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환 ‘법난의 진실을 깨닫고 나서’

‘법난의 진실을 깨닫고 나서’

학생인 저에게, ‘10·27법난’은 참 생소한 이름입니다. 교과서에도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현대사를 다룬 서적에서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준만 씨가 지은 『한국현대사 산책』에서 약간의 전말을 본 적은 있지만, 그다지 상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감흥을 얻지 못했습니다. ‘10·27법난’은 단지 많은 역사적 사건들 중 하나로 제게 기억되었을 뿐이고, 그마저도 기억에서 잊혔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읽은 책 한 권이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바로 유응오 씨가 저술한 『10·27법난의 진실』이라는 책입니다. 아버지의 서가 꼭대기에 있던 이 책은 먼지가 많이 묻고 약간 구김이 지긴 했지만 읽는 데 큰 불편함은 없었습니다.

책을 꺼내 든 저는 다른 역사책을 읽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10·27법난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되짚었고 첫 장을 펼쳤습니다. 책은 흡입력이 좋았습니다. 저는 책을 빠르게 읽어 내렸습니다.

책의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역사적 사건의 한 단면을 더듬는 듯 했습니다. 책을 펼칠수록 스님들은 고난과 역경이 생동했습니다. 어떻게 한 국가의 지도자가 민중의 종교를 이토록 억압할 수 있을까요? 고문과 협박을 통해서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요? 책을 읽으면서 질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습니다.

질문은 결국 저의 무지에 대한 참회와 반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불교의 역사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 정작 이런 고난과 역경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저의 무관심은 곧 다른 사람들의 무관심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10·27법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스님들이 고신을 받고 감옥에 갇혔던 그 끔찍한 역사를 알지 못합니다. 마치 이 책을 읽기 전의 저처럼 말입니다.

책을 빠르게 읽고 저는 저 스스로를 반성했습니다. 이런 고난의 역사를 알아야 고난의 굴레가 끊어질 것입니다. 참회의 마음으로 글을 쓰려 합니다. 책을 읽고 깨달은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10·27법난은 1980년 가을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발생한 사건이지요. 제가 배운 1980년은 광주를 신군부의 총검이 무참히 짓밟았던 해입니다. 제가 잘 알지 못했던 10·27법난도 결국은 광주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한 스님의 이야기에 눈이 꽂혔습니다. 의로운 일을 위해 불의에 항거하다 고신을 겪은 분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분의 법명은 월주 스님입니다.

1980년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에 재직하고 계셨지요. 1980년 5월 계엄군의 총검이 광주 시민들의 염원을 짓밟았습니다. 무참하게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광주의 진실을 회피했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보는 것은 험난하고 어려우며 무력을 가진 신군부와 정면으로 대적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월주 스님은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6월 2일, 스님은 광주시민돕기본부를 조직했습니다.

6월 6일, 광주로 내려가 피해자들에게 각 사찰 모금액 2백만원을 지급했습니다. 비명에 횡사한 억울한 영령들의 혼을 추모하기 위해 천도제 실시를 추진했지만, 신군부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이 대목을 읽고 저는 놀랐습니다. 독재 정권에 맞선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직위가 높을수록, 짊어진 짐이 무거울수록,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월주 스님은 어려운 길을 걷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조계종의 총무원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가졌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정권의 칼날이 날카로웠지만, 어둠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때때로 ‘해야 한다’와 ‘할 수 있다’의 개념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도덕적으로 마땅히 해야 하지만, 어렵고 힘든 길이기에 회피하고 싶은 경우도 많습니다. 월주 스님의 의로운 행동은 책을 읽는 저에게 뭇 귀감이 되었습니다. 고난과 어둠의 험로가 앞에 놓여 있더라도, 신념과 원칙을 지키는 스님의 행동이 뇌리에 깊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불의에 항거한 귀인들은 불의의 폭력을 피할수 없었습니다.

