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원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퇴임강연 “불교문학은 자비실천 사유로 삶의 인식 심화시켜”

불교문학에 담긴 생명사상과 자비실천에 대해 강연하고 있는 백원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현대 불교문학의 지향점/생명존중과 자비실천 윤리’

불교문학에 내재된 생명존중과
자비실천 윤리는 시·공 초월한
생명윤리 기본덕목 될 수 있어

오늘날 심각한 생명경시의
폐해 속에 살고 있는 우리사회에
불교문학은 문학의 진정한 역할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불교문학과 생명존중 사상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지난 10월 26일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연구소(소장 차차석교수)가 ‘불교문학과 생명존중사상’이라는 주제로 2018년 제12차 불교문예연구소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백원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불교문예학과)는 ‘현대 불교문학의 지향점-생명존중과 자비실천 윤리’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했다. 정년퇴임을 기념한 이날 강연에서 백 교수는 불교설화와 동서양의 불교문학에 담긴 생명사상과 자비실천에 대해 조명했다. 그 내용을 요약했다.

인간 중심의 이해와 효용가치를 근거로 수많은 생명이 해를 입고 있는 오늘날, 모든 존재를 연기적 관계에서 바라보는 생명윤리의 토대를 마련하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실천행위가 무엇보다 요청되고 있다. 다양한 불교경전을 기반으로 한 <자타카>와 이를 변용한 불교문학에 내재된 생명존중과 자비실천 윤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생명윤리의 기본덕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그물(web of life)’이라는 생태계의 원리를 수용한 화합과 조화로운 세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간혹 그 목적성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한계를 드러내 보이지만, 훌륭한 문학은 그 문학이 생산된 시대와 국가에 국한하지 않고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의 인류사적 방향성을 함유하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생명의 존중과 평등성을 지향하는 문학의 진정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 중심의 윤리에서 보다 확장된 생명 중심의 윤리체계의 확립이 끊임없이 중요한 담론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도 이런 연유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이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명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생명윤리의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인간이 다른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새로운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생명존중을 기반으로 자비실천의 생명윤리가 그 대안이 될 수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 까닭은 생명존중과 자비사상을 축으로 하는 불교 생태적 사유가 인간 중심의 윤리에서 보다 확장된 생명 중심의 인류 보편적 가치를 회복하는 중요한 대안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는 이번 강연에서 불전설화, 이를 수용ㆍ변용한 한국 불교설화, 우리의 근ㆍ현대 불교문학과 영문학에 있어 토마스 하디의 시문학을 중심으로 생명존중과 살림을 기반으로 한 자비실천의 경향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우리 불교문학이 지향해야 할 바를 조명하고자 한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든 중생들은 삼계(三界)의 집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일 수 있다. 이러한 불교적 사유는 생명에는 위아래의 계층이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 생명의 무게와 동물 생명의 무게가 다르지 않으며, 동물의 생명과 미물인 곤충의 생명의 무게도 다르지 않고 동일하다는 것이다. <자타카>의 생태인식의 중 가장 특징적인 것 중 하나는 ‘등가의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중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생태학적 인식을 잘 담아낸 설화가 초기불교 경전인 <현우경>의 ‘시비왕의 이야기’이다.

붓다께서 전생에 보살로 인욕수행 정진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저녁 무렵 큰 나무 아래 앉아서 조용히 명상에 잠겼다. 그때 갑자기 비둘기 한 마리가 매에게 쫓겨 보살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매가 ‘휙’하고 날아와 나무 위에 앉아서 보살에게 말했다.

“비둘기를 나에게 주세요, 그 비둘기는 나의 저녁거리입니다. 비둘기를 먹지 못하면 며칠을 굶은 터라 죽을지도 모릅니다.” 보살이 말했다. “비둘기를 내어줄 수 없다. 보살은 모든 중생을 잘 보호하겠다고 서원한 사람이다.”

