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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38> 선원사와 몽산덕이의 선풍‘제2의 수선사(강화 선원사) ’…간화선 토착화에 지대한 역할
  •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18.11.2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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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간 법답게 수행하고도
견성하지 못한다면 산승이
대신 지옥에 들어가리라”

     확고한 선지식 몽산덕이      

‘몽산법어’ ‘육조단경’ 비롯한
수많은 저작들 국내 수두룩 
고려 출ㆍ재가에 많은 영향
                     …
혼원 천영 자오 충감 굉연
국사들 선원사 머물며 수행 
몽산덕이 선풍 수용 발전 

식영연감은 불자-유자 교유 
보감국사 혼구는 왕사로서 
존경받으며 선풍진작 일조 

‘제2의 수선사’라 할 만큼 유명한 선사들이 수행했던 강화 선원사지 모습.

선원사(禪源社)는 1245년 고려의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최우(?˜1249년)가 몽골에 대한 항쟁을 상징하는 차원에서 창건됐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선원사는 당시 수선사의 사주(社主)가 주지를 맡을 만큼 순천 송광사와 사격(寺格)이 같았다. 현재 해인사에 있는 고려대장경의 재조사업(再彫事業)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398년 이 절에 있던 대장경판을 서울로 옮겼다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대장경판은 조선 초기 선원사에 보관돼 있었음이 틀림없다. 대장도감의 본사가 선원사에 있었고, 승려들이 경판을 필사하고 조각했다는 점 등을 통해 경판을 선원사에 보관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여러 정황들을 볼 때, 선원사는 당시 국가적으로나 불교계에 큰 역할을 했던 도량이다. 이 선원사가 한국 역사에서 대사찰이었지만, 고려 왕실이 다시 개경으로 환도한 뒤에는 쇠퇴해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몽산덕이와 고려의 선(禪) 

국가적인 원조를 받았던 선원사는 불교사적으로 두 가지 특징을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선원사의 창건 이유를 떠나 이 사찰은 ‘제2의 수선사’로서 선찰(禪刹)이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고려 말기로 접어들면서 선원사 승려들이 몽산 덕이(1231〜1308년)의 선풍을 수용해 간화선이 토착화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도량이라는 점이다. 덕이는 ‘무자(無字)’ 화두 위주의 간화선 수행법과 깨달은 후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 받는 전통을 강조했다. 이점이 우리나라 조계 선풍의 큰 골격이었는데, 이는 덕이의 선풍에 영향을 받아서다. 

덕이는 원나라 때 선승으로,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로 접어들 때다. 덕이는 14세 때, 어느 승려의 <반야심경> 독송 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물었는데 그 승려는 덕이에게 죽암묘인(竹巖妙印)을 찾아갈 것을 권유했다. 죽암은 자신을 찾아온 어린 덕이에게 “이 일을 잊지 마라. 다시 찾아오는 때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후 출가하게 된 덕이는 여러 스승에게 법을 구하다가 환산 정응의 법을 받고 그의 법맥을 이었다. 36세에 이르러 늘 품고 있던 공안에 홀연히 의심이 풀리면서 크게 깨달은 덕이는 늘 사람들에게 “3년간 법답게 수행했는데도 견성하지 못한다면 이 산승이 대신해 지옥에 들어가리라”라고 할 만큼 확고한 간화선의 선지식이었다. 

덕이는 고려의 승려, 재가불자들과 서신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동안(動安) 거사 이승휴(1224˜1301년)에게 서신으로 법어를 보냈고, 이승휴도 답사를 보냈는데, 이 내용이 <동안거사집>에 전한다. 앞에서 언급한 수선사 10세인 혜감국사 만항(萬恒, 1249~1319년)과 일연의 법을 이은 보감국사 혼구(混丘, 1250~1322년)도 덕이의 법을 찬탄했다. 특히 1296년 충렬왕과 고위관리 10여명은 원나라에 들어가 휴휴암을 찾아 덕이에게 법문을 직접 듣기도 했으며, 나옹혜근과 천희 등 고려 말기 고승들도 덕이의 유적지를 찾았다. 
 <몽산화상법어약록>은 조선 초기 신미(信眉) 혜각존자(慧覺尊者, 1403~1480년)가 한글로 초역(抄譯)했다. <몽산법어>는 현재까지 우리나라 간화선의 지침서로 널리 유통되고 있으며, 덕이본 <육조단경>은 강원 교재로 사용되고, 이외 <몽산화상육도보설>, <제경촬요>, <몽산행실기>, <행적기>, <염불화두법> 등 그의 거의 모든 저작이 국내에서 발견됐다. 
 선원사의 초대 사주는 수선사 4세인 진명국사(眞明國師) 혼원이었고, 2세는 수선사 5세인 천영 원오국사(圓悟國師)이다. 이어 3세는 자오(慈悟)국사, 4세는 원명(圓明)국사 충감(鑑, 1274˜1388년), 5세는 죽간굉연(竹磵宏演)이다. 굉연은 원명국사 충감의 제자이고, 충감은 수선사 5세인 천영의 제자로서 선원사에 머물며, 몽산의 선풍을 수용 발전시켰다. 
 원명국사 충감은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덕이의 제자인 철산소경(鐵山紹瓊)을 만나 함께 고려로 귀국해 철산을 3년간 모셨다. 이후 충감은 용천사에서 주지를 역임하며 백장회해의 <선문청규>를 발간했다. 철산소경은 고려에 들어와 강화도 선원사에 머물렀다. 철산소경이 1304년 7월부터 3년간 고려를 방문했을 때, 왕 관료 승려 유학자에 이르기까지 고려인들은 덕이를 대하듯 철산소경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고려국대장이안기(高麗國大藏移安記)>에 따르면, “부처님을 맞이한 듯 온 나라가 철산을 부처님 모시듯 존숭하고, 머무는 곳마다 사부대중이 구름처럼 모였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몽산의 선풍이 고려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선원사 중수 식영연감 