폭력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합니다. 죽음을 수반합니다. 선한 사람은 그 보답을 받아야 하지만, 월주 스님의 행동은 고통만을 낳았을 뿐입니다. 독재 정권의 칼날이 불교계를 향했기 때문입니다. 칼날은 결국 불교 교단을 찔렀고, 상흔은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광주에서 상경한 월주 스님의 행적을 꼼꼼히 읽었습니다. 스님이 총무원장에 오르기 전까지의 과정은 지난했습니다. 조계사파와 개운사파가 대략 3년에 걸친 종파 투쟁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80년에 이르러서 종파 간의 갈등은 봉합이 되었습니다.

월주스님이 총무원장에 선출되고 종단 구도가 총무원장 중심제로 바뀌었습니다. 정권은 불교를 타락한 종교라 매도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권이 칼날을 뽑지 않아도, 불교는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었습니다. 신군부가 내세운 불교의 ‘정화’는 법난의 명분이 될 수 없습니다.

기실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그것이 법난의 사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궁금했습니다. 왜 신군부는 불교를 탄압했을까요? 어떤 사유를 갖고 불교를 억압했을까요? 월주 스님의 행적을 읽으며 미약하나마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신군부는 월주 스님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신군부에 협조를 요청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지지기반이 미약했던 신군부는 종교의 권위를 이용해 집권의 정당성을 채우려 했습니다. 총무원장이 환영인사를 한다면, 신군부는 불교계의 지지를 얻는 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서류의 문구는 이러했습니다.

“구국영웅 전두환 장군으로 대통령으로 추대하길 바랍니다.”

추악한 서류입니다. 월주스님은 이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광주학살에 의해 죽은 시민들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어렵고 고단할 길이기도 합니다. 서명을한다면 정권의 횡포에 무탈할 것입니다. 불의한 정권에 타협한다면 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월주 스님은 이 서류를 거부했습니다. 얼마 뒤 ‘총무원장’의 서명이 아닌, ‘총무원’ 전체의 명의로 서명을 부탁한다는 요청이 왔습니다.

개인의 부담을 덜 수 있는 제안입니다. 하지만 월주 스님은 단호히 이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근간인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배할뿐더러, 불법이 국가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리면 안 된다는 이유로 거부했습니다. 또한 광주에서 신군부가 벌인 악행도 스님의 심중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신군부는 생명을 죽여서 정권을 잡았습니다. 피가 신군부의 온 몸을 가득 메웠습니다. 신군부는 전신의 피를 씻어도 씻을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결국 양심에 따라 월주 스님은 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서류에 서명하지 않은 교단은 천주교와 조계종이 유이했습니다. 월주 스님과 많은 스님들이 택했던 길은 결국 고난의 가시밭길이 되어 스님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신군부가 왜 불교 교단을 탄압했는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신군부는 지지기반이 없었습니다. 온 국민이 그들의 적이었습니다.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신군부는 종교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신자가 많은 개신교와 천주교, 그리고 불교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불교 교단을 이끄는 스님들은 신군부의 협조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신군부는 스님들을 억압하기 위해, 그리고 교단을 어용화하기 위해 ‘법난’이란 치욕의 칼을 뽑은 것입니다. 이유는 더 있습니다. 천주교는 교황청과 가톨릭 국가들의 시선이 그 배후에 있습니다. 신군부는 국내에서 무도하고 잔악했지만, 바깥 나라들의 시선은 의식했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홀로 있었습니다. 세계 여러 곳에 불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홀로 행동할 뿐 연대하지 않았습니다. 신군부는 천주교 탄압에 망설였지만 불교의 억압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배불숭유의 기치를 내걸고 불교와 사원을 탄압했던 조선도 하지않았던 일을 서슴없이 행했습니다. 스님들의 신체를 구속하고 군홧발로 스님들을 밟았습니다. 남산, 그 죽음의 땅에 스님들을 끌고 가서 거짓으로 자백을 강요했습니다. 신군부는 1600년 역사를 가진 불교를 죽였습니다. 참혹하고 비참하게 죽였습니다. 이런 대목들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 왔습니다. 신군부는 잔악했고 진리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신군부가 변명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개운사파와 조계사파 사이의 대립이 있었고 분쟁을 거듭하며 몇몇 스님들은 탄원서를 넣었습니다. 월주 스님이 총무원장에 올라도 몇몇 스님들의 일탈은 발생했습니다. 어디에나 갈등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잡음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갈등과 잡음은 집단 내의 화해와 치유로 마무리해야 합니다. 스스로 정화할 때, 가장 아름답게 봉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군부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1980년의 불교는 그런 ‘자정’의 과정을 거쳐 다시 태어났을 것입니다. 신군부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불교의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핏속에서 태어난 신군부는 칼자루를 쥐고 칼을 뽑아 유구한 역사의 불교를 찔렀습니다. 숱한 갈등을 정화와 평화의 길로 봉합했던 불교가 한낱 군인들의 군홧발에 짓밟힌 것입니다.

