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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33> 진각국사 혜심대선사“망상 버리는 데는 간화선 만한 것이 없다”
  •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18.10.2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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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敎, 상대적 의미의 敎 제외
선사상사 측면에서도 이론적 
선리는 옳지않다며 실참 강조

주술적이거나 미신적인 요소 
‘불교 악습’ 타파 위해 노력
선문염송집 등 저서 유명세

보조국사 지눌 이어 ‘수선사’ 
제2세로서 간화선 크게 떨쳐

순천 송광사 광원암 조사전의 혜심(사진 왼쪽)과 보조국사 진영.

8월 중순, 새벽6시 무렵에 전남 강진 월남산 월남사지를 찾았다. 월남산을 배경으로 사찰 터가 있고, 사찰 입구에 혜심의 탑이 있다. 그곳은 수선사 2세 진각국사 혜심선사가 머물렀던 곳이다. 그 주변은 온통 차 밭이다. 차나무가 잘 자란다는 것은 땅이 비옥하고, 자연환경이 좋다는 뜻이다. 

보조국사 제자가 되다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년)의 성은 최씨.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로 나주 화순현 출신이다. 모친이 하늘의 문이 열리는 꿈을 꾼 뒤에 선사를 낳았다. 어려서 아버지가 일찍 타계하자, 혜심은 출가하기를 청했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아 유학(儒學)에 힘썼다. 그러나 혜심은 늘 불교 경전을 독송하며, 출가의 뜻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1201년, 23세의 혜심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보(病報)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인척 형인 배광한의 집에서 어머니 병수발을 들다 잠깐 사이 관불삼매(觀佛三昧)에 들었다. 이때 어머니는 꿈에 여러 부처와 보살들이 사방에 두루 나타나는 것을 보고 꿈을 깨고 나서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그 이듬해 어머니가 타계하자, 당시 조계산에서 결사를 하며 수행하고 있던 보조국사에게 나아가 모친의 재(齋)를 올린 뒤, 삭발염의하고 보조국사의 제자가 됐다. 

출가 이후 혜심은 더욱 정진했다. 오산에 있을 때는 반석 위에 앉아 온종일 선정에 들었고, 오경(五更)만 되면 게송을 읊었는데, 소리가 매우 우렁차 10리 밖까지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혜심이 조금도 때를 어기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그 시간을 가늠할 정도였다. 또 지리산 금대암에 있을 때는 연좌대 위에서 좌선을 했는데 눈이 내려 머리에 수북이 쌓였는데도 삼매에 들었다. 이때 혜심이 눈 속에 묻혔는데, 움직이지 않아 대중이 죽은 줄 알고 다가가 흔들어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사의 정진력을 알 수 있는 ‘니구화(尼拘話)’ 선시를 보자.

“해탈의 길을 알고자 한다면, 근과 경이 서로 만나지 않아야 한다. 눈과 귀는 보고 들음이 끊어져야 하느니, 소리와 형태는 늘 시끄러운 것이므로(欲知解脫道 根境不相到 眼耳絶見聞 聲色鬧浩浩).”

강진 월남산 월남사지의 진각국사비.

지눌이 지리산 억보산 백운암에 있을 때인 1205년, 27세의 혜심은 보조국사를 찾아갔다. 혜심이 암자에 도착하기 전, 잠깐 산 밑에서 쉬었다. 마침 암자에서 지눌이 시자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이런 게송을 지었다. “아이 부르는 소리는 송라의 안개에 떨어지는데, 차 달이는 향기는 돌길 바람에 풍겨오네.” 혜심이 국사를 만나 이 게송을 보여주니, 지눌은 머리를 끄덕이며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주었다. 혜심은 또 이런 게송을 지어 스승에게 올렸다. “전에는 스승의 손에 있더니, 지금은 제자의 손안에 있네. 만일 더위에 허덕이며 다닐 때, 맑은 바람 일으킨들 어떠하리(昔在師翁手裏 今在弟子掌中 若遇熱忙狂走 不妨打起淸風).”

지눌이 다 헤어진 짚신을 가리키며 “신발은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혜심은 “왜 그때에 보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어느 날 지눌이 법문을 하는 와중에 대중에게 조주의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과 대혜 종고의 십종병(十種病)을 들어 대중에게 물었다. 대중 가운데 아무도 대답을 못하는데, 오로지 혜심만이 다음 대답을 했다. “세 가지 병을 앓는 이라야 그 뜻을 알 것입니다.” 지눌이 다시 물었다. “세 가지 병을 앓는 사람은 어떤 곳으로 숨을 쉬는가?” 혜심은 손으로 창을 한 번 내리쳤다. 이에 지눌은 방장실로 돌아가 그를 불러 말했다. “나는 이제 그대를 얻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네. 그대는 불법을 서원으로 삼고, 본 서원을 잊지 말게.”

