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지눌 이후 35년간 ‘송광사 산문’ 최절정

 

 

스위스의 분석심리학자 칼 융(C.G. Jung, 1875˜1961년)은 “선(禪)은 동양의 정신 가운데서도 불교의 방대한 사상체계를 훌륭하게 수용하여 핀 중국 정신의 가장 놀라운 꽃”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선사상’이라고 명칭할 때도 북방불교의 조사선에서 비롯해 발전된 묵조선과 간화선의 선을 지칭한다. 근자에 들어서 우리나라에 초기불교가 불교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위빠사나 수행이 일반화됐다. 게다가 근원지조차 불분명한 제3의 명상까지 한국에 넘쳐나고 있다. 필자는 우리나라 전통 수행인 조사선과 간화선이 최고라고 주장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살리고픈 간절함이다. 

한국 간화선의 기틀이 세워진 것은 12세기 수선사(修禪社)와 선원사이다. 고려시대에 보조 지눌을 비롯해 수선사(修禪社)의 사주(社主)로서 국사 칭호를 받았던 15인과 조선 초기에 송광사를 중창하였던 고봉(高峰)에 이르기까지를 ‘16국사’라고 칭한다. 이전에 수선사 1세 지눌과 2세인 혜심을 언급했었다. 송광사가 16국사를 배출함으로써 이 도량은 우리나라 삼보 사찰 중의 하나인 ‘승보사찰’이다. 송광사 국사전에 16국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보조국사 지눌은 송광사 경내 관음전 뒤쪽에 모셔져 있으며, 2세 진각국사 혜심의 부도는 송광사 암자 광원암, 3세 청진국사 부도는 청진암, 5세 원오국사 부도는 보성 대원사, 6세 원감국사 부도는 묘적암, 7세 자정국사 부도는 불일암, 8세 자각국사 부도는 감로암 북쪽 언덕, 13세 각진국사 부도는 영광 불갑사, 16세 고봉국사 부도는 광원암과 보조암 사이에 모셔져 있다. 

청진국사 몽여 

몽여(夢如, ?〜1252년)는 수선사 16국사 가운데 제3세이다. 시호는 청진국사이다. 몽여가 수선사에서 활약한 시기는 스승 혜심이 입적한 1234년부터 그가 입적하기까지의 18년간으로 추정된다. 이때 고려는 거란과 몽골의 침략으로 기복불교가 크게 성행하고 있던 시기로써 궁중에서는 거의 매월 복을 비는 여러 가지 도량이 열리고 있었고, 황룡사 9층탑이 몽골에 의해 불타는 등 침체 일로를 걷고 있었다. 몽여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여러 기록을 통합해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몽여는 수선사 2세인 혜심의 비를 세우고, 혜심의 <선문염송> 발문을 기록했다. 이후 <선문염송>에 347칙을 첨가하고 보완해 선문3가(禪門三家) 염송집(혜심의 선문염송에서 운문종, 조동종, 임제종 3가의 염송만을 뽑은 것)을 간행했다. 몽여는 수선사의 참신한 선풍을 잇는데 공헌했다. 둘째, 몽여는 지겸(志謙, 1158˜1210년)이 만년에 편찬한 <종문원상집(宗門圓相集)>의 발문을 썼다. 셋째, 가지산문의 일연 선사와도 도법을 논하는 인연이었는데, 일연에게 조동종 사상의 중요성을 인식케 해 일연선사가 이를 중점적으로 연구토록 했다. 몽여는 당시 법왕으로 추앙받으면서 혼원, 천영 등 제자를 배출했다. 1252년 수선사를 제4세 혼원에게 물려주고 입적했다. 몽여는 당대 문호인 백운거사 이규보와도 자주 교류했다. 이규보가 몽여에게 흑즉화를 보내면서 몽여를 찬탄한 글이 <동문선> 권51에 전한다. 

진명국사 혼원

수선사 제4세 혼원(混元, 1191〜1271년)은 성이 이씨, 호는 충경(녑鏡)으로 황해도 수안(遂安) 출신이다. 혼원은 사굴산문 범일의 운손(雲孫, 범일로부터 9대손)인 종헌(宗軒)에게 출가했다. 13세 때 외삼촌인 종헌선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사굴산문에서 선풍을 전개하다가 선선(禪選)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했다. 혼원은 쌍봉사의 청우(靑牛)를 모시고 정진하다가 수선사 제2세 혜심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후 수선사 제3세인 청진국사 몽여의 지도를 받아 수행했다. 당시 권력자 최우가 그의 도행(道行)을 흠모해 왕에게 아뢰어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내리고 정혜사의 주지로 임명했다. 그러나 혼원은 곧 바로 사양하고 전국을 유행하며 법을 설했다. 