다시 월주 스님 이야기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월주 스님은 신군부가 내민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스님은 신군부를 비판하길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부당한 방법을 통해 숱한 인명을 살상하고 정권을 잡은 신군부입니다. 모두가 숨을 죽였지만, 때때로 고개를 들고 바른 말을 하는 의인들이 있었습니다.

월주스님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신군부는 정당성이 없었습니다. 정당성이 취약한 것이 아니라, 정권의 정당성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다못해 종교의 힘이라도 빌려야 했습니다. 신군부는 언론을 어용화하고 방송을 어용화하고 기업을 어용화하려 했던 것처럼, 종교의 어용화에도 박차를 가했습니다. ‘전한국불교회’와 같이 정권의 입맛에 맞는 단체들이 생겨났습니다. 조계종은 종교의 어용화에 맞섰습니다. 결국 조계종은 한국불교총연합회와 전한국불교회와 같은 단체에서 탈퇴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정권의 칼날에 대적한 것입니다.

‘사회정화’와 ‘정의’는 전두환 정권의 기치였습니다. 곳곳에서 ‘정화’와 ‘정의’를 위한 움직임이 활발했습니다. ‘정화’를 위해 죄 없고 선량한 사람들을 잡아다 삼청교육대에 넣었습니다. ‘정의’를 위해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광주의 시민들을 향해 선제 발포를 했습니다. ‘정화’와 ‘정의’는 정권의 기치였지만, 실상은 모두를 배격한 허울뿐인 단어들이었습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정의’라는 이름의 칼과 ‘정화’라는 이름의 목줄을 앞세워 불교 교단의 목을 옥죄었습니다. 상술했듯, 불교의 정화는 정권과 하등 상관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스님들은 그 ‘정화’라는 이름의 목줄을 차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불교계보다 ‘정화’가 필요한 것은 오히려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교단은 1980년 9월 17일, 자율적인 정화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조계종 총무원의 개정 시안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대표자의 등록조항을 신고조항으로 바꾸는 불교재산관리법, 2) 문화재보호 구역 내의 사찰 중, 개축 규제를 완화하는 문화재보호법 개정안, 3) 도시계획법 시행령과 도시공원법의 개정, 4) 사찰공원 입장료를 사찰토지 사용료로 3할 지급하는 사찰공원법이 그것입니다.

교단의 개정안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다만, 교단의 원활한 운영을 침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안들도 고쳐서 개정안에 포함했습니다. 개정안은 교단 내에서 제정된 만큼, 미온적이고 온건한 방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몇몇 사안들은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교단이 자체적으로 제정한 개정안이 사회적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토론과 합의로 해결해야 할 일이지, 고문과 매질로 풀 일이 아닙니다.

하다못해, 제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사소한 학급문제를 결정할 때도 토의를 통해 의결합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매듭을 민주적으로 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총검으로 묵살해서 힘의 논리로 짓밟았던 것입니다.

기실, 교단이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개정안을 내놓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더라도, 그것이 신군부의 당위성과 부정 축재에 연관되지 않았더라면, 결과는 비슷했을 것입니다. 신군부가 원한 것은 ‘정의’와 ‘정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신군부에 대항했던 월주 스님의 처지도 바람 앞의 등불이었습니다. 문공부는 월주 스님의 조계종 총무원장 직위를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애초부터 신군부와 타협하지 않았던 스님을 정권이 승인할 턱이 없었습니다. 막대한 권력을 움켜쥐고 나라를 흔들었던 신군부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전두환의 국보위는 불교 교단에 정화 지침을 내렸습니다. 정화 지침은 단순히 ‘지침’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존재했던 많은 지침들이 그랬듯이,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하고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묵살하는 강제적인 ‘지침’이었습니다. 교단은 국보위의 불교지침을 거부했습니다. 지침을 내리는 집단이 지침을 받아야 했습니다. 악한 사람이 권력을 잡았고 생명을 죽인 사람이 부귀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도덕이 흙탕물 속에 떨어진 상황에서 그것을 연꽃이라 한다면, 어느 누가 믿을까요?

