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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33> 진각국사 혜심대선사한국선사상의 특이점 ‘일원상’ ‘진귀조사설’ 정립
  •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18.11.02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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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7종’ 선사상 섭렵, 천책 
보현도량기시소 백련결사사 
법화전홍록 선문보장록 저술

화엄학은 교학, 천태학은 선학
위치에 두고 ‘선문강요’ 저술
유심정토설 적극적으로 강조


천품 영특 내외전 통달, 지겸
살아서는 ‘임금의 스승’ 되고 
죽어서도 ‘나라의 스승’ 칭송

지눌ㆍ혜심 간화선 풍미할 때
종문원상집 편찬 위앙종 선양
‘순지 표상현법’ 가일층 확대

백련사 대웅보전의 천책스님 위패.

간화선을 제외하고, 한국선사상의 독특한 점 가운데 몇 가지가 일원상과 진귀조사설이다. 이 두 사상 모두 나말여초에 성행했던 선사상인데, 고려시대에 저서를 통해 다시 한번 정립됐다. 일원상(一圓相)에 관한 서지학적 자료는 <종문원상집(宗門圓相集)>이고, 무설토론(無舌土論)이나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 실려 있는 자료는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이다. 두 책자의 저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  ‘선문보장록’의 저자 

천책은 선종계가 아닌 천태종 승려이다. 성은 신씨(申氏), 자는 몽저(蒙且), 시호는 진정국사(眞靜國師)이다. 고려 개국공신 신염달(申厭達)의 후손으로 상주의 산양현(山陽縣)을 기반으로 한 지방토호 출신이다. 신염달의 후손에서 희양산문의 원진(圓眞)국사 승형(承逈), 화엄종 승통인 관현(貫玄), 법상종의 승통인 융모(融玥) 등을 배출함으로써 불교와 밀접한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천책은 7~8세에 글을 익히고,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이미 15세에 장하(場廈)에 나아가 춘관(春官, 禮部試)에 합격한 유학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유학의 공허함과 세상의 허심(虛心)을 통렬히 깨닫고 있던 차, 우연히 금자(金字)로 <법화경>을 사경한 것이 인연돼 출가했다. 23세 때 만덕산 백련사로 출가해 원묘(圓妙)국사 요세(了世, 1163~1245년)의 제자가 돼 ‘천책’이라는 법명을 받았는데, 여기서 ‘책(頙)’은 ‘바르다’는 뜻이다.

천책이 비록 천태종에 출가했지만, 중국 5가7종 선사상을 모두 섭렵했으며 선어록 등을 공부했다. 출가 전에 성균관에서 유학을 공부했던 독서 실력이 승려가 돼서도 연장됐다. 곧 경ㆍ율ㆍ론 삼장 등에 두루 통달했다. 1232년 원묘가 결성한 ‘보현결사’에 동참한 천책은 ‘보현도량기시소’를 작성했다. 천책도 대중들과 더불어 요세의 가르침에 의지해 성실하게 수행에 임했다. 또 4년 후에 천책은 <백련결사사문>, <답금경손서>를 작성했다.