강화도 선원사에서 주지를 역임하며, 몽산덕이의 선풍을 수용해 펼친 승려도 있다. 바로 식영연감(息影淵鑑)인데, 선원사를 크게 중창 불사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14세기 사굴산문 승려로서 생몰연대가 미상이나, 수선사 13세인 복구와 비슷한 시대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성은 양(梁) 씨로, 이 집안에서 2대에 걸쳐 3명의 승려가 배출됐다. 전남 강진의 월남사 장로를 지냈으며, 말년에 강화도 선원사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연감은 ‘식영암(息影庵)’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선원사 주지로 이곳에 머물며 사대부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 도속을 교화하는데도 힘을 기울였다.
 1324년 이래 선원사 주지로 주석한 식영암은 몇 해 전 소실된 비로전을 중건한 뒤 제자인 전인(全忍)에게 송나라에 가서 비로전의 단청을 위한 채색 재료를 구해오도록 했다. 1325년 비로전을 단청하고 그 동편 벽과 서편 벽에 40개 신중상을 그려 넣었다. 단청을 마치고 나서 몸소 지은 ‘선원사비로전단청기’가 <동문선> 권65에 수록되어 있다. 식영암은 또한 일찍이 선원사의 중건을 발원하는 소(疏)를 지어 올려 선원사를 크게 중수하기도 했다. 이색이 쓴 행촌(杏村) 이암(李, 1297˜1364년)의 비문에는 이암이 선원사의 식영암과 함께 방외(方外)의 도반이 돼 절의 경내에 건물을 짓고 편액을 ‘해운(海雲)’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식영암이 지은 글들을 문도들이 모은 것이 <식영암집(息影菴集)>이다.

식영암집은 고려 후기 불자와 유자의 사상적 교유의 흔적을 담고 있는 서적이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또한 가전체 설화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현재는 문집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팡이를 의인화 한 가전체 설화 <정시자전(丁侍者傳)>을 비롯해 그가 쓴 여러 글들을 모은 것으로 생각된다. 식영암의 글 11편이 <동문선>에 설(說), 전(箋), 소(疏), 기(記) 등으로 실려 있다. 이와 같이 식영암이 여러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갖고 한 시대의 문화계를 풍미하며 살았던 선사의 살림살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식염암의 법제자로는 환암 혼수(幻庵混修, 1320〜1392년)가 있다. 환암 혼수는 이판과 사판에 경륜이 깊은 식영암의 법회에 참석했다가 그에게 감화를 받고 제자가 됐던 것으로 본다. 특히 환암은 식염암으로부터 <능엄경>의 진수를 터득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몽산 덕이의 선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간화선 토착화에 일조한 보감국사 묘응탑(밀양 영원사지), 비는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무극노인’ 보감국사 혼구 

자는 구을(丘乙), 호는 무극노인(無極老人), 시호는 보감(寶鑑)국사이다. 부모가 복령사 관음보살에게 기도해 낳았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탑을 만들거나 벽을 향해 앉아 사색에 잠겼으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자애로워 소미타(小彌陀)라고 불렸다. 10세 때 무위사(無爲寺)로 출가해 천경선사(天鏡禪師)의 제자가 됐으며, 구산선(九山選)의 상상과(上上科)에 수석으로 급제했다. 이후 일연선사에게 귀의했는데, 일연과 혼구(混丘, 1251~1322년)가 인연되는 기이한 일이 있다. 일연의 꿈에 어떤 승려가 나타나 ‘자신은 오조(五祖, ?~1104년, 임제종 양기파 승려로서 무자화두의 효시)의 아류(亞流)’라고 말했다. 그런데 다음날 혼구가 찾아온 것이다. 일연은 그 꿈을 꾸고 난 뒤에 혼구가 찾아온 것을 이상이 여겼다. 한참 세월이 흘러 혼구의 영민하고 부지런한 모습에 감탄, 제자들에게 “내가 옛날 꾼 꿈이 징험이 있구나”라고 했다. 이후 혼구는 일연의 뒤를 이어 강석(講席)을 열어 승가의 모범이 됐다. 일연이 입적한 뒤에 혼구가 주관해 일연의 비문을 세웠다. 

혼구는 1284년 국청사의 금탑 속에 불아(佛牙)를 봉안하는 경찬법회에 참석했으며, 1289년 이후 운문사, 내원당, 연곡사, 보경사 주지를 역임했다. 충렬왕이 ‘대선사’ 품계를 내린데 이어 충선왕이 즉위해서는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을 제수하고, 대사자왕법보장해국일(大師子王法寶藏海國一)이라는 호를 내렸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면서 감지왕사(鑑知王師)로 임명됐다. 2년 후 은퇴해 밀양 영원사(瑩源寺)에 머무르다가 말년에 송림사로 옮겨 임종게를 남기고 좌선한 채로 입적했다. “가시나무 숲에 태어나 험한 시대를 살아왔네. 오늘 가는 길 과연 어디인가? 흰 구름 끊긴 곳이 청산인데, 떠나는 사람 다시 그 청산 밖에 있네.” 

혼구도 몽산 덕이의 선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선사는 덕이가 직접 지어 서신으로 보낸 무극설(無極說)의 뜻을 터득하고, 무극을 자신의 호로 삼아 ‘무극노인(無極老人)’이라고 했다. 저술로는 <어록> 3권, <가송잡저> 2권, <신편수륙의문> 2권, <중편염송사원> 30권 등이 있으나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혼구의 제자로는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이 있다. 

[불교신문3445호/2018년12월1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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