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만사(人事萬事)’ … 수선사 법맥·선풍 이어가다

 

‘元세조 스승’ 예우 받은 충지
儒禪조화ㆍ유도이교 입장 천명
무념무사…선교융합 선풍 진작 

몽산덕이 선풍 받아들인 만항
‘뜻은 산, 마음은 바다처럼…’ 
우리나라 최초 ‘단경’ 간행해 

‘무언수(無言)’ 자칭한 복구
백양사서 세 차례 ‘전장법회’
장로 100명에 100일 법회도

‘인사만사(人事萬事)’라는 말이 있다. 조직이 이끌어지는데 한 인물에 의해 좌우되며, 어떤 인물이 배출되었느냐에 따라 그 조직의 존폐(存廢)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송광사에서 16국사가 배출됐지만, 16국사에 이르기까지 수선사(修禪社)는 꽃길만이 놓이지 않았다. 그나마 6세 충지, 10세 만항, 13세 복구가 등장하여 수선사의 법맥과 선풍이 전개될 수 있었다. 

 6세 원감국사 충지 

어느 산문이고 한 시대를 풍미할 때도 그렇지만 소리 없이 명맥을 이어가며 발전시켜갈 때도 몇몇 인물들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송광사 국사전에 모셔져 있는 수선사 6세 원감국사 충지,

수선사 6세 충지(止, 1226〜1293년)는 성은 위씨(魏氏), 속명은 원개(元凱), 시호는 원감국사(圓鑑國師)이다. 충지는 전라도 장흥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해 유학을 공부해 마쳤다. 17세에 사원시(司院試)를 모두 마쳤으며, 19세에 춘위(春)에 나아가 장원급제했다. 이후 영가서기(永嘉書記)에 부임해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곳에서도 뛰어난 문장력으로 이름을 날렸다. 충지는 명예가 점점 오를수록 출가코자 하는 마음 또한 간절했다. 하지만 부모의 허락을 받지 못해 차일피일 출가를 미루다가 29세에 선원사 5세 원오국사 천영에게 출가했다. 이후 비구계를 받고 수년 동안 여러 지역을 유행하며 머무는 곳마다 사찰을 불사하고, 어느 곳에서는 방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받아들이지 않다가 40세에 스승 원오국사의 뜻을 받아들여 경상도 김해 감로사(甘露寺) 주지가 됐다. 

충지는 이후 43세에 삼중대사(三重大師) 법계를 받고, 3년 후에 감로사에서 수선사로 옮겼다. 충지는 이 때도 수선사 법통을 이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무렵 고려는 원나라 지배로 인해 국가와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한 상태였다. 1274년, 원나라는 탐라를 정벌하고 탐라에 총관부를 두면서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수선사에 군량미 명목으로 전세(田稅)를 거두었다. 충지는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1260~1294년 재위)에게 전국의 승려들이 매우 고통 받고 있음을 글로 호소하는 ‘상대원황제표(上大元皇帝表)’를 올려서 빼앗겼던 전답(田畓)을 되돌려 받았다. 원나라 세조는 충지의 표문을 보고, 선사에게 감복 받아 고려에 사신을 보냈다. 고려 조정에서는 충지를 개경으로 불렀으나 선사는 개경으로 상경하지 않았다. 다시 조정에서 충지에게 원나라에 다녀올 것을 권유해 선사는 원나라에 들어갔다. 충지는 세조로부터 스승의 예를 받았으며, 귀국할 때는 금란가사, 벽수장삼(碧繡長衫), 흰 불자를 하사받았다. 
 귀국한 이듬해 충렬왕은 충지에게 ‘대선사(大禪師)’ 법계를 내렸다. 

충지는 1284년 58세에 수선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옮겨 갔다. 이곳에 머문 지 2년 무렵, 원오국사가 그를 수선사의 사주로 추천한 뒤 입적했다. 이후 충지는 수선사의 제6세가 됐다. 충지는 사세 회복을 위해 선원사에서 수선사로 대장경을 옮겨 왔다. 충지는 67세에 삭발하고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제자들에게 “생사가 있는 것은 인생의 일이다. 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들은 잘 있거라”는 게송을 남겼다. 정오가 지나자 분향하고 축원을 올린 뒤 선상(禪床)에 올라 ‘설하지만 본래 설한 것도 없다(說本無說)’라고 한 뒤 문인들에게 이런 열반송을 남겼다. 
 “돌아보니 세상살이 67년인데, 오늘 아침 모든 일을 마쳤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평탄하고, 길거리가 분명하니 어찌 길을 잃겠는가? 손에는 주장자 하나뿐이지만, 가는 길에 다리가 피로하지 않을 것이 또한 기쁘구나”라는 게송을 남기고 입적했다. 