신군부는 질척한 흙탕을 가리켜 연꽃이라 부르고 생각하길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살아 있는 시민과 양심들은 신군부의 압제에 당당히 맞섰습니다. 당시 불교 교단을 이끌던 스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0월 20일, 조계종은 자율적인 정화 지침을 발표했습니다. 무자비한 횡포에 맞선 스님들의 저항이었습니다.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일주일이 흐른 10월 27일, 국보위의 지시를 받은 군경이 도처의 사찰에 흩어져 스님들을 체포했습니다. 어떤 스님은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감금하고 때려서 짓밟는 육체적 고문도 있었습니다. 언론에 허위적인 사실을 유포하고 정신에 상흔을 입히는 고문도 존재했습니다. 신군부는 두 종류의 고문을 섞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총무원장이었지만, 문공부의 재가를 받지 못한 총무원장이었던 월주 스님도 결국 보안사에 끌려갔습니다. 보안사에선 총무원장의 직임을 포기하는 각서를 내밀었습니다. 신군부의 목표도 결국 여기에 있었습니다. 정권의 태동이 불의했기에 당위를 얻으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스님들은 그 당위에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피가 그들의 전신을 가득 채웠거늘, 어떻게 정권의 당위라는 것이 있단 말입니까? 신군부는 그러자 ‘비상한’ 수단을 사용했습니다. 스님들이 반대할 것을 알면서 정화 지침을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교단의 지엽적인 갈등을 큰 문제로 비화하여 압박을 넣었습니다. ‘정의’나 ‘정화’와 같은 공허한 말들을 앞세워 스님들의 자율성을 억압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명분삼아 10월 27일 전국 도처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을 붙잡아 구금하고 억류하고 고신을 가했습니다. 신군부의 추악한 실상을 직접 목도한 월주 스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님은 불교를 바로 세우고,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많은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총무원장이 되어 교단의 해묵은 갈등을 바로잡고, 교단의 자체적인 정화를 추구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폭력이 불국토를 짓밟고 압제가 자유의 정원을 파괴했습니다. 스님 앞에 놓인 것은 단지 포기 각서였지만, 그것은 한낱 종이쪼가리가 아니었습니다. 각서 뒤에는 폭압적인 국가 권력의 악행이 도사렸습니다. 광주의 울분이 서려 있었습니다. 아침에 고문을 받고 점심에 진술을 하고 저녁에 다시 고문을 받는 스님들의 비참한 삶이 거듭 있었습니다. 스님의 앞은 위난의 길이었습니다. 참담한 마음이 무참하게 많았습니다. 스님은 후세의 사람들이 따라 걸어도 부끄럽지 않은 길을 걸으려 했지만, 이제 그 길을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결국 서류에 서명했습니다. 추악한 서류였습니다. 수사관들은 그날 한바탕 웃으며 소주를 기울였을 것이고, 스님은 부정한 권력이 지배하는 거리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걸었을 것입니다. 월주 스님에 대한 고신은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험한 길이었습니다.

월주 스님에 대한 고신은 그것이 끝이었지만, 다른 스님들의 위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도선사 주지였던 혜성 스님, 대각사 주지였던 경우 스님, 보문사 주지였던 정수 스님, 천왕사 주지였던 성해 스님, 증심사 주지였던 현광 스님, 상원사 주지였던 삼보 스님을 비롯하여, 불교에 우호적인 성향을 표시했던 문공부 관료마저 잡혀와 고문을 받았습니다. 구금과 고문도 참혹했지만, 신군부는 더 비참한 방식으로 스님들을 대했습니다.