1243년 천책은 스승의 문하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활동했다. 국왕은 천책을 상주 백련사 주지로 임명했으나 천책은 이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천책은 만덕산의 작은 암자인 용혈암(龍穴庵)에 머물렀는데, 사람들은 그를 ‘용혈대존숙(龍穴大尊宿)’이라 불렀다. 이 때부터 천책은 당시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고 본다. 이 무렵에 천책은 <법화전홍록>과 <선문보장록>을 저술했다. 그런데 천책의 다음 행적이 전하지 않으며, 입적한 연도도 정확치 않다. 아마도 만년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가 혼란한 시기였으므로, 천책은 깊은 산골에 은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살펴본 대로 천책의 행적을 정리하면, 출가 전에는 유학에 힘썼고, 출가 이후로는 불교계의 결사문 등을 지었으며, 만년에는 저술활동을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저서로는 <선문보장록> 1권과 <법화해동전홍록> 1권, <호산록> 2권 등이 있다. 또한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된 몇 편의 시문에 그의 행적과 사상이 남아 있다. 훗날 조선말의 정약용이 신라시대 최치원, 고려시대의 천책과 이규보가 ‘우리나라 3대 문장가’라고 극찬했다. 
 <선문보장록>은 여러 선사들의 어록을 간명하게 발췌해 기술하고, 그 인용 서목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천책은 선(禪)을 높이 보고, 교(敎)를 낮춰보는 점이 두드러진다. 천책이 천태종 승려임을 감안할 때, 이 책은 천책의 저술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해동전홍록>은 <법화경>의 영험설화를 수록한 것으로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 요원(了圓)이 <법화영험전>에 몇 차례 인용했다. 한편 천책은 화엄학을 교학의 위치에, 천태학을 선학의 위치에 두고서 <선문강요(禪門綱要)>를 저술했다. 그래서 교학적인 수행에서는 화엄의 55위를 한 단계씩 거쳐서 수행해야 불과를 성취한다고 설명하며, 선 수행에 있어서는 ‘주(住)한다고 하여도 무주(無住)에 머물고, 수행한다고 해도 무수(無修)로서 수행해야 견성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천책은 선사상에서 강조하는 유심정토설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천책이 비록 천태종 승려이지만, 한국선사상적 업적이 결코 적지 않다. 

진정국사 천책의 출가 도량 강진 백련사 전경.

➲  ‘종문원상집’의 저자 

정각국사(靜覺國師) 지겸(志謙, 1145~1229년)에 관한 행적이나 사상은 <종문원상집>과 <동국이상국전집> 제35권에 실려 있는 ‘고화장사 주지 왕사 정인대선사 추봉 정각국사비명’뿐이다. 지겸의 성은 전씨(田氏), 본명은 학돈(學敦), 자는 양지(讓之)이고, 전남 영광 출신이다. 모친 꿈에 어느 스님이 와서 유숙하기를 청했는데, 이후 모친이 태기가 있어 낳은 아기가 지겸이다. 지겸은 골상이 준상하고 기신이 영매하여 어릴 때부터 생각과 행동이 반듯했으며, 비린내 나는 음식을 멀리했다. 7세에 출가하기를 간청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1세에 사충(嗣忠)에게 출가했다. 그 이듬해 1150년 금산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지겸은 천품이 영특하고, 내외전에 통달해 많은 이들이 지겸과 교류하기를 원할 정도였다. 지겸은 25세에 승과 선선(禪選)에 급제했다. 이 해 삼각산에 머물다가 도봉사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 산신이 나타나 “화상의 이름은 지겸(志謙, 至謙)인데, 왜 지금의 이름을 쓰는가?”라고 했다. 선사는 이때부터 지겸으로 고쳐 불렀다. 지겸은 말 그대로 ‘지극한 겸손’이라는 뜻이다. 선사의 겸손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지겸은 말년에 한 문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초라한 집에 태어나 왕자의 스승까지 되었으니, 분에 넘치게 승은을 입었다. 그런데 계속 왕사 자리를 탐내어 어찌 계속 이 자리를 탐내야 하는가?”라고 했다.

지겸은 1189년, 44세에 등고사(登高寺) 주지를 역임했으며, 1193년 48세에 삼중대사(三重大師) 법계를 품수 받았다. 다시 52세에 선사(禪師), 59세에 대선사(大禪師) 법계를 받은 뒤 선회(禪會)가 있을 때마다 주맹(主盟)이 돼 회중(會衆)을 이끌었다. 1204년 최충헌은 ‘정혜결사’를 수선사로 사액하고, 당시 지겸을 왕사로 책봉했다. 지겸이 개성 광명사(廣明寺)로 옮겨 상주하자, 최충헌의 아들이 지겸의 문하로 출가했다. 무신 난 이후 선종은 지겸과 승형이 소속된 희양산문의 위상도 수선사와 함께 부각됐다. 곧 불교사에서 수선사만을 과도하게 강조하지만, 당시 희양산문의 선풍도 펼쳐지고 있었다. 지겸이 63세 되던 해, 심한 가뭄이 들자, 왕실의 요청으로 내도량(內道場)에서 기우제를 지내어 비를 내리게 했다.