매가 다시 말했다. “그대가 모든 중생을 보호한다면 나는 왜 포함되지 않습니까? 비둘기는 나의 저녁거리입니다.” 보살은 난처해졌다. 매의 말이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매는 비둘기를 먹지 않는 대신에 비둘기 무게만큼의 살아있는 살코기를 원했다. 이에 보살은 비둘기를 살리고 매도 살리는 방안을 생각하여 매에게 비둘기 무게만큼의 자기 살을 떼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즉 내 육신은 사대가 잠시 인연으로 화합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무상해서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갈 몸이니 이 몸을 보시해서 비둘기를 구해주자고 생각했다. 보살은 저울 한쪽에 비둘기를 올려놓고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비둘기 무게만큼 베어서 다른 쪽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저울은 비둘기 쪽으로 기울었다. 보살이 여러 군데 살을 베어서 저울에 올려도 저울은 비둘기 쪽으로 계속 기울어졌다. 하는 수 없이 보살이 자신의 몸 전체를 저울에 올리자 비둘기와 수평이 되었다. 자신의 무게가 비둘기 무게와 똑같아졌던 것이다.

‘생명의 저울’이라는 비유를 통해 생명의 존귀함과 동등함, 즉 “생물=인간=같은 무게”라는 생명윤리의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설화이다. 보살이 처음에는 비둘기가 작고 가벼워서 비둘기만큼의 고깃덩어리는 얼마든지 떼어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목숨을 다 내놓아야만 비둘기 몫하고 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생명의 무게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분별심과 차별심을 허물 때 모든 것은 확장된 ‘큰 자아(Self)’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생물의 종이나 몸집의 크기나, 효능가치의 여부라는 도구적 가치를 측정하는 단순한 저울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귀중한 생명의 근원적 가치를 측정하는 저울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할 것이다.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플 수밖에 없는 동체대비의 생명존중과 살림은 만해 한용운(1879~ 1944)의 시문학에서도 선명히 표출되고 있다. 만해는 ‘눈 속의 복사꽃’ 결기의 정신으로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온갖 차별에 대한 강한 저항의지와 약자에 대한 보살핌과 배려로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차별을 거부하고 생명사랑을 지향하는 그의 시적 상상력은 자연계에 내재하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으로 나타났다.

“간밤의 가는 비가 / 그다지도 무겁더냐 / 빗방울에 눌린 채 / 눕고 못 이는 어린 풀아 /아침볕 가벼운 키스 / 네 받을 줄 왜 모르느냐” - 만해스님의 시 ‘춘조(春朝)’.

풀 한 포기에서 전 우주의 생명을 읽어내는 만해이다. 일제 강점기 나약한 민중들의 의지를 빗방울에 눌려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연약한 풀의 이미지에 비유하고 있다. 현실의 사소한 어려움에도 위축되고 삶을 포기하는 나약한 민중을 질타하고 현실참여를 독려하는 만해의 사자후에는 뜨거운 생명사랑이 깔려 있다. 일제의 침략자들은 우리 삶의 터전을 빼앗고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다 말없이 죽임을 당한 민초들의 절규를 외면했다. 그러나 만해는 뭇 생명을 보살피고 감싸 안음으로써 생명존중과 살림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있다.

무산 조오현(1932년~2018)은 거침없는 언행으로 탈속 무애의 삶을 살았다. 한평생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분별하지 않고 선인이든 악인이든 대자대비의 무애행을 펼쳐 중생의 친구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가장 스님답지 않으면서, 가장 스님다운” 삶을 살다 갔을지도 모른다. 1997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하고, 만해의 자유ㆍ평등ㆍ평화ㆍ생명존중사상을 선양하기 위해 만해대상을 시상함으로써 불교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이러한 삶을 산 그의 시문학에 나타난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은 깊고 넓다 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까지 생명존중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그의 시세계는 ‘허수아비’에 각인된 삶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새떼가 날아가도 손 흔들어주고 / 사람이 지나가도 손 흔들어주고 / 남의 논일을 하면서 웃고 있는 허수아비 …(중략)…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 손 흔들어주고 숨 돌리고 두 팔 쫙 벌리면 /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 무산스님의 시‘허수아비’.