충지의 사상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 충지는 고려 중기 사굴산문을 영도하던 혜조국사 담진을 성사(聖師)라고 칭하며 보조국사 지눌과 동등하게 존경을 표했다. 그러면서 고려 중기 사굴산문과 수선사의 연계성을 밝히고 있다. 한편 수선사 3세 몽여, 4세 혼원을 거쳐 지눌의 선풍이 자신에게 이르렀음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둘째, 충지는 지눌의 선과는 다르게 유학사상과 결합된 선풍(禪風)이었다. 그는 유학자들처럼 천명을 믿었고, 유선조화(儒禪調和)의 사상을 드러냈으며, 상제상천(上帝上天)의 신앙을 통해 유도이교(儒道二敎)적인 입장을 천명하기도 했다. 충지는 사림(詞林)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과 시가 매우 뛰어나 당대 유학자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충지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했고, 당시 출가할 나이가 29세라면, 결코 적지 않은 나이다. 세속의 삶이 길었던 터라 유학적 학문이 깊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셋째, 충지는 경율론 삼장에 밝았는데, 수선사에 사주로 있으면서 <원각경소>를 강설하는 등 선교융합적인 선풍을 진작시켰고, 지눌의 종풍을 계승코자 노력했던 점이 보인다. 한편 충지는 성품이 자유로운 풍의 초연함을 즐겼으며, 무념무사(無念無事)를 으뜸으로 삼았다. 
 넷째, 충지에게 미타신앙과 관음신앙이 드러나 있는데, 수선사에서는 볼 수 없는 공덕신앙을 엿볼 수 있다. 
 충지가 활동하던 만년에는 예전보다 불교계에서 주도권이 상실됐다. 충지가 입적한지 22년만인 1314년에 송광사 남암(南庵, 현 감로암)의 옛터 북쪽에 원감국사비를 세웠다. 이후 병화(兵火)로 파괴됐으나 다시 그 자리에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원감국사집> 1권이 있으며, <동문선>에도 시와 글이 몇 편 수록되어 있다. 충렬왕은 원감국사(圓鑑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수선사는 6세 충지 이후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나마 수선사 선풍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10세 혜감국사 만항 대에 이르러서이다. 

 10세 혜감국사 만항

10세 혜감국사 만항.

“산처럼 뜻을 세우고, 바다처럼 편한 마음을 지녀라(立志如山 安心似海).” 이 구절은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구절이다. 저 게송을 읊은 선사는 수선사 10세 혜감국사 만항(慧鑑國師 萬恒, 1249~1315년)이다. 만항은 속성이 박씨(朴氏), 진사 박경승(朴景升)의 아들로 유교 집안 출신이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하다 불교에 관심을 갖고 14세에 원오국사 천영에게 출가했다. 이후 여러 곳을 행각하며 수행하였고, 삼장사 주지를 거쳐 낭월사, 운흥사, 선원사 등지에서 주지를 역임했다. 1313년 남원 만행산 보현사를 창건한 뒤에 그는 충렬왕의 부탁으로 삼장사에 머물렀다. 만항은 충선왕의 귀의를 받아 영안궁(永安宮)에서 선리(禪理)를 강론했다. 이후 만년에 만항은 조계산 송광사에 머물다가 입적하기 전에 남원 보현사로 옮겨갔다. 후에 ‘혜감국사(慧鑑國師)’로 추존되었으며, 탑호는 광조(廣照)이다. 제자는 700여 명에 이르며 이중엔 사대부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가운데 대표 제자가 보감국사 혼구(混丘, 1250~1322년)이다. 

만항의 선풍은 특이하다. 지눌의 선풍을 계승하면서도 몽산덕이(蒙山德異, 1231〜1308년)의 선풍을 받아들인 대표적인 인물이다. 만항은 좀 더 적극적으로 선법을 구하고자 덕이와 서신 교류를 했다. 곧 만항이 덕이에게 게송을 보내자, 덕이는 만항에게 10수의 게(偈)로 화답하면서 선사에게 ‘고담(古潭)’이라는 호를 주었다. 또한 만항은 1298년 상인을 통해 덕이본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을 구하여 1300여년에 단경을 선원사에서 간행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 <육조단경>이다. 만항이 편찬한 덕이본 <법보단경>은 우리나라 납자들의 기본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다. 만항이 덕이의 선풍을 받아들인 이래 근자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선에 덕이의 선풍이 전개되고 있다. 

 13세 각진국사 복구 

13세 각진국사 복구스님의 진영,

복구(復丘, 1270~1356년)는 스스로를 무언수(無言)라고 했다. 8세 때, 백암산(白巖山) 정토사(현 백양사) 일린(一麟)에게 출가해 10세 때 수선사 5세 천영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20세 때 선과(禪科)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다. 1320년 50세에 수선사 13세가 되어 80세까지 30년간 수선사를 맡았다. 이후 백암산 정토사로 옮겨가 머물렀는데, 이 무렵 복구는 각엄왕사(覺儼王師)로 책봉됐다. 이어서 원찰로 지은 영광 불갑사에 머물던 복구는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왕사가 됐다. 그는 수선사계 출신 가운데 4세 혼원에 이어 생존 시에 왕사로 책봉된 인물이다. 복구는 당시 재상 이존비(1233~1287년, 고려말 문신)의 차남이다. 이존비의 비문에 복구에 대해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다. “차남 정행은 수선사의 제5조인 원오국사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조계종 사굴산에서 출가수행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복구는 1341년, 1348년, 1353년 등 세 차례에 걸쳐 백암산 정토사(현 백양사)에서 전장법회(轉藏法會)를 개최했다. 전장법회는 승려와 재가자들이 낮에는 삼장을 읽고, 밤에는 조도(祖道)를 행하며 참선하는 것을 말한다. 조계산 수선사 제14대 주지인 정혜국사를 회주로 청하고, 여러 사찰의 장로 100여 명을 초청해 100일간 대법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영광 불갑사에 있는 각진국사 비.

[불교신문3443호/2018년11월24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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