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일대서 전통양식 계승하며 12점 주종(鑄鐘)

해남 장흥 순천 지역 중심 활동
단룡 용뉴 음통 지닌 전통 양식 
‘옴’자와 축소 연곽대 특징 보여

법천사명 해남대흥사종 ‘대표작’
선암사원통전종은 1993년 ‘도난’ 

잔불암명 대흥사종, 1709년, 윤상백.

18세기 초반까지 꾸준히 활동을 이어왔던 사인비구(思印比丘)의 승장 계열은 계일(戒日)이 만든 숭암사명(崇岩寺銘) 천은사종(泉隱寺鐘, 1715년)을 끝으로 그 명맥이 끊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들 계열과 다르지만 소백산 대흥사종(小白山 大興寺鐘, 1742)을 제작했던 해철, 범하, 광담(海哲, 梵荷, 廣談)에 의해 승장들의 활동이 잠시 유지되다가 이들의 활동을 마지막으로 18세기의 승려 장인이나 그 계열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대신 직업적으로 활동한 사장(私匠)들은 18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각 지역마다 독특한 계보와 양식적 특징을 형성하며 가업(家業) 내지는 집단을 이루며 활발한 주종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18~19세기 사장들의 계보는 약 10여 개의 집단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윤씨 일파(尹氏 一派)는 18세기 전반부터 중엽까지 전라좌도의 해남, 장흥, 순천(海南, 長興, 順天)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주종활동을 하였던 윤취성, 윤상백, 윤종백, 윤취은, 윤취삼, 윤광형(尹就成, 尹尙伯, 尹宗佰, 尹就殷, 尹就三, 尹光衡)과 같은 인물들과 이 계열에서 조역(助役)으로 활동한 한천석(韓千石)을 들 수 있다. 

이들이 만든 종은 단룡(單龍)의 용뉴와 음통을 갖추고 천판 외연에는 간략화 된 입상연판문대(立狀蓮瓣文帶)와 상, 하대를 두어 문양을 장식하는 전형적인 전통형(傳統形) 범종 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이들 범종에는 공통적으로 상대 위나 아래로 구슬처럼 돌기된 연주문(連珠文)을 돌린다거나 원권(圓圈)의 ‘옴’자 범자문과 함께 매우 축소된 연곽대(蓮廓帶)의 모습이 특징적이다. 

이 계열의 장인 집단은 그 이름과 돌림자에서 볼 수 있듯이 같은 집안 내지 혈연 관계로 추정되는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이 1703년에 만들어진 보적사명 대흥사종(寶積寺銘 大興寺鐘)으로서 제작자는 윤취성(尹就成)이다, 이후 법천사명 대흥사종(法泉寺銘 大興寺鐘, 1709)을 제작하였던 윤상백(尹尙伯)을 필두로 하여 윤종백(尹宗佰)의 진불암명 대흥사종(眞佛庵銘 大興寺鐘, 1709), 운흥사명 화엄사종(雲興寺銘 華嚴寺鐘, 1711)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윤취은(尹就殷)이 만든 여둔사명 송광사종(余屯寺銘 松廣寺鐘松廣寺鐘, 1716), 선암사 원통전종(仙巖寺圓通殿鐘, 1730)으로, 다시 윤취삼(尹就三)의 정방사명 신흥사종(井方寺銘 神興寺鐘, 1751), 윤광형(尹光衡)이 만든 보림사명정암명 내장사종(寶林寺明正庵銘 內藏寺鐘, 1768)으로 그 계보가 연결된다. 

법천사명 대흥사종, 1709년, 윤종백.

이러한 집단에서 한천석(韓千石)이라는 인물은 운흥사종(雲興寺鐘, 1711)을 제작할 당시에는 윤종백의 조역으로 참여하게 되며 다시 송광사종(1716), 선암사 원통전종(1730)을 제작할 때도 윤취은의 조역으로만 참여한 사실을 볼 수 있어 꾸준히 주종 활동을 한 인물이지만 수장(首匠)으로의 독립을 이루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뒤늦은 1790년에 제작된 용주사(龍珠寺) 효행박물관 소장 용주사종의 제작자로 기록된 윤덕칭, 윤덕흥. 윤계원(尹德稱, 尹德興, 尹啓元)의 3인 역시 윤씨 일파로 추정되어 이 계열의 거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범종으로 확인된다. 이를 통해 현재까지 윤씨 일파에 의해 제작된 작품은 1729년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금고를 포함하여 모두 12점을 헤아린다. 

윤씨 일파 범종 가운데 대표적인 두 점의 범종을 살펴보면 우선 강희48년명 법천사명(康熙四十八年法泉寺銘)을 지닌 해남(海南) 대흥사종은 높이 100.0cm이며 현재는 대흥사 유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명문에 보이듯 원래 승달산(僧達山) 법천사(法泉寺)용으로 170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외형은 기본적으로 한국 전통형을 따르고 있으나 18세기 들어와 진전된 새로운 형식화를 잘 보여준다. 즉 천판 상부에 표현된 용뉴는 가는 목 위로 갈기가 표현되었고 얼굴은 앞으로 높이 쳐들어 입안에 보주를 물고 있다. 특히 다른 종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요소로서 용이 네발을 높이 세워 어색한 자세로 천판을 딛고 있는 모습이지만 얼굴과 목이 매우 작게 표현되어 용보다 뱀에 가까운 형상이다. 용뉴의 목 뒤로는 가늘면서 짧은 음통이 부착되었다. 천판 외연을 돌아가며 중첩 시문된 입상연판문대가 돌출되었고 아래로 붙은 상대에는 사각형으로 도식화된 두 겹의 연판문을 장식하였다. 