지겸은 효성이 매우 지극했다. 불자로부터 시주를 얻으면, 먼저 홀어머니에게 보내고 나서 자신이 먹었다. 하루는 모친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석천에게 이렇게 빌었다. “만일 어머니의 타고난 수명이 다 되었다면 이 자식의 수명으로 대신하게 하소서.” 그런데 잠시 후에 가동(家童)이 달려와서 “마님이 이미 일어났습니다”라고 했다. 

이후 지겸이 왕사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왕은 지겸에게 ‘화장사(華藏寺)가 수행하기에는 적합한 곳이라며, 그곳에 머물 것을 명했다. 지겸이 떠나려고 할 때, 진강공(晉康公, 최충헌)은 국사를 맞이해 전별연을 베풀었는데, 공은 나가서 절하고 친히 국사를 부축해 뜰에 올랐으며, 떠날 때는 보마를 증정하고 또 문객 등을 보내어 국사를 호위하게 했다. 지겸이 경기도 장단 화장사로 내려온 지 13년만인 1229년, 병이 들었다. 지겸은 “오늘은 떠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니 후일에 떠나겠다”며 취침에 들었다. 며칠 후 지겸이 “정광은 고요하고 고요하며, 혜일은 밝고 밝다. 법계와 진환에 제륜이 돈연히 나타난다”고 하자, 한 승려가 물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뒷날 밤 달이 처음 밝으면, 내 장차 홀로 가리라’ 하였는데, 어디가 바로 화상이 홀로 갈 곳입니까?” “푸른 바다 광활하고, 흰 구름 한가로운 곳이다. 터럭만큼도 그 사이에 덧붙이지 말라”는 말을 마치고, 지겸은 두 손을 마주 잡아 가슴에 대고 가부좌한 채 입적했다.

이규보가 지겸의 비문을 작성했는데, 다음 내용이 새겨져 있다. “국사는 사람됨이 조금도 외면을 꾸미는 일이 없이 천성대로 이치대로 하였다. 비록 큰 사찰의 어른이었으나 공양 때가 되면, 손수 발우를 들고 제일 먼저 나아갔고, 대중과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 살아서는 임금의 스승이 되고 죽어서도 나라의 스승인데, 귀감이 이제 없어졌으니 어디에서 가르침을 구할 것인가. … 오가는 자들이여, 말 타고 가거든 말에서 내릴지어다. 혹 부처에게 절하지 않을지라도 오직 이 비에만은 꼭 절할지니라.”

순지화상의 원상을 본받아 고려후기 정각국사 지겸이 원상을 모아 엮은 책으로 보물 제888호다(문화재청 자료).

지겸은 <조당집>에 전하는 ‘오관산서운사’장을 <종문원상집>에 그대로 옮겨와 위앙종의 선풍을 선양했다. 이 책은 당대의 남양 혜충부터 북송의 목암 선경(睦庵善卿)에 이르는 46명의 조사들에 의한 원상의 기연(機緣)을 모은 것이다. <종문원상집>은 지겸이 중국 문헌에서 원상에 얽힌 기연을 발췌한 것으로 그의 사상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한국적인 일원상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지겸이 활동할 당시는 보조 지눌과 진각 혜심의 간화선이 풍미를 이루던 때이다. 바로 이런 때, 지겸이 <종문원상집>을 편찬해 위앙종 선풍을 드러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지겸이 순지의 표상현법(表相現法)을 가일층 확대시킨 점도 있지만, 당시 풍미했던 지눌 사상에 대한 일종의 반발적 표현도 담겨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불교신문3437호/2018년11월3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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