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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35> ‘삼국유사’ 저자 보각 일연한국사 인식 정립…위대한 인간 문화유산
  •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18.11.0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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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의 잘되고 잘못됨은
먼저 성의에 달린 것
홀아비는 미인을
도둑은 창고를 꿈꾸네

어찌 가을이 왔다고 해서
하룻밤 꿈만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세계에 이를 것인가?”

구족계 받고 수행할 무렵
‘구산문사선 으뜸’ 칭송…
남해분사대장도감 활용
3년간 판각불사 주도
78세 때 ‘국존’으로 책봉

보각국사 일연의 진신상.

<사기>는 상고시대의 오제(五帝)에서부터 한나라 무제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시켜 저술한 통사(通史)이다.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BC145~BC86년)은 당시 명장이던 이릉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중과부적으로 항복했는데, 한 무제가 몹시 화를 냈고 대신들까지도 이릉을 비난하고 나섰다. 사마천은 친구였던 이릉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분노를 사 감옥에 갇히게 됐다. 당시 사마천에게 주어진 형벌은 벌금 50만전이었고, 그것은 받아들이지 못하면 사형이나 궁형이었다. 사마천은 치욕스런 궁형을 선택했는데, 사관이었던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통사’를 저술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기>는 역대 중국 정사의 모범이 된 기전체(紀傳體)의 효시로써 200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중국사에서 역작으로 꼽는다. 이런 저력을 발휘한 인물은 그 나라의 보배이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이런 인물이 없을까? 바로 일연스님이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는 민중의 역사서로 한국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보각 일연(普覺一然, 1206~1289년) 선사의 속성은 김(金)씨,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이다. 처음의 자는 회연(晦然)이었으나 나중에 일연(一然)으로 바꿨다. 경주 장산군(章山郡, 현 경산시) 출신이다. 그의 부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의 가문은 지방의 향리층으로 짐작된다. 

군위 인각사 도량.

일연은 1214년, 9세에 전라도 광주 무량사(無量寺)에서 공부하다 13세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됐다. 구족계를 받은 뒤 여러 선문에서 수행했는데, 이 무렵 구산문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됐다. 1227년, 22세에 일연은 승과에서 장원 급제했다. 그 뒤 비슬산(琵瑟山) 보당암(寶幢庵)에서 수년 동안 참선했다.

31세 되던 해, 몽골이 침입하자, 혼란스러움을 안정시키고자 문수보살의 오자주(五字呪)를 염송했다. 이후 포산 묘문암(妙門庵)에 머물면서 “중생세계는 줄지도 않고, 부처세계는 늘지도 않는다”는 화두를 참구하다가 크게 깨친 바가 있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 법계를 받고, 41세에 선사(禪師) 법계를 받았다. 44세에 일연은 남해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면서 남해분사대장도감의 기능을 활용해 대장경 판각 불사를 3년간 주도했다. 1256년 51세에는 윤산의 길상암에 머물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2권을 저술했으며, 1259년 54세에 선종의 최고 법계인 대선사(大禪師) 법계를 받았다. 

1261년 56세에 일연은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 선월사(禪月社)에 머물렀는데, 이때 보조지눌의 법통을 계승했다. 일연이 가지산문 승려로서 지눌의 법맥을 이은 것이 아니라 지눌의 선풍을 계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강화도의 선월사는 전라도 수선사와 똑같은 힘을 갖고 있던 곳으로서 일연이 선월사의 사주였지만, 수선사 16국사에서는 제외돼 있기 때문이다. 1264년 59세에는 경상북도 영일군 운제산 오어사로 옮겨갔으며, 비슬산 인홍사의 주지가 돼 후학들을 지도했다. 63세 때는 조정에서 베푼 대장경 낙성회향법회를 주관했다. 69세에 선사가 비슬산 인홍사를 중수하자 원종은 ‘인흥사(仁興社)’ 편액을 하사했으며,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창하고 불일사(佛日社)로 고친 뒤, <불일결사문>을 썼다. 

72~76세(1277~1281년)에는 청도 운문사로 옮겨가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널리 진작시켰다. 이때 일연은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5년 정도 걸렸다고 본다. 일연은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을 만난 뒤에 몽골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며, 크게 탄식했다. 일연은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고려인의 자주성과 민족성을 마음에 심었을 것이며,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본다. 

보각국사 일연의 비.

