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차례 깨달음…제자교육 수행법은 간화선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6근이 보고 듣고 알지만
만상에 물들지 아니하여
진성이 자재…첫 번째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영감은 
이통현의 ‘신화엄경론’ 읽고 
상무주암 ‘대혜어록’에서… 

조계총림 송광사에 소장중인 보조국사 지눌스님 진영(본지 자료사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중국이 국가적으로 혼란한 시기에서부터 사회주의 시대까지 살다간 선사가 허운(虛雲, 1840˜1959년)이다. 꺼져가는 중국의 선종과 법맥에 불씨를 지핀 선사로서 현재 본토와 대만 승려들이 대부분이 허운의 법맥이다. 중국 승려들 중에는 허운의 진영사진을 지갑에 넣어 품고 다닐 만큼 그는 중국 선종의 아버지와 같은 이미지다. 우리나라 선객들도 허운을 흠모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면 우리나라 조계종 승려들은 역대 어떤 선지식을 멘토로 할까? 

한국선을 연구하는 해외논문 주제 가운데 보조선이 간간이 거론된다. 지눌 사상을 주제로 한 박사논문이 미국에서 3편, 일본과 대만에서 각각 1편이 나왔다. 20여 년 전, 미국 하와이대학에서 지눌의 선(禪)이 출판됐다(Robert Buswell : The Korean Approach to Zen,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3). 필자가 모르지만, 이외의 논문이나 저서가 또 있을 거라고 본다.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년)은 원효에 버금가는 분이요, 한국사 이래 한국불교 선사상의 체계를 세운 선사로 평가받는다. 고익진(1934〜1988년) 교수는 지눌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지눌의 정혜결사는 애초에 선종 일각의 자각에서 일어난 운동이다. 그의 선사상은 조선조 500년을 거쳐 오늘에 이르도록 면면히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눌 이전은 중국 선의 법맥이 나말여초에 전승되며 중국선사상적인 측면이 전개되었다면, 지눌 이후로는 선사에 의한 한국불교 독자적인 선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눌의 활동 이전과 활동하는 무렵, 외세적으로는 혼란한 시기였다. 거란족은 송과 금나라의 침입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고, 송나라가 금나라에 쫓기며 계속 남하해 남송(南宋, 1127〜1279년)을 세웠다. 이 무렵, 몽골은 칭기즈칸(1162~1227)이 부족을 통합하고 나라를 건설했다. 고려는 이자겸의 난(1126년)과 묘청의 난(1135년)이 일어났다. 이어서 명종 초에 일어난 정중부, 이의방을 중심으로 무신의 난이 일어났다(1171년). 이후 무신들의 권력다툼으로 서로를 살육했고, 문신 귀족과 가까운 교종의 승려들이 무신 정권에 도전하면서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한편 무신들은 교종에 반하는 정신세력을 찾고자 했고, 명종 26년 최충헌이 무신 정권을 잡은 이래 세습 정치가 시작됐다(1196년). 

 ▶ 문자선과 간화선 

고려 중기에서 말기로 흘러가면서 교와 선의 분쟁이 있었다고 하지만, 선종을 드러낼만한 비전이 없는 상태였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지만, 고려시대 교종이 강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균여(923~973년)의 화엄사상과 화엄종은 고려 초기에 불교 사회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법상종의 소현(1038˜1096년)이 활동하던 당시, 중국에는 서명원측(西明圓測) 학파와 자은규기(慈恩窺基) 학파로 나누어 있었다. 대체로 고려 초까지 서명학파(신라 원측법사의 사상)의 법상종이었으나 소현이 활동하면서는 자은규기 법상종으로 변화됐다. 천태종은 대각국사 의천(1055˜1101년)의 활동이 있었는데, 의천은 선교 대립을 의식해 선교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고려 중기에 혜조국사 담진·원응국사 학일·대감국사 탄연·연담(淵湛)이 배출돼 교종에 비해 미약했으나 선은 면면히 흘렀다. 그러다 최충헌에 의해 연담 등 10여 명의 승려가 영남지역으로 유배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법맥조차 끊어질 정도로 위기에 처했다. 한편 동일한 사굴산문에서도 지눌과 혜심의 수선사는 최 씨 무신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다. 최 씨 집권 이후 선종은 크게 두각을 나타내면서 불교계를 대표했으며, 교종 승려가 국사로 추증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선종의 승려들이 왕사 국사가 됐다. 

지눌스님이 세 번째 깨달음을 이룬 지리산 상무주암. ‘상무주’ 편액은 경봉선사가 글씨이다.

보조국사 지눌에게 사상적인 영향을 미친 점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지눌 이전 선사상을 전개한 이들이다. 곧 탄연이 있었고, 청평거사 이자현의 능엄선이 있었으며, 정각국사 지겸(志謙, 1145˜1229년)에 의한 일원상 사상이 있었다. 지눌은 이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둘째는 규봉 종밀의 <화엄경>에 입각한 교선일치와 돈오점수 사상이다. 셋째는 송대의 문자선과 대혜종고 간화선의 영향이라고 본다. 

