것이다. “불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이 따뜻하죠. 저 또한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돌려주며 살아야 될 것 같아요. 이 상이 주어질 때까지 많은 성원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분들이 계시거든요. 공연이 끝나고 ‘소리가 어쩜 그렇게 좋을 수 있느냐’며 손을 꼭 잡아주시며 덕담을 해 주시는데 그럴 때마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어요. 상금을 좋은 곳에 쓰고 싶어서 아름다운동행을 통해 후원하게 됐습니다.”

김 명창은 그간 한 해도 쉬지 않고 매년 20~30회 공연을 통해 대중들과 만나고 있다. 국악인으로서는 거의 유일하다는 평가다. 전국투어 가운데 전통사찰에서 펼치는 공연 또한 돋보인다. 노래가 끝나고 아낌없이 쏟아지는 불자들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사랑을 받는다고. 최근에 있었던 불국사 성보박물관 개관식도 잊지 못할 공연 가운데 하나다.

“불국사 정경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단풍은 무르익고 산천경계를 무대 삼아 ‘회심곡’과 ‘가야지’를 노래 부르니 마음도 끝없이 행복했답니다. 올해 수많은 공연을 다녔지만 가장 기억에 남아요.”

‘김영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회심곡이다. 이날도 회심곡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특히 우리 아이들이 회심곡 전체를 꼭 한 번 읽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부모님이 나를 어떻게 낳아주셨고, 세상에 태어나 정말 남에게 죄짓지 말면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야 된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어 모든 이들에게 교훈이 되는 노래라고 설명했다.

어느덧 나이는 육십 고개를 넘었지만 늘 새로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그다. 2016년엔 한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래퍼’로 파격 변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언뜻 국악과 힙합이란 장르가 기름에 물 돌 듯 섞이기 힘들어 보이는데도, 우리의 소리를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10대들은 과연 김영임 이라는 사람이 ‘누굴까’라고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소리하는 사람들에겐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죠. 대한민국 국민이면 우리 소리를 알아야 하는데 10대들은 아이돌의 춤추고 뛰노는 모습을 더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이 기회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국악이 젊은 층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우리의 소리와 전통을 힙합과 함께 알리고 싶었죠. 방청객도 모두 10대여서 힘찬 에너지 속에서 무대를 즐길 수 있었답니다(미소).”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고 소리 하나로 ‘국민 명창’이 된 김 명창은 후학양성에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어려운 길이기에 교육에 있어 가장 주안점을 두고 있는 점은 바로 ‘인내심과 노력’이다. 소리를 잘 하고 싶어서 뛰어 들었다가도, 이 길을 끝까지 가야겠다는 각오와 결심이 없다면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김 명창의 열정은 늘 현재 진행형이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공연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국악인으로는 최초로 1998년 뉴욕 카네기홀 단독공연을 펼쳤고, 영국 로열필하모닉오케스트라 등 세계적인 교향악단들과 협연 등 한국 전통의 소리를 대중화시킨 주인공이다. 그러나 아직도 김 명창은 자신의 국악을 완성이 아닌 진행으로 보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소리는 운명과도 같은 천직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소리를 올곧게 지키기 위해서죠. 무엇보다 묵계월 스승님의 맥과 얼을 의연하게 지켜나가는 일이 제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승님의 대를 이을 수 있는 길은 하루라도 빨리 문화재가 되는 것이고요, 불자님들도 기도와 응원으로 용기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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