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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두의 고승전] <32> 서암 홍근대종사“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서암 홍근(西庵 鴻根, 1914~2003) 대종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스님은 90세 되던 해 뇌졸중으로 쓰러져 경북대병원 중환자실에서 급한 불을 끄고 나와 신도 한의사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되지 못했다. 

문경 봉암사에서 열반에 들면서 “한 말씀 남기시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한 말이 바로 이 짧은 한마디였다. 서암스님은 한 평생 수행자로 살아오면서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인’의 삶을 살았다. 봉암사 조실, 조계종 총무원장, 원로회의 의장, 조계종 종정 등 종단의 주요직책을 맡았으면서도 “내가 이제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그 즉시 그 자리를 훌훌 털고 미련 없이 떠난 수행자였다. 

“승려의 세계는 투명해야 한다. 청정비구를 자처하는 승려 중 상당수가 은처(隱妻)를 거느리고 있고, 또 이같은 사정을 세상 사람들이나 신도들이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있는 일을 없는 척 덮어 놓고 있다. 하지만 이는 옳지 못하다. 승려, 성직자라는 이름의 세계가 이처럼 불투명하고 거짓투성이여서는 도대체 누구의 스승이 되며 누구를 제도하겠는가. 투명해야 한다. 거울 속 같이 투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불교는 이 점에서 매우 어둡다. 현실을 돌아보면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이미 했더라도 인연을 끊고 떠난 비구들이 반드시 큰 깨달음에 이른 것은 아니다.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이, 즉 가족이 없다는 홀가분한 상태가 마음의 평정을 가져다주기는커녕 더 많은 업을 짓고 평생 동안 욕망에 끄달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더러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비구가 인연 아닌 인연으로 속세인들과 마찬가지의 고통 속에 빠져있는 경우를 본다. 

사정이 그렇다면 그들은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이 없고 더 많은 죄를 짓게 된다면 결혼을 하는 것만 못한 일이다. 이것을 허용한다면 조계종단은 지난날 한때 그랬던 것처럼 비구·대처의 통합종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이미 여러 번 계획상으로 시도해 보았던 것처럼 비구 즉 수행승과 대처, 즉 포교승으로 승단을 이원화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회고록 중에서) 

그렇게 사는 건 어떤 것이며 
그렇게 가는 건 어떤 것인가?


“아무리 이 세상이 혼탁해도
정신 한 번 돌이키면 거기에
청정무구한 그 자리가 열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절대
내 안에 내 부처 찾는 것

내 밖에 있는 것은 그것이
비록 부처라도 매달리지 말고
본래면목 세워 바르게 살아야”

종정사임 후 태백산 토굴짓고
‘무위정사 자유인’ 유유자적 

서암스님은 입적하기 1년 전인 2002년 1월 불교신문과 인터뷰를 가졌다. 스님은 당시 “불교는 자기 스스로 신앙하고 스스로 깨쳐 자기가 바로 우주의 창조주로, 자기가 모든 것을 이룩하는 근본핵심이란 것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대중에게 전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  행장(行狀) 

서암스님은 1914년 10월8일 아버지 송동식(宋東植)과 어머니 신동경(申東卿)사이에서 5남1녀 중 셋째로 경북 영주군 풍기읍 금계동에서 태어났다. 스님의 아버지는 일제치하에 풍기 일원의 독립운동단체 지도자로 활약했다. 이런 까닭에 가족은 삶의 터전을 잃고 안동 단양 예천 문경 등지를 떠돌 수밖에 없었고 스님은 유년시절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보냈다. 

“많이 배워라. 기상을 죽이지 마라”는 아버지의 가르침과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동네 서당과 단양의 대강 보통학교, 예천의 대창학원 등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한학과 신학문을 배웠다. 인간의 삶과 진실, 세계와 우주의 질서 그 비밀에 접근하는 열쇠를 발견한 것처럼 책을 탐독했고 틈만 나면 사색에 젖어 들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 작가들의 책을 즐겨 읽었다. 그러던 중 “책이나 선생들로부터 들은 것 말고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네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는 예천 서악사 화산(華山)스님의 말씀에 크게 느낀 바 있어 머슴과 같은 행자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15세(1928년)였다. 1932년 19세 때 김용사에서 낙순화상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은 아이 때의 이름 그대로 홍근이다. 

1935년(22세) 금오(金烏)스님을 모시고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법호를 서암(西庵)이라 했다. 1938년(25세) 종비장학생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고된 유학생활에 힘든 노동과 굶주림으로 육체가 병들어 폐결핵에 걸렸다. 귀국하여 1941년(28세) 김용사 선원에서 수선안거에 들어갔다. 1942년 봄 철원 심원사에서 <화엄경>을 1년간 강의했다. 이후 금강산 마하연과 신계사에서 하안거를 마쳤다. 어느덧 몸에 있던 병마(病魔)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수행으로 병을 이긴 것이다. 가을이 되자 다시 길을 떠나 묘향산 백두산 등지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와 문경 대승사의 천연동굴에서 용맹정진 했다. 

