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 군승 불자 함께 땀 흘려 황무지를 옥토로...

5명 군승이 138명으로 늘어

3곳 불과 군 법당은 400 곳

6,25 때 장병들 지켰던 불교

오늘날 군승들도 어디든 방문

 

군송 파견 50주년을 맞아 역사적인 순간을 되돌아본다. 수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불굴의 의지와 부처님의 가피로 극복해온 군 불교 역사는 한국불교 역사이기도 하다. 군포교는 군승 파송이전인 1950년 6,25 때부터 시작할 정도로 현대 한국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한국불교 군포교 역사에서 중요했던 순간을 알아본다.

 

1. 최초의 군법사 파송은 언제 이루어졌나?

- 1968년 11월 30일 5명의 군승이 중위로 임관하면서 시작됐다. 1951년부터 시작한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에 비해 17년이나 늦었다. 범 종단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종교, 국방부 등의 반대와 방해가 많았다. 그같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종단을 중심으로 한국불교가 한 마음이 되어 군승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인재를 양성한 결과 정부도 이를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월남전에 우리 군이 참전하면서 불교국가인 베트남에 군승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0여년간 끌던 군승 파송 문제가 해결됐다.

2. 초기 군종병과 명칭이 ‘군승과(軍僧科)’였다는 것은 사실일까.

- 그렇다. 1951년 2월 육군본부 인사국에 ‘군승과(軍僧科)’라는 이름의 정식기구가 창설되었다. ‘승(僧)’이라는 글자를 사용한 것을 보면 당시 ‘성직자’의 일반적인 기준이 스님이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군승과’에는 목사와 신부만 소속되어 있었다. 결국, 2개월 후에 ‘군목과(軍牧科)’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3. 최초 군법당은?

- 최초 군법당은 군승 파송 전인 6,25 때 생겼다. 그러므로 군승보다 군법당이 먼저 생긴 것이다. 6,25 당시 많은 스님들이 인연 있는 부대를 지원하며 활동을 벌였다. 개전 초기 스님들이 인연 있는 지휘관을 설득하여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동부 전선에 까지 스님들이 가서 중상자를 위로하고 전사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등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강원도 양구에 최초의 군법당이 마련됐다. 이름은 ‘도원사(桃園寺)’였다. 복숭아가 많은 마을인 ‘도촌리’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아쉽게도 사진 등의 관련 자료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4. 해외에 세워진 최초의 군법당은 어디인가?

- 월남에 세워진 ‘불광사(佛光寺)’이다. 이 사찰은 법사가 파송되기 전에 건립된 사찰이었다. ‘영현보관소’ 즉 전투 중 사망한 시신을 보관해두는 건물을 개조해서 만들었다. 처음에는 전사(戰死)한 장병들을 위해 불자 장교였던 유승원 소령이 위령염불 및 법회를 매월 2회씩 올렸다. 이를 본 사단장의 지시로 영현보관소를 법당으로 개조했고, 이후 한국 종단의 지원을 받아 30평 규모의 법당을 세우고 불상도 한국에서 모셔와 봉안하기도 했다.(1967)

 

5. 최초의 군인 신도조직은 무엇인가.

-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 신도회는 6,25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육군사관학교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종교위원회 산하 불교부(1954년)였다. 초기에 생도들을 강제로 교회에 나가게 하는 지시에 반발하여 185명 생도 중 6명의 불자생도가 모임을 가지기 시작해서 부서로 만들었다. 이후 1959년 해군사관학교, 60년 공군사관학교의 불교부가 만들어졌다. 1960년 9월 28일 삼군사관학교 연합체육대회가 끝난 뒤 불자들은 조계사로 이동하여 연합법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종정스님까지 참석할 정도로 불교계에서는 중요하게 여겼다.

 

6. 최초의 간부불자 모임은 무엇인가.

- 육군 2군단(춘천)의 불교장교회가 1970년 11월에 만들어진 것이 최초이다. 당시 180명의 회원이 가입하였고, 창립식에는 30여명이 참석했다. 불교장교회의 활동은 매월 월례법회 봉행, 불우아동 장학금제공, 법당 후원 등을 주요 사업으로 삼았다. 육군의 모든 장교회를 총괄하는 ‘육군 불교장교회’는 이듬해인 1971년 2월에 발족했다. 해군장교회(71년 12월)와 공군불교회(72년 4월)도 연이어 결성이 되었다. 75년 4월에 ‘공군불교회(장교모임)’가 ‘공군중앙불교회’로 개편하며 장교중심이 아닌 부사관과 가족까지 포함하는 신도회로 처음 발전했다.

 

7. 군법당이 ‘일요정기법회’를 최초로 시행했다는 것은 사실인가?