수선사 ‘사주’사양했지만… 

1208년 보조국사가 혜심에게 수선사의 사주(社主)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혜심은 이를 거절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1210년 지눌이 입적하자, 문도들이 왕에게 건의하여 혜심은 수선사를 계승하라는 명을 받는다. 혜심을 후원하는 선자들이 많았는데, 최우(?~1249년)를 비롯해 당시 무인 집권자들의 가족과 무인 정권에 참여했던 수많은 문무 관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213년, 혜심은 선사(禪師) 법계를 받고, 다시 1216년에는 대선사(大禪師) 법계를 받았다. 선사의 비명에 의하면 “승과를 거치지 않고, 품계를 받은 것은 선사가 처음이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혜심은 무인 집권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혜심이 활동하기 이전 문신들은 교종 사찰에 막대한 재산을 기탁했는데, 문신들이 몰락하면서 교종 승려들에게도 타격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교종 승려들 중 일부가 무신 정권에 대항하자, 무신정권은 선종 승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보조 지눌도 무신들의 후원을 입었지만, 혜심은 스승보다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혜심이 수선사에서 보조의 선풍을 진작시키자, 많은 수행자들이 모여들었다. 수선사 장소가 협소했는데, 강종(1212˜1213년 재위)이 이 말을 듣고, 몇 차례에 걸쳐 중축해주었다. 이어 강종은 사신을 통해 혜심에게 만수가사와 마납(磨衲) 각 한 벌과 향, 차, 보병(寶甁) 등을 내리며 선사에게 법요를 구하였다. 이에 혜심이 왕에게 <심요(心要)>를 지어 보냈다. 1219년 고종(1214˜1259년 재위)이 산청 단속사(斷俗寺)의 주지로 명하자, 여러 번 사양하다가 이듬해에 옮겨갔다. 이 단속사는 예전 대감국사 탄연(1070˜1159년)과 신행(神行)이 머물렀던 곳이다. 

혜심이 머물렀던 강진 월남산 월남사지.

저서 그리고 ‘간화일문'

1234년 봄 혜심은 다시 월등사(月燈寺)로 옮겨갔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고통이 매우 심하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답변했다. “어떠한 고통도 이르지 못하는 곳에 따로 한 건곤이 있다. 묻노니, 그곳은 어떤 곳인가? 매우 고요한 열반의 문이다.” 이후 혜심은 문인들을 불러놓고, 여러 일을 부탁한 뒤 마곡(麻谷)에게 말했다.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다.” “스님, 왜 바쁘십니까?”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다.”

마곡이 멍하니 있을 때 빙그레 웃으며 가부좌한 채 앉아서 입적했다. 이때 법랍 32세, 나이 56세였다. 고종은 ‘진각(眞覺)’이라는 국사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원조지탑(圓炤之塔)이라고 했다. 탑은 송광사 광원암에 모셔져 있으며, 진각국사비(비문이 마멸돼 판독 불가)는 강진군 월남산 월남사(月南寺)에 모셔져 있다. 그의 문하에는 몽여, 진훈, 각운, 마곡 등이 있으며, 몽여는 그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3세 법주가 됐다.

저서에는 <선문염송집> 30권, <심요(心要)> 1권, <조계진각국사어록> 1권, <구자무불성화간병론> 1편, <무의자시집> 2권, <금강경찬> 1권, <선문강요> 1권 등이 있다. 

혜심의 선사상적 위치 및 사상은 대략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혜심은 지눌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2세로서 간화선을 크게 떨쳤다. 지눌의 충실한 조술자(祖述者)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고려 선종의 위치를 굳건히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둘째, 혜심도 지눌과 같이 수행의 요점은 지관(止觀), 정혜쌍수를 주장했다. 그러나 혜심은 “망상을 버리는 데는 간화선만한 것이 없다”고 하며 오로지 간화일문(看話一門)만을 주장했다. 즉 정혜쌍수를 수행의 요체로 본 것은 지눌과 동일하지만, 지관, 정혜가 간화일문에 포함된다는 것은 혜심의 독특한 견해이다. 셋째, 지눌이 선교일치를 주장한 것과 달리 혜심은 간화선만을 주장했다. 선(禪)과 교(敎)라는 상대적 의미에서 교를 제외했으며, 선사상에서도 이론적인 선리는 옳지 않다며 실참(實參)을 강조했다. 넷째, 유학 차원에서는 유불(儒佛) 일치나 상이점을 긍정적으로 주장했다. 다섯째, 주술적이거나 미신적인 요소의 불교 악습을 타파하고자 노력했다. 

송광사 광원암에 모셔져 있는 혜심의 탑.

[불교신문3435호/2018년10월27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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