1945년(32세) 광복이 되자 예천포교당에서 징병 징용을 당했다가 죽음의 땅에서 돌아온 동포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줌과 동시에 불교청년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계룡산 골짜기에 있는 나한굴이라는 천연동굴로 들어갔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살아서 이 바위굴에서 나가지 않으리라”는 굳은 각오로 목숨을 건 정진에 들어갔다. 머리는 산발이요 몸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났으나 의식은 되레 맑아졌다. 나중에는 잠도 잊고 먹는 것도 잊은 채 선정삼매(禪定三昧)의 날을 보냈다. 어느 날 한소리 크게 터졌다. 

 총무원장·종정 내려놓고 토굴로 …

‘본무생사(本無生死)’라.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한 갓 공허한 그림자처럼 사라진 것이다. 

계룡산에서 내려온 뒤에도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스님은 만공스님 회상인 정혜사, 한암스님이 계신 상원사 그리고 해인사, 망월사,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 계룡산 정진굴, 대승사 묘적암에서 정진했다. 1946~1948(33세~35세) 금오스님과의 인연으로 지리산 칠불암, 광야 상백운암, 보길도 남은사, 계룡산 사자암에서 정진했다. 칠불암에서의 ‘공부하다 죽을 각오를 한 정진’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1951년(38세) 이후부터는 경북 문경군 농암면에 있는 원적사에 주로 머물렀다. 범어사, 동화사, 함창포교당, 태백산 홍제암, 각화사 동암, 상주 청계산 토굴, 나주 다보사, 백양사, 지리산 묘향대, 천축사 무문관, 통도사 극락암, 제주 천왕사, 김용사 금선대, 상주 갑장사 등지에서도 수행열을 불태웠다. 

1970년(57세) 봉암사 조실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선덕(禪德)소임을 자청, 원적사를 오갔다. 1975년(62세) 조계종 제10대 총무원장을 맡아 어려운 종단사태를 수습하고 2개월 만에 사퇴했다. 1978년(65세) 이후에는 봉암사 조실로 머물렀다. 해이해진 승풍을 바로잡고 낙후된 가람을 중창했다. 수행환경을 위해 전국에서는 유일하게 산문(山門)을 막아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봉암사는 오늘날 ‘모든 수좌들의 고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91년(78세)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1993년(80세)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됐다. 이듬해 종정직과 함께 봉암사 조실까지 사임하고(탈 종단) 거제도, 삼천포, 팔공산 등지를 거쳐 태백산 자락에 토굴을 지어 무위정사(無爲精舍)라 이름하고 자유인으로 자적했다. 2001년(88세) 봉암사 대중들의 간청에 의하여 8년 만에 봉암사 염화실로 돌아와 한거(閒居)하다 2003년(90세) 3월29일 오전7시30분 봉암사 염화실에서 열반했다. 4월3일 봉암사 다비장에서 선원수좌회의장으로 영결식과 다비식을 가졌다. 생전 당신의 말씀에 따라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다. 

 금쪽같은 어록 

서암스님 열반 후 2018년 <서암 큰스님 회고록>, <서암 큰스님 법어집1 - 그건 내 부처가 아니다>, <서암 큰스님 법어집2 - 꿈을 깨면 내가 부처>, <서암 큰스님 법어집3 - 그대안의 부처를 보라>가 법륜스님(정토회) 주관으로 나왔다. 회고록은 스님의 말씀을 작가 이청이 엮었다. 

“아무리 이 세상이 혼탁해도 정신 한 번만 돌이키면 거기에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그 자리가 열립니다. 무슨 책을 보고 허둥대고 바깥으로 찾아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 하나 탁 돌이키면 영원히 빛나는 경전 모든 서적이 쏟아져 나오는 이치가 거기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바로 그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자기가 우주 전체를 산출해 냅니다. 그야말로 조물주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법어집3 ‘남을 도와주는 것이 자기를 도와주는 것’ 중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절대 내 안에 있는 내 부처를 찾는 것입니다. 내 밖에 있는 어떠한 다른 것은 비록 그것이 부처라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니 내 밖의 부처에 매달려 헤매지 말고 자기의 본래면목을 세워 바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부처가 나타나도 그런데 하물며 다른 어떠한 신통변화에 매달리겠느냐는 것이지요. 오직 자기 발견하는 것인데 자기를 발견하기 이전에는 다른 어떠한 아름다운 경계가 나타난다 해도 그것은 바른 수행, 깨달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확신을 갖고 공부해야 합니다.” (법어집1 ‘그건 네 부처가 아니다’ 중에서)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 노장은 누구며 그렇게 사는 건 어떤 것이며 또 그렇게 가는 건 어떤 것인가. 서암대종사의 일대기를 엮은 책을 보며 그 노장을 새삼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이 또한 후학이 할 일이라 생각한다. 

■ 도 움 말 : 법륜스님(정토회)  
■ 자     료 : 서암 큰스님 회고록 
                      서암 큰스님 법어집 3권 

[불교신문3445호/2018년12월1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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