1245년 54세에 최우가 강화도에 선원사를 창건하고 낙성회를 열면서 혼원에게 주맹(主盟, 법회의 책임자)이 될 것을 청하자, 혼원은 승려 200여명을 이끌고 강화도에 들어가 선원사에 머물렀다. 혼원이 선원사에 머물 당시 국왕과 대신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산으로 돌아갈 것을 청했다. 1252년 몽여가 입적하자, 혼원은 왕으로부터 조계산 수선사의 제4세 사주(社主)로 임명받고, 이때부터 수선사에서 선풍을 펼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혼원은 혜심이 머물렀던 단속사(斷俗寺)를 감독하는 도감(都監)으로 임명받았다. 

65세의 혼원은 천영에게 수선사 사주 자리를 물려주고 은거했으나 다시 고종의 부름을 받고 자운사로 옮겼으며, 1259년 왕사로 책봉됐다. 1260년 원종이 즉위한 뒤에도 특별히 예우하고 존숭했지만 다음해 다시 수선사로 돌아와 설법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선사는 80세까지 왕사의 자리에서 불교계를 주도했으며, 늘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제도했다. 혼원은 솔직담백하면서도 해학이 있어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지냈다. 혼원은 수선사 선풍을 여러 지역에까지 널리 펼쳤으며, 스승의 선풍을 본받아 선교융합적인 간화선을 계승 발전시켰다. 80세에 혼원이 입적한 후에 국사로 추증됐다. 시호는 진명(眞明), 탑호는 보광(普光)이다. 

원오국사 천영 

천영(天英, 1215〜1286)은 양씨(梁氏), 호는 충경(鏡), 전라북도 남원 출신이다. 조계산 수선사 16국사 중 제5세이다.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으며, 자질이 뛰어났다. 천영은 1230년 15세에 수선사 제2세인 진각국사 혜심에게 득도했다. 3년 후에 담선법회의 좌원(座元)이 됐으며, 1236년 선선(禪選)의 중상상과(中上上科)에 급제했다. 이후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수선사 제3세인 청진국사의 교화를 받고, 제4세인 진명국사 혼원을 스승으로 삼았다. 이후 천영은 법계인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돼 단속사에 머물면서 1249년 최우가 창건한 창복사(昌福寺)의 주맹(主盟)이 됐다. 이듬해에는 선원사의 법주(法主)가 되는 동시에 보제사와 9산선문의 주맹이 됐다. 이때 천영은 조계종의 선풍을 진작시키며, <법보단경> 등 서적을 간행했다. 1256년 41세에 천영은 조계산 수선사의 제5세가 돼 입적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보내며 선풍을 떨쳤다. 천영이 송광사에 주석하는 동안 고려 왕실에서는 고종, 원종, 충렬왕 등 세 임금이 교체됐으나 천영에 대한 귀의는 변함이 없었다. 충렬왕은 천영을 서울로 초빙해 가까이 모시고자 사신을 보냈으나 선사는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천영은 너그럽고 자애로운 성품으로 제자들을 대해 그의 문하에는 늘 사람이 붐볐다. 71세에 청을 받아 그가 일찍이 중창하였던 불대사(佛臺寺)에 갔다가 그곳에서 입적했다. 충렬왕은 자진원오(慈眞圓悟)라는 시호와 정조(靜照)라는 탑호를 내렸다. 제자에는 굉묵(宏默), 충지(녑止), 명우(明友), 굉소(宏紹), 신화(神化), 만항(萬恒) 등으로, 당대의 큰 제자들을 배출했다. 충지는 그의 뒤를 이어 조계산의 제6세이고, 제7세 일인, 제8세 정열, 제10세 만항, 제11세 자원, 제13세 복구가 모두 천영의 제자이다. 보조지눌 이후부터 5세인 천영에 이르기까지 35년간 송광사 산문이 최절정을 이루었다.

[불교신문3441호/2018년11월17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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