-그렇다. 군 법당에서 일요 정기 법회를 열기 전 사찰에서는 법회가 거의 없었던데다 음력 재일을 중심으로 불공기도가 중심이었다. 1주일 단위로 운영되는 군의 생활 규칙에 맞게 불교도 일요일 정기 법회를 열어야했다. 그 내용은 기도보다 장병들에게 교리를 전하거나 정신 안정을 위한 설법이 중심이었다. 초기 군법사들은 찬불가와 설법이 중심이 된 ‘일요법회’ 형식을 만들고 대중이 함께 볼 수 있는 ‘법요집’을 제작했다. 기존에 한문중심의 어휘들도 군장병에게 맞는 우리말로 바꾸어야 했다. 당시 일반 사찰에서는 과감하게 변화한 군법당의 법회형식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군법사들이 기독교화 되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도시화의 급격한 진전과 함께 1980년대 도심 포교당이 늘어나면서 군법당에서 만든 정기 법회 형식과 내용이 일반 사찰에 그대로 전이돼 오늘날 법회 주류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정기법회 기본 틀은 초기 군법사들이 연구 개발했으며 이는 군불교가 현대 한국불교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

장병 수계식 모습

8. 군법사들의 이동 수단 변천사를 살펴보니...

-초기 군법사들의 이동수단은 아주 열악했다. 1970년대 까지 만해도 군부대에서 차량은 매우 귀했다. 단체가 아닌 개인이 타고 다니는 차량은 계급이 높은 지휘관에게만 특별히 제공됐다. 차가 없는 군승들은 걸어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살펴야 할 부대가 워낙 많고 넓어서 도보로는 무리였다. 차를 빌려타거나 자전거를 타는 군법사도 있었다. 그러다 1970년대 초반부터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한 것이 10여년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군승이 130여명이나 되는 현재도 군종장교의 활동반경이 넓은데 수십명에 불과했던 당시엔 훨씬 광범위했다. 현재에도 전방의 군승은 매일 2~3군데 부대를 방문하고, 후방지역에는 1개 도(道)를 1명의 법사가 관리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1980년대 중후반이 되면서 주요이동수단은 승용차로 점차 바뀌었다.

 

9. 불자 장병들로만 구성된 부대가 있었다는데,

-1973년 창설된 ‘화랑중대’는 최초의 불교 부대다. 육군 28사단 8연대 소속인 이 부대는 창설시에 총무원장 스님과 주요 스님들까지 참석했을 만큼 주목받았다. 초기에는 부대원 중 85%만 불자였고 나머진 무교였지만 머지않아 모두 수계를 받고 불자가 되었다. 이 부대는 수요일과 일요일에는 예불로 점호를 대신하였고, 화랑오계를 수지했다. 일요일과 수요일 정기법회를 봉행했으며 부대 창설 기념법회도 개최했다. 사고가 없는 모범부대로 유명해서 표창을 받기도 했으며 이후 20여년간 명맥을 이었다.

이처럼 한국불교의 군불교 역사는 종단과 군승 그리고 군불자들의 헌신적 노력과 신도들의 지원으로 오늘날에 이르렀다. 조계종군종교구 교구장 선묵스님은 “군승파견이라는 역사적 쾌거를 이뤄내신 은사이신 청담 대종사의 위업을 잇게 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며 “군법사님들의 헌신적 노력과 종단의 전폭적 지원과 관심 불자들의 후원에 힘입어 지난 50년간 군포교는 많은 성과를 거뒀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감수: 대한불교조계종 군종교구 부교구장 남전스님

 

 

 군종교구 출범 의미와 과제

2005년 군종교구 출범으로 큰 발전

군 포교 종단 책임도 커져

해외 파병 부대를 위문하는 군종교구

타종교보다 17년 늦게 시작한 군종법사는 5명에서 출발하여 현재 138명이 활동할 정도로 그 수가 큰 폭으로 늘어났다. 군 사찰도 1971년 10개소에서 1990년 170개소, 2018년 현재 416개소에 이를 정도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가장 큰 변화는 군포교의 주체가 군승단에서 종단의 특별교구로 전환했다는 점이다. 군법사를 파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종단이 군승선발 교육 파송 및 군포교 까지 모든 과정을 책임지는 군포교 종단 책임제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오늘날의 군포교는 이처럼 군종교구의 출범에 따라 체계적이며 유기적인 지원관계가 만들어진 덕분이다. 종단은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종단 주도의 군 포교 정책을 수립, 2003년 군불교위원회를 거쳐 2005년 군종특별교구가 출범했다. 군법당에는 종정예하의 교시가 걸렸다. 이어서 2009년 군승 결혼을 허용하던 종헌도 개정함으로써 군승들은 조계종 소속 승려로서 정체성을 분명하게 했다.

여군이 많아지면서 여성 성직자의 군 진출도 이뤄졌다. 2000년 민간인 성직자 제도를 통해 비구니스님들이 영외 법당에서 군승을 대신해 장병 상담, 군법당 운영 등을 맡다가 2014년 최초의 비구니 군승이 탄생했다. 명법스님이 첫 문을 연데 이어 이듬해 균재스님이 임관했다. 2016년 첫 해군 비구니 군승에 혜능스님이, 2017년 공군 첫 비구니 군승 자원스님이 임관해 50여년 전 군승 역사를 시작했듯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다.

군종교구 출범으로 종단과 군의 유대는 더 강화됐으며 책임도 커졌다. 특히 군 포교를 둘러싼 외적 환경이 갈수록 열악해지는 점은 종단이 나서 해결해야할 과제다. 우수한 군승 자원의 안정적 확보, 거세지는 타종교의 공세, 위축되는 군불자 장교들의 활동은 종단이 적극 나서지 않으면 해결이 어려운 군 포교 외부 환경이다. 군종교구 출범으로 종단이 군포교 주체가 된 만큼 이러한 문제 해결에도 앞장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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