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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2 (2018).12.1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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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항일운동, 그 현장]<15> 제주 법정사 무장항쟁“일본인 쫒아내 한국(韓國)시대로 회복할 것이니 조력(助力)하라”
1919년 3·1운동 보다 5개월 앞서 일어난 ‘제주 법정사 무장항쟁’의 중심지인 법정사. 지금은 터만 남았다. 법정사지를 찾은 재가불자가 법당이 있던 자리를 향해 합장 반배하고 있다.

3·1운동 보다 5개월 앞선
1910년대 최대 무장 항쟁
스님 신도 주민 ‘힘’ 합쳐
수개월 준비 조직적 운동

1918년 10월 7일 제주 한라산에 자리한 법정사(法井寺)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스님과 신도 34명이 조그만 법당과 마당에 모였다. 나라를 빼앗은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서였다. 김연일(金連日) 스님이 대중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번에 제주도에서 일본인을 쫒아내 원래의 한국 시대로 회복할 것이니 조력(助力)하라.” 이어 선봉대장 강창규 스님이 맨 앞에 서고, 깃발을 든 대중이 뒤를 따랐다. 대열은 법정사를 출발해 도순리, 영남리, 서호리를 거쳐 서귀포 중문으로 향했다. 1919년 3·1운동 보다 5개월이나 앞서 일제에 맞선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지난 10월4일. 제주 법정사 터를 찾았다. 한라산 오름 가운데 하나로 해발 680m 지점인 법정악(法井岳)에 자리한 사지(寺址)를 가을바람이 휘감고 돌았다. 무장항쟁의 깃발을 올린 100년 전 그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때마침 내린 빗방울이 그날 스님과 신도들이 흘렸을 의분(義憤)의 눈물 같았다. 100년 전 도량을 외호한 현무암과 이름 모를 나무, 그리고 잡초만이 법정사 터를 쓸쓸히 지키고 있었다. 법정사는 ‘우진각(隅진閣)’ 모양의 초가집이었다. 지금의 여느 사찰처럼 화려한 전각(殿閣)이 아니라, 평범한 주민들이 사는 집이었던 것이다. 부처님을 모셨지만 법당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스님들이 머무는 요사가 같은 건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정사 터 앞에는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서 있다. 지난 2003년 11월 제주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61-1호로 지정했으며, 면적은 230.346㎡(보호구역 189.940㎡), 소재지는 서귀포시 도순동 산 1(하원동 산 1-1)이란 내용이 적혀 있다. 그 아래로 법정사 항일운동의 개요가 기록돼 있다.

현무암 무더기 한쪽에 녹이 슬고 파손된 무쇠 솥이 눈에 들어왔다. 함께 법정사 터를 찾은 이병철 불교제주방송 기자는 “법정사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그 당시 스님과 불자들의 흔적이 느껴진다”고 전했다.

법정사를 출발한 스님과 신도들은 몇 자루의 총과 나무 막대기로 무장했다. 일제에 맞서 호락호락 당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똘똘 뭉쳤다. 강창규 스님을 대장으로 한 선봉대가 앞장섰다. 마을에 들어설 때 마다 격문(檄文)을 배포하고 주민들을 직접 만나 설득했다. 안타깝게도 격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참가자는 700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제주 인구를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이다. 그만큼 일제에 항거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있었다.

선봉대는 강정리와 도순리 사이에 있는 전선과 전주를 잘랐다. 제주읍과 서귀포의 통신을 막아 일경(日警)의 출동을 지연시키려는 목적에서다. 서귀포를 거쳐 제주읍까지 가려고 나선 스님과 주민들은 우연히 만난 일본인 고이즈미 키요미(小泉淸身)를 끈으로 묶었다. 폭행까지 했다고 전한다. 일제에 대한 제주인들의 강력한 응징 의지가 엿보인다.

중문리에 도착한 대중은 일본 경찰이 머무는 중문 주재소(駐在所)를 습격했다. 주재소 내부를 몽둥이로 모두 부셨다. 선봉대장 강창규 스님은 짚에 불을 붙여 주재소를 불태웠다. 그렇게 항쟁의 불길은 거세게 타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일경들이 몰려왔다. 기마 순사대(騎馬巡査隊)였다. 저항에 막혀 쉽게 진압하지 못했지만 결국 총을 쏘아 주민들을 해산시켰다. 일경들은 주모자를 체포하고, 항쟁의 구심점이자 출발지인 법장사로 달려가 절을 불태웠다.