거짓으로 사음 혐의를 만들어 언론에 누설했습니다. 사찰의 관리비용, 공사대금으로 쓰인 돈을, 주지들의 사유재산이라 매도했습니다. 대각사의 주지였던 경우 스님은 계엄사에 의해 갑자기 1백77억9천8백만 원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스님들에 대한 사후처분도 가혹했습니다. 도선사의 주지였던 혜성스님은 모진 고문으로 인해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혜성 스님은 청소년 포교에 앞장서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인이었지만, 계엄사는 체탈도첩의 조치를 통해 스님을 강제적으로 환속하고 스님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상원사 주지였던 삼보 스님은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던 삼청교육대로 보내졌습니다. 삼보 스님은 삼청교육대에서 인간답지 못한 삶을 보냈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스님들이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아야 했습니다. 진리가 날개 없이 추락하고, 총검이 진리를 압도했습니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억겁의 시간만큼 길었습니다. 그러나 긴긴 밤도 동틀 녘이 되면 무너지듯이 전두환의 시대도 서서히 저물어 갔습니다. 폭정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항거했기 때문입니다.

1987년 전두환은 민주화 요구를 수용했습니다. 다양한 시대적 요구가 터져 나왔습니다. 10·27법난에 대한 진상규명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노태우가 민주 진영의 분열을 틈타 대통령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노태우는 전두환을 내쳤지만, 그 자신도 군사반란의 주동자였기에 떳떳하지 못했습니다. 10·27법난의 진상규명의 불씨는 민주화와 함께 타올랐지만, 시대의 어둠을 이기지 못하고 저물었습니다.

10·27법난은 잔혹했지만, 그 잔흔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법난이 일어난 지 38년이 지났고, 진상규명을 요청한 세월이 어연 30년입니다. 법난의 주동자인 전두환은 권력을 잃었지만 영화는 계속 누렸습니다. 백담사로 ‘유배’를 왔지만 여러 스님들의 호의로 넉넉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노태우도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1995년 전두환과 노태우는 법정에 서서 무기징역과 징역 22년을 선고받았지만 ‘대화합’의 명목으로 2년 뒤 풀려났습니다. 과연 ‘대화합’은 무엇일까요?

대통령을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을 학살하고 부정축재를 저지르며 종교의 진리를 죽인 사람을 사면하는 것이 ‘대화합’일까요? 그들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 사람도 그 ‘화합’에 동의할 수 있을까요? 모진 고문과 음해로 시련을 겪은 스님들이 그 ‘화합’에 동의할 수 있을까요? 인간에 대한 번민과 용서는 필요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반성을 전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반성 없는 ‘화합’이야말로 정말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요

얼마 전 캄보디아에서 월주 스님이 크메르루즈 반군에 희생된 영령들을 위해 진혼행사를 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또한 포항지진으로 고초를 겪은 시민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지구촌공생회나 함께 일하는 재단 등의 이사장에 재직 중이라는 소식도 보았습니다. 그런 기사들을 읽으며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론 제 자신을 뉘우쳤습니다. 광주항쟁으로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다 신군부의 눈 밖 에 났고 그 결과 스님을 포함한 종단 전체가 고통을 겪었습니다.

