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민 기자 ‘해보니’ 체험기

불교여성개발원이 2004년 제작한 ‘오계 수지 자기 점검표’에 맞게 살아보려 했지만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마따나 실수가 늘 반복됐다. “부드러운 말, 긍정의 말하기” “일회용품 쓰지 않기” “가르치려 들지 말기” 등 맞춤형 15가지 계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1)매일 새벽 예불 올리고 출근해보니…
(2)오후불식 해보니…3.6kg 줄었다 두뇌도 멈췄다
(3)시도때도 없이 사경 해보니…쓰면 사라진다 ‘잡념’
(4)공양주 보살로 살아보니…쉴 틈 없는 15시간 중노동

(5)매일 108배, 철야 3000배 해보니...부처님마저 미웠다
(6)오계 실천해보니…웃으며 산다 날마다 즐겁다

언제부턴가 “저 불자에요” 떳떳하게 말할 수 없었다. “종교가 어떻게 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불교’라 답하면서도 스스로 “내가 정말 불자 맞나?” “불자답게 살고 있나?” 되묻다 머뭇거리는 일이 반복됐다. 뉴스에 나올 정도로 잔인하게 남을 고문하거나 죽이지 않으니 이것으로 됐다든지, 사기를 쳐 누군가의 등골을 빼먹을 정도로 파렴치하지 않으니 이만하면 괜찮다든지, 끝없는 자기 합리화에 빠지곤 했다. 불평불만이 많아 주위를 피곤하게 만들고 욱하는 성격을 참지 못해 기어이 성깔을 부려 불행의 씨앗을 스스로 심는 다는 걸 잘 알면서도 ‘불교를 좋아하니 불자 맞다’고 생각했다. “법명 있고 불교대학 다녔다고 다 불자 아니다. 불자답게 살지를 못하는데...”라는 말이 가슴을 치기 전까지 말이다.

“불자답게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삼귀의 오계를 수지하고 매일 절에 가 기도를 한다고 해서, 불사 비용으로 수억원을 통 크게 내놓는다고 해서, 경전 구절을 한 토시도 빼놓지 않고 줄줄 왼다고 해서 불자라 할 수 있을까? “불자라면 모름지기 오계부터 잘 지켜야 한다”는 어느 스님 말마따나 초심으로 돌아가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 등 5가지 계부터 제대로 실천해보기로 했다.

착하게 살자

지난 5일 ‘오계의 생활화’를 다짐한 첫 날, “오늘부터 착하게 살자”를 머릿속에 되뇌이며 출근길에 올랐다. 손 뻗을 공간 하나 없는 지하철 1호선, 콩나물 시루 같은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 짜증이 솟구쳤다. 비좁은 공간에 몸이 닿는 것도 신경쓰이는데 재채기까지 하며 세균을 덩어리째 옮겨 주는 사람들 때문에 미간에 주름이 ‘팍’ 잡힌 채 한숨만 푹푹 내쉬던 찰나, 내려야 할 곳을 두 정거장이나 지나친 걸 확인했다. “이런 X!” 욕이 절로 나왔다. 순간적으로 내뱉은 거친 말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아 참, 불자답게 살기로 했지”하고 즉시 참회해야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첫날부터 시련은 계속됐다. 인터뷰를 위해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하던 길, 40분 가량 지나자 기사님이 종점이라며 내리라는 손짓을 보내는 것 아닌가. 찝찝한 기분에 “여기가 양재역인가요?” 묻자 “아이고~ 잘못 타셨네. 반대 방향으로 타셨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버스타고 올라온 길을 다시 돌아 내려간다 해도 약속 시간을 훨씬 넘어서야 도착할 터였다. “아 짜증나.”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입 밖에 낸 말에 또 다시 입술을 쥐어 뜯어야 했다.

돌이켜 보니

구체적인 수칙이 필요했다. ‘살도음망주’라 해봤자 피부에 와 닿지 않으니 자기 합리화의 끝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으니’하며 스스로 다독이며 술 한 잔,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뭐’하며 생각 없이 고기를 입으로 가져가기도 여러 번,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수십년 동안 입버릇처럼 굳어져 버린 ‘못된 말투’였다.

거짓을 말하거나(망어), 억지로 꾸며내거나(기어), 욕설을 뱉거나(악구), 이간질을 하거나(양설) 어느 한 부분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늘 하던 대로 생각 없이 내뱉고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아 후회하기 일쑤였다. 매일 저녁 불교여성개발원이 내놓은 ‘오계 수지 자기 점검표’에 따라 12개 항목을 체크하며 하루를 돌아봤지만 “역시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해”부터 “아냐 내일부터 제대로 하자”까지 도돌이표 같은 자책과 다짐이 반복됐다.

막연하게만 생각해서는 현실 속 오계 실천이 어렵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닌 말로 인생을 망치기로 작정하지 않은 이상, 살인을 할 것도 아니고 도둑질을 할 것도 아니고. 성욕도 과하지 않으니 성폭행이나 성추행을 할 것도 아니고 고기 먹고 술 마시는 것이야 타인에게 크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마음만 먹으면 자제할 수도 있지 않은가. 당장 오늘 꼰대에게 치이고 아랫사람에게 무시당하며 전쟁을 치러야 하는 직장인, 악덕 업주와 진상 고객에게 짓밟히면서도 매일 악다구니 하며 버텨내야 하는 자영업자에게 마냥 ‘마음으로 죽이지 말라(불살생)’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라(불사음)’는 말은 너무 잔인한 말 아닐까.