일연은 78세에 불교계 최고 자리인 국존(國尊)으로 책봉돼 원경충조(圓徑冲照)라는 호를 받고,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摳衣禮, 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일연이 92세의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국사·국존의 지위를 버리고, “부모가 계시기 때문에 내가 생긴 것이니, 어머니께 효를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모친은 나병을 앓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대받을 것을 염려해 스님은 1년여 간 모친을 모셨다. 모친이 1284년에 타계한 무렵, 조정에서는 군위 화산(華山)의 인각사를 중수하고, 토지 100여 경을 하사하면서 일연에게 머물 것을 청했다. 일연은 인각사에서 선문인 구산문도회를 두 차례 개최했다. 83세에 일연은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했다. 입적하던 해에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으며, 시호는 보각(普覺), 탑 이름은 정조(靜照)이다. 대표 제자로는 혼구(混丘)와 죽허(竹虛)가 있다. 

➲ 저서 및 선사상

저서로는 <중편조동오위> 2권, <선문염송사원> 30권, <삼국유사> 5권, <화록(話錄)> 2권, <게송잡저> 3권, <조파도(祖派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등을 편찬했으나 현존하는 저서는 <삼국유사>와 <중편조동오위> 뿐이다. 

복원한 보각국사비.

일연의 선사상을 알 수 있는 <중편조동오위>는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년)의 <조동오위현결>을 제자인 조산 본적(曹山本寂, 840~901년)이 주를 덧붙였다. 여기에 혜하(慧霞)가 편집하고 광휘(廣輝)가 해석했는데, 오자와 탈자가 많아 일연이 재차 교열 작업을 해 편찬한 것이다. ‘조동오위’란 정중편(正中偏), 편중정(偏中正), 정중래(正中來), 편중지(偏中至), 겸중도(兼中到)인데, 조산 본적이 주(注)를 덧붙이면서 조동종의 중심사상이 됐다. 일연은 이 오위설의 편정(偏正)에 각각 군신(君臣)을 대비시켜 군신오위설(君臣五位說)로 설명하고 있다. 일연은 군신과의 묘합(妙合)으로 해석하며, 조동선의 극치를 제5 겸대위(兼帶位)라고 보았는데, ‘군·신·도합(道合)의 경지’를 나타낸다. 일연이 가지산문 선사로서 조동종 사상에 주석을 붙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점으로 볼 때, 일연의 원융적인 선사상이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일연의 선시가 있다. “수신의 잘되고 잘못됨은 먼저 성의(誠意)에 달린 것. 홀아비는 미인을, 도둑은 창고를 꿈꾸네. 어찌 가을이 왔다고 해서 하룻밤 꿈만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 세계에 이를 것인가?”

➲ ‘삼국유사’의 한국사적 의의 

일연이 활동하기 이전은 무신정변이, 활동하는 무렵에는 몽골의 침입을 받아 30여 년 간 삼별초항쟁 등이 있었으며, 민란으로 이어지는 혼란의 시대였다. 게다가 고려 특권층 중에는 원나라에 사대(事大) 세력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고려는 점차 원나라 지배하에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성을 잃어가고 말았다. 이런 시대에 불교적인 반응을 보였던 인물이 일연이다. 이때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해 고려인들에게 정신적 지주를 제시해 주었다. 즉 민족의 원류가 ‘단군’일 뿐만 아니라 삼국의 뿌리가 모두 하늘과 연결된 태생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민족성을 찾고, 문화전통을 재인식하려는 자존이라고 본다.

‘보각국사 정조탑(普覺國師 靜照塔)’.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역사서로 손꼽힌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교적 정치사관을 중심으로 송나라에 대한 사대사상과 더불어 합리적인 도덕사관에 입각해 있다. <삼국유사>는 ‘유사(遺事)’라고 이름 붙인 대로 예전에 사기에서 결여됐거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기존의 역사서에서 간과한 고대의 사회 문화와 신앙, 특히 불교사의 다양한 자료를 보충해 <삼국사기> 보다 역사 이해의 폭을 크게 확대시켜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지리 문학 미술 민속 종교 등 고대의 역사와 문화를 총체적으로 다루었다. <삼국유사>는 고대 역사의 체계를 다양하게 나열하고 있어 일관성이 떨어지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시조 단군에 대한 역사인식을 확실하게 정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는 오랫동안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로 분류돼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20세기에 들어와 한국의 고대문화를 총체적으로 담은 사서(史書)로 평가받았다. 그러면서 불교사적으로도 오래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땅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몽골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함을 확인하고 불교적인 영험담을 통해 혼란한 민심에 강렬한 신앙심을 고취하려는 문화 의식을 나타냈다. 

[불교신문3439호/2018년11월10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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