저와 같은 범인들은 삶에 그토록 커다란 난고가 닥친다면, 본래 하고자 했던 선행이나 덕행을 접고 세속과 연을 끊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월주 스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이전에 그러했듯, 법난 이후에도 고귀하고 거룩한 삶을 걸었습니다. 그러한 삶의 궤적은 선행과 덕행을 귀찮다고, 시간이 없다고, 일이 많다고 회피하는 저에게 큰 귀감으로 남았습니다. 도선사 주지를 지내고 청담학원을 운영했지만, 그것 때문에 고초를 겪어야 했던 혜성 스님의 입적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스님은 현세에서 짊어졌던 많은 짐을 내려놓고 내세로 떠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혜성 스님이 짊어진 그 커다란 짐을 현세의 우리는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할 때에만 법난은 역사적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10·27법난의 주동자였던 전두환과 노태우는 자신에게 돌아온 많은 비난과 질문들을 회피했습니다. 특히 전두환은 자신의 잘못을 전혀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회고록을 써서 의롭게 죽은 많은 영령들을 조롱했습니다. 재판이 열렸지만 치매를 이유로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10·27법난이 잊혀선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법난의 전모와 고초를 겪은 스님들을 기억해야만 주모자들을 심판할 수 있습니다. 사법적 심판이 아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역사적 심판’을 내릴 수 는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억을 해야, 정치와 종교가 합일하는 세상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독재자는 때때로 강대하지만 역사의 흐름속에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역사의 흐름은 시민들의 생각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려워져서 다시 독재와 어둠의 굴레가 세상을 삼킨다 하더라도, 시민들이 10·27법난의 전모와 그것이 왜 악한지 기억할 수 있다면, 10·27법난과 같은 비극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추악한 비극은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글을 쓰면서 깨닫고 느낀 바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 잔악한 짓을 일삼았던 독재자들의 행동을 보았습니다. 잔인한 국가권력 앞에 쓰러졌던 스님들의 무참했던 삶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시련을 겪고 나서도 진리를 위해 정진했던 의인들의 삶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10·27법난의 기억은 우리 주위에서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고결한 삶을 추구하다 고초를 겪었던 사람들의 삶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조차도 책을 읽기 전까진 10·27법난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이런 저를 통렬히 반성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 미래세대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일단은 10·27법난을 기억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 글을 쓰며 주위의 친구들에게 10·27법난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하였습니다. 저나 저의 친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기억할 때 10·27법난이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앞으로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도 필요합니다. 10·27법난을 일으켰던 주동자들은 이미 나이가 들고 병들었지만, 그들에 대한 역사적 단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단죄가 없다면, 10·27법난과 같은 비극이 또 다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재발방지가 필요한 것은 단연입니다. 다시는 정치가 종교 위에 군림하려 드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밝고 막막할 정도로 광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선 과거를 돌아보고 자성하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10·27법난은 그 첫 단추입니다. 우리가 법난을 기억할 때 법난이 의미를 갖고 생동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윤지환 (대전 지족고등학교)
 

심사평

‘10·27법난 문예공모전’ 산문 부문 응모작은 총 46편이었다. 이들 중에는 주제와 전혀 관련 없는 글도 있었고, 내용이나 분량이 부족한 글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많은 글들이 한국현대불교사의 가장 커다란 상처인 10·27법난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대응방안을 모색한 내용이어서 이 행사의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10·27법난 문예공모전’은 1980년 군부가 한국불교계를 유린한 무자비한 폭력 사태를 정확하게 인식하여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슬기롭게 대처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부대중이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산문부문 심사에서는 응모자의 10·27법난에 대한 이해와 불자로서의 태도가 얼마나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기술되었느냐에 초점을 맞추었다. 심사 과정에서 새삼 확인할 수 있었던 놀라운 사실은, 대다수 응모자들이 10·27법난에 대해 모르고 있다가 그 실체를 접한 뒤 충격을 받았고, 불자답게 분노를 다스리며 현명한 상생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글을 썼다는 점이다.

응모자 가운데는 학생도 적지 않은 듯한데, <10·27법난의 진실>이란 책을 읽고 마치 독후감을 쓰듯 책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청소년 불자의 분노와 각오를 서술한 글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 글은 10·27법난 사건을 <10·27법난의 진실>이란 책에 의존과 특정 스님 이야기가 지나치게 많은 점이 아쉬웠다. 매일 같이 법당을 청소하고 기도를 드리는 한 신도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진 '오욕의 불교에서 중흥의 불교로'는 법난의 실체를 간략 명료하게 요약하여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현대 불교가 과거의 참담한 역사를 딛고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위한 기복불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결말 부분이 돋보였다.

이 밖의 수상작들도 글쓰기의 기본이 되어 있고 주제를 잘 소화하였지만, 글의 전개와 표현상의 미숙함 등 문제로 순위에 서 뒤로 밀렸다. 모든 수상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며, 앞으로도 불교계가 주관하는 문예행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응모하시길 간구(懇求)한다.

장영우 동국대 문예창작과 교수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