괴로움 끝에

실수와 후회로 점철되던 일상 4일째, “계를 지키지 못하니 스트레스만 쌓인다” “하루 하루가 너무 괴롭다”는 소리에 상담을 청하자 조계종 교육아사리 원영스님이 왜곡과 오해부터 풀라 조언했다. “계와 율부터 구분하라”던 스님은 “자율적 실천에 해당하는 계와 강제적 구속력이 있는 율은 다르니 개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며 때문에 ‘부조리도 참아가며 무조건 착하게 살라’는 말은 계와 율을 혼동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했다. 스님이 강조한 것은 무엇보다 끄달리면 안 된다는 것. 스님은 “불교는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종교”라며 “지금 당장 계를 지키지 못해 매순간 괴로워한다면 지키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아침에 10분 더 일찍 일어나겠다거나 오늘은 담배를 한 개피 라도 덜 피워보겠다거나 하는 것처럼 사소하지만 지킬 수 있는 좋은 습관부터 길들이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맞는 적극적 오계의 실천이라는 스님 조언에 따라 고쳐야 할 습관을 써내려가는 것부터 다시 시작했다. “부정적인 말 대신 부드러운 말하기” “아니다 싶어도 버럭하지 말고 일단 침묵하기” “환경을 생각해 일회용 포장에 든 제품은 먹지 않기” “택시 말고 대중교통 우선 이용하기” 등 1인 맞춤형 계를 15가지로 다시 만들었다.

알아차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게 사람이다. 일회용 컵을 쓰지 않겠다고 텀블러를 깨끗이 씻고 나서는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닦겠다고 휴지 3~4장을 아무렇지 않게 쓱쓱 뽑아 쓰는가 하면, 검소하게 살겠다며 ‘지름신’ 올 때마다 가득 쟁여둔 인터넷 쇼핑몰 장바구니를 두 눈 질끈 감고 비워놓고 나서는 지금 당장 입지도 않을 여름옷을 기어이 사고 말았다. “바쁘니?” 소리에 그냥 “네”하면 될 것을 “한가하진 않은데요?” 받아치고는 또 다시 참회하길 수차례. 예전 같았으면 “다시 태어나야 하나” 생각했겠지만 그 때 그 때마다 내 안에 일어나는 감정을 살피며 “또 실수했구나, 다음에 잘하면 되지” 다독이고 나니 더 이상 스스로를 옥죄지 않아도 됐다. ‘버럭!’ 하다가도 금방 참회하니 신기하게도 ‘화’의 찌꺼기가 남지 않았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도 얻었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어떻게 나한테 이래” 생각하며 두고두고 분노를 곱씹을 일이 일어도 그 씨앗을 내 안에서 찾다보면 어느새 화가 수그러드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대 안의 호랑이를 길들여라> 틱낫한 스님이 “연민 이외에 화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 것처럼 연민으로 상대를 보게 되니 부정적인 말 10개 중 1개는 삼키게 됐다.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말, 친절한 말을 하려 노력하니 꽤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감정을 참지 않고 풀어 다스리니 묶일 것이 없었다. 메인 것 없으니 자유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자답게 산다는 건 결국 살아있는 모든 것에 친절해진다는 것이다. 그 안에는 남 뿐만 아니라 나 또한 포함된다. 부정적인 에너지 대신 긍정의 에너지를 전해줄 수 있는 따뜻한 말 한 마디, 자주 쓰는 말에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긍정의 다섯 글자를 한번 더 보태는 것,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으면 아예 침묵하는 것도 불망어를 지키는 것이다. 자신을 괴롭게 만든 사람에게도 연민의 마음으로 앙갚음 대신 칭찬 한 마디, 커피 한 잔을 건네는 것도 불살생 실천이라는 걸 깨달았다. 웃으니 즐거웠다.

바야흐로 히스테리의 날들이다. 세상이 금방 바뀔 것 같아도 하루가 멀다하고 인면수심 흉악범죄가 뉴스를 도배하고 ‘관계에서 오는 고통’ ‘남에겐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 직장 상사든 부하든, 유명인이든 무명인이든 저마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자답게 산다는 건 결국 나를 위한 일, 세상을 밝히는 일이다.

법륜스님은 “팔만대장경을 줄줄 외운다 해도 자기 안의 번뇌 하나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불자라 할 수 없다”고 했다. 불자라면, 자기 안을 살피는 일에 결코 소홀해지지 말자. 기운을 내게 하는 말 대신 부정적인 말로 누군가의 기력을 빼앗고 있지는 않은지, 감정의 찌꺼기를 버리지 못해 스스로 속을 곪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오계 실천 별 거 없다. 좋은 사람, 싫은 사람 가리지 말고 당장이라도 말 한마디 예쁘게 건네 보자. 달콤한 말과 행동은 운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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