또한 이 하대의 하단부를 둥글게 돌아가며 구슬 모양으로 돌출된 연주문(聯珠文)을 연결하여 장식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상대에서 조금 아래쪽으로 떨어져 1줄의 융기선이 둘러져 있으며 이 선 바로 아래에는 원형 테두리 안에 ‘옴’자의 범자문을 연곽 상부에 해당되는 곳에 1개씩 양각으로 장식하였다. 범자문 아래의 종신 중단쯤에는 매우 작아진 크기의 방형 연곽을 4방향에 배치하였는데, 연곽대에는 도식적인 형태의 빗금무늬가 장식되고 연곽 내부에는 마름쇠 모양의 4잎으로 구성된 화판 가운데로 작은 꼭지 모양의 연뢰(蓮잎)가 9개씩 돌출되었다. 이에 반해 연곽과 연곽 사이에 부조된 보살입상은 종신에 비해 매우 크게 묘사되어 있다. 

선암사 원통전종, 1730년, 윤취은, 한천석, 현 소재미상.

이 보살상은 구름 위에서 왼쪽으로 몸을 돌려 합장한 자세로서 머리 위에는 크고 화려한 보관이 쓰고 있으며 소매 옆으로는 날개 장식이 첨가되어 제석 · 범천형 보살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연곽이나 상, 하대와 같은 세부 표현에 비해 보살상은 비교적 세련된 모습으로 처리된 것은 당시 불화에 나타나는 도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종구(鐘口)에 표현된 하대는 그 중단에 한 줄의 선을 첨가하여 위, 아래단으로 나누어 단순한 형태의 당초문을 시문하였고 하대 위의 종신 한쪽 면에는 면을 돌아가며 양각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 보이는 종의 제작자는 편수(片手) 윤상백(尹尙伯)을 수장으로 서필성(徐必成), 김원학(金元鶴)과 함께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옹정8년(雍正八年)인 1730년에 만들어진 선암사 원통전(仙巖寺 圓通殿) 종은 명문에 의하면 원래 전라도 함평(全羅道 咸平)에 있던 절에서 옮겨진 것으로서 아쉽게 1993년 도난되었다, 본 글에서는 이 종의 소재 파악을 위해 비록 상태가 좋지 않으나 필자가 촬영할 당시의 사진을 게재하여 환수를 희망해 본다. 종의 높이는 71.5cm로서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18세기에 만들어진 조선 후기 범종 가운데 전통 양식을 가장 충실히 계승한 범종으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종신에 비해 크게 묘사된 용뉴는 한 마리의 단룡으로 구성되어 머리를 천판에 붙인 채 앞을 바라보고 있으며 쳐든 발 위로는 보주를 움켜쥔 모습이다. 용뉴 뒤로는 대나무 모양의 마디를 구획한 짧은 음통이 부착되었다. 

특히 천판 외연에는 앞서의 윤종백 범종에 보이는 입상연판문대 아래 돌출된 연주문대를 두른 모습과 달리 아예 입상연판문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둥그렇게 돌아가며 작은 구슬문을 장식한 점이 흥미롭다. 윤씨 일파의 특징적인 상대 표현을 따르고 있지만 어떤 이유인지 이 부분에서 약간의 변형을 시도했다. 이는 윤취삼, 윤광형(尹就三, 尹光衡)에 의해 제작된 정방사명 신흥사종(1751)에서 다시 상대 위로 입상연판문대를 가미한 모습으로 바뀌는 점에서 선암사종은 이러한 양식적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짐작된다. 

송광사종, 1716년, 윤취은, 한천석.

이 보살상은 몸을 왼쪽으로 돌린 채 합장한 자세로서 천의 주위에 날개나 비늘 같은 장식이 첨가되고 옷자락 안으로 꽃무늬가 촘촘히 시문된 제석 범천형 보살상이다. 넓게 퍼진 상반신에 비해 짧아진 하체는 비례감을 잃어 불안정하게 느껴진다. 종신의 하대와 보살상 밑의 여백에는 별도의 명문판으로 구획된 양각 명문이 둥글게 돌아가며 새겨져 있는데, 제작자로 기록된 윤취은(尹就殷)과 한천석(韓千石)은 이 종 외에 완주 송광사종(完州 松廣寺鐘, 1716)을 함께 제작하였다. 상대에는 불규칙적인 당초문과 그 하단부에 파도 형태의 좁은 띠를 둘렀으며 동일한 문양이 하대에도 시문되었다. 상대 밑으로 조금 떨어진 종신 중단쯤에는 방형의 연곽을 사방에 두고 연곽대에는 안팎에 상하대 문양과 동일한 당초문과 파도문을 장식하였다. 폭이 좁아진 연곽의 내부에는 별 모양으로 도식화된 화문좌 가운데 낮게 돌기된 연뢰를 9개씩 배치하였다. 연곽과 연곽 사이의 여백 면에는 위로 원형 테두리를 두른 ‘옴’자의 범자문을 장식하고 그 아래로 1구씩 합장한 모습의 보살입상이 사면에 부조되었다. 

[불교신문3442호/2018년11월21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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