생명존중과 사랑은 토마스 하디(1840∼1928)의 문학세계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신을 상실한 산업혁명 시대에 영국 남서부 고향 도셋(Dorset) 지방의 유구한 정서적 토양이 망실되어 감을 목도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에 대한 무한한 존중과 자비심을 바탕으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

메어리 캐롤라인 리차즈(Mary Caroline Richards)의 “하디는 대단한 자비심을 가졌고 인간이 겪는 고통의 모습에 깊이 감동되었으며, 그의 ‘아이러니 비전’의 핵심은 생명의 존엄성과 잠재력에 대한 믿음이었다.”라는 언급은 하디의 글쓰기의 근간이 어디에 있는지를 입증해 준다.

또한, 제임스 깁슨(James Gibson)의 “자연의 모든 생명체에 대한 자비는 하디의 비전의 보편성이고, 우리가 상처받은 세계에 살고 있지만 더불어 그 세계에 있으며, 그에게 있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 “자애로움”(loving-kindness) 이 모든 사람들에게 확산될 것과 우리는 모두 한 가족, 즉 하나의 공동운명체임을 깨달아야 한다”라는 지적에서도 하디의 글쓰기의 근간이 생명존중과 자비실천에서 비롯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명존중과 자비심을 토대로 한 하디의 글쓰기는 초목, 곤충, 새, 동물 등 자연계의 수난에 대한 인간의 생태학적 책임뿐만 아니라 동정의 대상을 우주적 차원으로 승화하여 인간, 축생, 그리고 미물의 수난에 대해서도 공동운명체로서의 ‘동료애(fellowship)’라는 배려와 연민이 깃든 이미지를 통해 가장 가시적이고 인상적으로 나타난다.

이상에서 불전설화, 이를 수용ㆍ변용한 한국 불교설화, 근ㆍ현대 우리의 불교문학과 하디의 문학세계를 중심으로 생명존중과 살림에 기반한 자비실천의 의미와 불교문학의 지향점을 살펴보았다. 개별 사물로서 존재하는 대상들이 겉보기에 상호간의 유사성이나 친연성을 드러내지 않을 경우, 그들은 개별적 독자적인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상호 관련된 사물과 현상들이 역동적으로 엮어져 있는 그물과 같다 할 때, 생명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독립된 존재보다는 상호의존과 상호침투의 관계망 속에서 인식할 때 보편적 가치를 갖는다. 상호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들은 개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인연과 윤회를 통하여 끝없이 얽혀 있는 상호의존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상상력이란 이성적 판단이나 논리를 뛰어넘어 심층 무의식에 뿌리박고 있다는 일반적 사실을 감안한다면, 작품 속에는 비록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많은 생명존중과 자비실천윤리의 의미심장한 문맥들이 함축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살펴본 일부 문학작품들에 대한 담론만으로 생명존중과 자비실천 문학의 보편성이나 원리로 간주하기에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경시가 만연되고 있고, 또 모든 존재가 평등한 생명가치로 이해되어야 하고, 서로가 보듬고 아우르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친화적 생명연대의 삶이 더욱 요청되고 있는 현실상황에서 이 글은 하나의 대안으로 모색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진단했다고 생각된다.

이 같은 가능성은 문학으로서 가능성이며 깊이 있는 현실에서의 실천과는 일정한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불교문학과 생명존중 문학의 논의는 더욱 자비실천의 사유에 힘입으며 세계 해석이나 삶의 인식을 심화시키는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생명존중과 살림에 기반한 자비실천의 인식을 함양함으로써 인식주체의 자세를 바꾸고 또한 조화로운 삶의 실천 방법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문학은 오늘날 심각한 생명경시의 폐해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사회에 문학의 진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지난 10월 26일 열린 '2018년 제12차 불교문예연구소 학술세미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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