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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에세이] 달의 지분

 

한 사람은 달에 갔고 
한 사람은 서방정토 갔는데 
간 곳이 하나로 보인다

평생소원을 이루어 낸 
꿈의 목적지이기 때문이다 

달 착륙 50년, 닐 암스트롱과 
광덕의 정성이 무색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인간의 달 착륙은 벌써 반세기 전의 일이다. 마침 데미안 셔젤 감독의 ‘퍼스트맨’이 개봉되어, 우리는 아폴로 11호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을 그때의 감동 속에 다시 만나고 있다. 텔레비전으로 암스트롱이 달에 내려 걷는 모습을 본 뒤로 동네 아이들은 겅중겅중 걸었다. 암스트롱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과학기술이 그를 달에 데려다 준 줄만 알았는데, 영화는 그렇지 않은 암스트롱의 사투(死鬪)와 인간적 고뇌를 담고 있다. 달에 갔다 오는 일은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우주비행 기술이 지금에 비한다면 형편없이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침착하고 치밀한 그의 성격과 기술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는 데 절반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스트롱의 두 살짜리 딸은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와 그의 아내의 심정을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더욱이 아내는 남편까지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았다. 암스트롱은 딸의 고통과 아내의 걱정을 함께 안고 달에 갈 준비를 해야 했다. 영화 ‘퍼스트맨’은 이 고독한 영웅의 내면을 잘도 그렸다. 한 영화평론가는 그런 암스트롱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마침내 달의 표면에 안착했을 때, 그는 딸의 유품을 달로 던지며 딸을 진정으로 보낸다. 그를 억누르고 있던 마음의 짐을 달에서 털어버린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닐 암스트롱이 달에서 치르는 딸의 장례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달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삼국유사>에서 한 장면이 있다. 광덕과 엄장의 이야기에서다. “남편이 나와 함께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저녁이면 같은 침상에 눕지 않았지요. 하물며 몸을 섞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몸을 단정히 바로 앉아 한 소리로 아미타불을 부르며 염불했지요. 때로 16관(觀)을 짓고, 관이 다 되어 밝은 달빛이 집안에 비쳐올 때, 그 빛을 타고 가부좌한 채 정성을 다했습니다.”

광덕은 아내와 살림을 이루고 살았지만 이처럼 지성껏 수행했다. 밝은 달빛을 타고 가부좌한 모습을 그려보기 어렵지 않다. 그 달을 바라보며 노래했다. ‘달아, 서방까지 가거든, 다짐 깊으신 세존 우러러,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 아뢰어 달라.’ 향가인 ‘원왕생가’의 간추린 내용이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장면은 광덕의 아내가 남편의 친구인 엄장에게 하는 말이다. 실은 광덕과 엄장은 서방정토를 그리며 신실히 수행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다 광덕이 먼저 가자 엄장이 장례를 치르고 부인을 데려와 함께 살게 되었다. 밤이 되어 몸을 섞으려고 했다. 그것은 하등 이상할 일 없는 부부관계이다. 다만 부인이 엄장을 보니 그는 광덕과 달리 수행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먹고 사는 일에 코를 박고 사는 데만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위에서처럼 충고한 것이다.

한 소리로 염불하며 정성을 다했다는 것이 원문에서 일념갈성(一念竭誠)이다. 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는 뜻으로 풀어볼 수도 있겠다. 새삼 암스트롱과 광덕이 겹쳐 보였다. 한 사람은 달에 갔고 한 사람은 서방정토에 갔다. 그들이 간 곳이 하나로 보인다. 평생 소원한 바를 일념갈성하며 이루어 낸 꿈의 목적이지이기 때문이다. 달 착륙 50년, 그동안 탐사에 나선 나라마다 각자 돈 들인 만큼 그 땅의 지분을 찾는 데 혈안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암스트롱과 광덕의 정성이 무색해지는 느낌이다. 

[불교신문3438호/2018년11월7일자] 

고운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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