법정사 터에 남아 있는 샘물. 뒤에 보이는 돌무더기가 법정사 법당이 있던 곳이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김연일, 방동화(房東華) 스님 등 법정사 스님들을 중심으로 극도로 보안을 유지하면서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했다. 항쟁후 진행된 재판의 판결문에는 “전라남도 제주도 도순리 한라산 서남록 법정사 주지 김연일은 전부터 정부의 조선 통치에 대한 불평을 품어, 1918년 음력 6~7월경 이래 여러 명의 동지와 의논하여 불교도 및 농민을 모아 도당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연일, 방동화, 강창규 스님을 비롯한 항쟁 지도부는 거사에 앞서 신도와 주민들을 조직했다. 법회나 기도에 참여하기 위해 절을 찾은 신도들에게 항쟁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주민들에게도 은밀하게 알렸다. 또한 거사에 사용할 화승총(3정), 곤봉, 깃발을 준비했다. 앞서 9월말에는 마을 이장들에게 격문을 전했다.

정구용 스님 재판기록에 따르면 격문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강제에 의해 조선을 탈취 당한 조국의 백성은 이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각 면 각 이장은 바로 이민(里民) 장정(壯丁)으 모아 솔군(率軍)하고 음력 9월3일 오전 4시 하원리 지내에 집합하라.”

제주도 내의 최초이며 최대 규모로 일어난 항일운동이었다. 1910년대 전국 최대규모의 무장항일투쟁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참가자 가운데 66명이 연행되어 48명이 소요보안법으로 기소됐다. 이듬해 2월 31명이 실형을 선고받았고, 15명은 벌금형에 처해졌다. 잔인한 고문과 조사로 재판이 이뤄지기 전에 2명(강수오, 강춘근)이 옥사(獄死)하고, 수감 중에 3명(박주석, 김두삼, 김봉화)이 세상을 떠났다. 선봉대장 강창규 스님은 구속되어 5년 11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렇게 법정사 무장항쟁은 끝났다. 그러나 독립의 의지까지 꺾지는 못했다.

한금순 제주대 외래교수는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도세력은 법정사 주지 김연일을 비롯한 강창규, 방동화, 정구용 등의 승려와 박주석”이라면서 “이들 주도 세력들은 1914년부터 법정사에 거주하면서 항일운동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이어 한금순 교수는 “수개월의 사전 준비와 조직 구성으로 군대 조직의 틀 안에 인력을 배치시키고 역할을 분담했다”면서 “다수의 참여자를 어떻게 이끌 것인지를 미리 다 구성해 놓은 조직적인 항일운동이었다”고 강조했다.

법정사 터를 지키고 있는 가마솥. 무심한 세월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제주 법정사 무장항쟁 조직도

총지휘 김연일 스님, 좌대장 방동화 스님, 우대장 강민수 스님, 선봉대장 강창규 스님, 모사 박주석·장임호·정구용 스님, 선봉집사 최태유 김봉화, 선봉좌익장 이종창, 좌익선봉대 김명돈 김상인 조계성 김무석 김기수 오병윤 이승빈 고용석 김두삼 문남규 문남은 최신일 이달생 김성수 이윤평, 선봉 우익장 불명(不明), 우익 선봉대 불명(不明), 중군대장 양남구, 중군 선봉 양봉 김환율 원인수 김인송 지축생 강천옥 현술생 지갑생 오인식 강순봉 강태하 송을생 김창호 이원영 이봉규 등 주민 700명, 후군대장 김삼만

* 무오 대신 제주법정사 항쟁으로 불려야

지난 4일 열린 법정사 항일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기존의 ‘무오’ 대신 ‘제주’를 항쟁 명칭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금순 제주대 외래교수는 ‘제주 법장사 항일운동의 역사적 고찰’이란 주제 발표에서 “항일운동이 규명된 이후 무오(戊午)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명명됐다”면서 “무오라는 간지(干支) 대신 제주라는 지명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오는 법정사 항쟁이 일어난 1918년을 지칭한다. 한금순 교수는 “(1919년 3·1운동을) 기미독립만세라고 하던 것에서 간지를 사용하지 않고 삼일운동으로 용어가 바뀌고 있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학술대회 참석자들은 “타당성 있는 주장”이라면서 공감을 표시했다.

* 법정사 무장항쟁 참여자 형량

△궐석재판 = 김연일(징역 10년), 강창규(징역 8년), 정구용(징역3년), 강민수 김용충 징역(1년6월) △대석 판결 = 박주석(징역 7년), 김상언 방동화(징역 6년), 최태유 장임호 김삼만 양남구(징역 4년), 김인수 고용석 문남규(징역 3년) 강봉환 김봉화 조계성 김무석(징역 2년), 김기수 문남은 최신일 김명돈 이종창 이윤평 이달생 이승빈 김두삼 오병윤 김성수(징역 1년), 이춘삼(징역 6월), 강두옥 원인수 이원영 송을생 지축생 이봉규 김인송 김창호 강순봉 현술생 지갑생 김항율 양봉 오인식 강태하(벌금 30원)

* 참고자료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사편차위원회,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조계종 총무원 <조선총독부관보 불교관련 자료집> 김광식 <법정사 항일운동 재인식>, 한금순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

제주=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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