당대(唐代) 선문답을 기록한 것이 어록이다. 법안종의 도원(道原)이 1004년 <경덕전등록> 30권을 완성시켰다. 이후 분양 선소(分陽善昭, 947〜1024년)가 <100칙의 송고(頌古)>를 만들었고, 이어서 설두 중현(雪竇重顯, 980〜1052년)이 <100칙의 송고>를 완성시켰다. 당시 설두의 송고는 시문학적인 가치로 인정받았다. 이후 원오 극근(圓悟克勤, 1063〜1135년)은 설두의 송고 100칙에 수시(垂示), 착어(著語), 평창(講評)을 첨부해 <벽암록>을 저술했다. <벽암록>은 ‘종문(宗門)의 제일서(第一書)’라고 칭할 만큼 선종의 대의를 표명하고 있는 대표적인 공안집이다. 이러한 송고 문학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간화선이라고 볼 수 있다. 대혜는 당시 학자들이나 승려들이 문학적인 ‘송고’와 <벽암록>의 구절을 외우고 실참이 없는 것에 대해 염려한다. 게다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그릇되게 인식하고, 안일함에 안주해 있는 승려들을 비판하면서 간화선을 제창한다. 즉 간화(看話)란 조사가 보인 말씀과 행동을 깨달음의 직접적인 수단이자 과제, 다시 말해 화두로 삼고 그것을 참구하는 것이다. 이 화두의 역할은 바로 자기의 근원적인 마음을 조고(照顧)해 보는 도구이다. 즉 의심을 일으키도록 하는 강한 방편이라는 점이다. 

 ▶ 왜 보조지눌에 주목하나

보조국사의 휘는 지눌(知訥), 시호는 불일(佛日)이다. 지눌 스스로 ‘목우자(牧牛子)’라고 했다. 목우자는 ‘소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십우도의 네 번째 그림에 해당한다. 지눌이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찾아 길들이고자 하는 수행자로서의 진정성이 드러나 보인다. 지눌의 성은 정(鄭) 씨, 황해도 서흥 사람으로 1158년 정광우와 부인 조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국학(현 국립대학)의 학자였다. 지눌이 어려서부터 신병이 잦아 아버지가 ‘아들의 병이 나으면 출가시킬 것’을 발원할 정도였다. 

지눌은 8세 때 종휘(宗暉)에게 출가했다. 출가 후 구족계를 받고 일정한 스승 없이 도를 구했다. 25세 때인 1182년(명종 12년), 승과에 급제해 선지식을 두루 찾아다녔다. 사굴산문에 출가했지만 특정 종파에 국한하지 않았다. 곧 어느 선지식이든 법을 구하며, 경전과 논, 어록도 섭렵했다. 25세에 개경 보제사 담선법회에 참석했다가 당시 승가의 무질서함을 인식하고 도반들과 함께 정혜결사 할 것을 결의한다. 

이후 25세 창평 청원사, 28세 하가산 보문사, 41세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세 차례에 걸친 깨달음을 얻는다. 31세에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고, 1200년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가 이곳에서 11년 동안 선풍을 진작시키며 제자들을 제접했다. 52세 때 송광사에서 평소처럼 법상에 올라 설법하다가 주장자를 잡은 채 입적했다. 입적할 때에 “천 가지 만 가지가 다 이 속에 있다”는 열반게송을 남겼다. 사법 제자로는 진각 혜심이 있으며, 이 혜심은 수선사 2세가 된다. 저서로는 <수심결> <진심직설> <계초심학입문>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염불요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등이 있다.

구도 중 첫 번째 깨달음은 25세 때다. 전남 창평 청원사에서 주지를 역임하는 중에 <육조단경> ‘정혜품’을 읽다가 홀연히 깨달았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6근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알지만 만상에 물들지 아니하여 진성이 항상 자재하다.”

두 번째 깨달음은 28세 때로 예천 하가산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곧 선·교가 다르지 않음을 알았고, 원돈(圓頓)의 이치를 깨닫고 환희심을 얻었는데, 그 부분은 이러하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 ‘기이하고 기이하다. 모든 중생이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구나. 내가 마땅히 성인의 진리로서 그 허망한 생각과 집착을 여의케 하고 자기의 몸속에 있는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부처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리라’라고 한 부분에 이르러 나는 읽던 책을 머리에 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또 이통현 장자가 지은 <화엄론>의 10신(十信) 초위(初位)에 대한 해석을 열람하게 되었다.…이통현은 또 중생 스스로 범부라고 자처하고, 자신의 마음이 바로 부동지의 부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41세 때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대혜어록>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이 무렵, 지눌은 어떤 막중한 물건이 가슴에 걸리는 듯했는데, 다음 구절에 큰 깨달음 얻는다. “선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아니하다. 또한 일용응연처에도 있지 않고, 사량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아니하다. 하지만 참으로 고요한 곳이든 시끄러운 곳이든 일용응연처이든, 사량 분별하는 곳이든 그 어떤 것을 여의지 않고 참구하라. 홀연히 눈이 열리면 이 집안의 일을 알 것이다.” 

지눌은 세 번째에 이르러 견성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지눌이 세 번째 큰 깨달음이 <대혜어록>이었기 때문에 지눌 자신으로나 제자 교육에서도 수행법은 간화선이었다.

[불교신문3431호/2018년10월13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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