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마음자리는 이름 붙일 수 없다

무념, 공, 깨달음…무작 이름도
형상도 없는 부처님의 마음을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일 뿐이니 
조금이라도 집착이 남아 있다면 
‘공성’인 부처님 마음과 멀어져 

유위법은 중생의 시비분별이 남아 있는 법이고 무위법은 시비분별이 떨어진 부처님의 법이지만, 유위법과 무위법이란 생각조차 떨어져야 진짜 부처님의 법이라는 것을 대주스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원문번역: 문) 부처님의 법에서는 유위법을 조금도 버리지 않고, 무위법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답) ‘유위법을 조금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겠는가? 초발심에서 시작하여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쿠시나가라 쌍림에서 열반에 들어갈 때까지 그 가운데 어떤 법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곧 ‘유위법을 조금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위법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무념(無念)을 닦더라도 무념으로 증득을 삼지 않고, 공(空)을 닦더라도 공으로 증득을 삼지 않으며, ‘깨달음’ ‘열반’ ‘무상(無相)’ ‘무작(無作)’을 닦더라도 이것들로 증득을 삼지 않는다는 것이 곧 ‘무위법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설: 무위법과 유위법은 상대적 개념인데, 보통 무위법은 부처님의 법이고 유위법은 중생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상대적인 무위법과 유위법의 관념은 아직 중생의 시비분별 속에 있는 것이므로 시비분별을 초월한 자리에 있는 진정한 부처님의 법은 아닙니다. 유위법을 상대하여 말하는 무위법에는, 오직 이것만이 ‘부처님 법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이 남아 있으므로 중생의 생사를 초월한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생사가 남아 있는 무위법에도 집착하여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무념, 공, 깨달음, 열반, 무상, 무작을 닦더라도 이것들로 증득을 삼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부처님 마음자리는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중생의 생각으로 헤아려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조금이라도 집착하여 머물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념, 공, 깨달음, 열반, 무상, 무작은 이름도 붙일 수 없고 형상도 존재하지 않는 부처님의 마음을, 중생한테 이해시키기 위하여 방편으로 부르는 명칭일 뿐인데, 이것에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공성(空性)인 부처님 마음과 영영 멀어지고 말 것입니다. 

원문번역: 문) 지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문) 어떻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까? 답) 마음 따라 온갖 나쁜 짓을 하면 지옥이 있고, 마음에 오염된 헛된 생각이 없다면 자신의 성품이 공이므로 지옥이 없다.

강설: <화엄경>에 “삼세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온갖 법의 참 성품을 보아야 한다/ 모두가 다 이 마음이 만들었음을(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글은 야마천궁에 구름처럼 많은 보살이 모였을 때 그들을 위하여 각림 보살이 읊은 게송입니다. 이 게송의 뜻은 ‘온갖 법의 참 성품’은 ‘공성(空性)’이라는 것이고, 이 텅 빈 마음에서 한 생각 어떻게 일으키는가에 따라서 부처님도 되고 지옥이나 천당도 되며 이 세상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나쁘게 쓰면 그 자리가 지옥이 되고 마음을 착하게 쓰면 그 자리가 천당이 되며 부처님처럼 마음을 쓰면 부처님의 극락정토가 된다는 것이지요. 

이 도리를 깨닫고 공성인 자신의 성품을 바로 본다면 곧바로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지옥 자체도 사라집니다. 하나의 진리 참다운 공으로 들어가 차별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천당이나 지옥도 없고 부처님이나 중생도 없는 것입니다.

[불교신문3439호/2018년11월10일자]

원순스님 송광사 인월암 삽화=손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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